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예화를 소개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커다란 명성까지 얻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마지막으로 사람들로부터 성자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부자는 성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성자가 사는 마을로 향합니다.
기차에 오른 부자는 일부러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삼등칸으로 갔습니다. “성자가 되려면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지”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초라하게 보이는 한 노인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이르도록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만큼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었는지, 그래도 교만하지 않았고 지금은 성자가 되기 위해서 가는 중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옆 자리의 노인은 은은히 미소를 띠면서 부자의 얘기를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드디어 기차는 성자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역에는 수많은 인파가 나와있었습니다. 부자가 모자를 멋지게 쓰고 옷 매무새를 만진 후에 기차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이 멋진 부자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사람들의 반응에 당황한 부자가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묻습니다. “누구를 마중나오신겁니까?” “예, 성자를 마중 나왔습니다. 저기 오시네요.” 젊은이가 가리키는 성자를 보고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옆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자랑을 모두 들어주었던 그 노인이 바로 성자였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자는 자신이 성자라는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가 성자인 것을 알아봅니다. 그의 삶이 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자는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습니다. 겉모습이 성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이 성자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를 눈 앞에 그려보면 화려함 보다는 평범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입니다. 그가 택한 열 두 명의 제자들 역시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락없는 나사렛 청년이었지만, 폭풍을 제어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프간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오르내립니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댓글을 읽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사람들이 교회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아니 교회를 찾았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돌릴 것 같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비관론이 제기됩니다. 하지만 2천 년을 견뎌온 기독교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나서서 기독교를 바로 세울 때입니다. 영어에서 성자(Saint)를 지칭하는 단어를 성도들(saints)에게도 사용하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는 성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할 때입니다. 겉모습은 비록 보잘것없고 평범해도 마음 속에 예수님을 품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각자의삶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남아 있는 한 기독교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바로 우리들이 희망입니다. (2007..9.20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