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들을 향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라오디게아는금융, 의학, 염색등 산업이 발달했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물질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회에서 부(富)가 자랑거리가 되었고. 부족함이 없을 만큼 세상에서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이들의 자랑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계3:17, 표준새번역). 자칭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했습니다. 심지어 눈이 멀어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요즘 기독교의 모습이 자꾸만 중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새해 들어서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추한 모습들이지만,문제가 생긴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의 모습들입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기독교인들, 성적인 타락과 그릇된 영적 지도자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죽은 신앙, “나는 부자”라고 물질적인 축복을 자랑하는 기복신앙 –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안타깝고 때로는 분노하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눈에 보이는 축복에 연연해 왔습니다.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라오디게아 교회가누린 물질적인 풍요함을 동경해 왔습니다. 예전에 춥고 배고플 때는 믿음 가운데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졌어야 합니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이 현재 기도하고 소원하는 물질적인 축복은 더 가지려는 욕심과 남들보다 앞서려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속에서 기독교가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목청껏 외쳐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리어 배타적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이제는 물질과 성장 그리고 축복을 강조하는 외적인 신앙보다 내면의 성숙을 생각할 때입니다. 현재 기독교를 향해서쏟아지는 비판도 그 동안 교회가 물질과 성장 등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다가 진작 중요한 내면을 놓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회들이 물질주의와 기복신앙을 하루속히 뛰어넘어야 합니다. 축복 신드롬을 벗어나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하박국 선지자의 영성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영생이라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이 교회 안에들어와 자리잡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의내면을 가득 채우기 원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과 다른 그렇지만 세상이 흠모할만한 내면의 거룩함임을 기억합시다.
(2011.1.28. SF한국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