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하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가장 큰 은혜와 위로는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숭고한 정점(crux)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죽이는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로마에 반역하거나 세상을 소란케 하는 죄인들은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그리 신선한 이미지도 아니고, 희망의 이미지는 더군다나 아니었고, 죄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저주와 재수 없음을 뜻하는 나무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로마와 유대지도자들에게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3절 말씀대로 하면 저주를 한 몸에 받고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만 달리는 십자가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 이것이 십자가의 아이러니요 역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헐렸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닌“승리”라고 성경이 전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1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대조되는 단어가 사용됩니다.“죽음”과“생명”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따라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예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곧 생명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됩니다. 죽으심은 살아나심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몸에 갖고 산다고 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은혜와 위로를 받는 다는 고백입니다.“짊어진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인생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항상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예수의 생명”을 체험하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힘들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고, 낙심과 절망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은 엄연히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곧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고,“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아니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주어진 인생길을 감사와 찬양가운데 걸어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야 할 인생임을 다시금 느끼면서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갑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