저는 어린 시절을 한국의 조그만 농촌 마을에서 보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고, 동네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들에 나가면 이리저리 펼쳐진 논두렁길이 나옵니다. 가을 녘 논두렁 길을 걷다 보면 황금빛으로 물들은 들판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좁은 논두렁 길이지만, 길 양 옆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심어놓은 콩이며 깨와 같은 곡식들도 여물어갑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펼쳐진 논두렁 길은 제 기억 속에 풍성함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갔던 오솔길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무들 사이로 간간히 비추는 햇살을 맞으며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새들이 지저귑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방긋 웃으며 인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시사철 푸른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들도 만납니다. 꼬불꼬불 이어진 작은 길이지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산정상에 도착합니다.
미국에 와보니 길이 참 시원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동 서부를 관통하고 남과 북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는 활짝 뚫린 신작로입니다. 넓은 평원을 가로지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정도로 까마득히 보이던 길도 금세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광경도 자주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면 언덕이 평지처럼 밋밋해서 거뜬히 오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우리의 인생길도 신작로처럼 넓게 그리고 평편하게 펼쳐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길 가운데는 황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운전해 왔는데 눈앞에 “우회하라”는 표지판이 있을 때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우회도로는 참을 만 합니다. 돌아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낯선 길을 운전하다 보면 종종 “막다른 길(dead end)”을 만납니다. 그때는 참 허탈합니다. 뒤돌아나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지름길인 줄 알고 신나게 달려왔는데 그 길이 우회도로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열심히 달려온 길이 막다른 길일 때 밀려오는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꼭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길을 이어주셨습니다. 이웃과의 단절된 관계도 길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오솔길 같은 포근함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모두 맞아주시는 신작로와 같은 넓디넓은 마음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 “Dead End”를 만나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길을 새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가운데 인생길을 걸어가는 행복한 순례자들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