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에서

일본에 몰아 닥친 지진과 쓰나미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혼란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자동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둥둥 떠다닙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 할 배들이 육지로 올라와서 지붕 위에 올라앉기도 했습니다. 정착촌을 이루던집들도 정처 없이 파도에 밀려갑니다. 그 동안 경험했던 쓰나미와 달리 선진국 일본에 밀어닥친 이번 쓰나미는 인류가자랑하던 것들이 자연재해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쓰나미에 이어서 들려온 방사능누출 소식은 자연재해를 넘어서 인간이 쌓아 올린 기술문명이 빚은 인재(人災)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쓰나미로 일본인 아내를 잃은 한국인 남성에 대한 기사가 눈시울을 적게 했습니다. 남편은 트럭운전을 하고 아내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던 부부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던 날, 밀려오는 쓰나미를 피하기 위해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육지를 향해 달렸답니다. 간신히 학교까지 내달아서 이제 몸을 피하려는 찰라,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왔고 남편은 잡고 있던 아내의 손을 놓쳤습니다. 남편이 학교 난간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아내를 찾았지만파도에 쓸려간 아내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눈깜짝할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이 국가적 재난 앞에서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대처했다는 것이 미담처럼 전해지지만, 그들의 아픈 가슴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폐허로 변한 도시에 망연자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애처롭기 그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에 의인이 있느냐는 사단의 질문 앞에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을 지목해서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욥이 잘 대처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신앙의 친구들 마저 자신을 비난했을 때 고뇌에 쌓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심하게 폭풍이 부는 가운데 욥이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수백 가지 질문들을 폭풍처럼 퍼부으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피조물인 욥이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결국 얼굴을 땅에 묻고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번에 밀어닥친 쓰나미를 통해서 그 동안 인간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게 쌓아 올린 인류문명, 천년 만년 이 세상에 살듯이 애지중지했던 집들과 인생의 자랑거리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우리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왜소하고 초라한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쌓아놓은 모든 것이 그토록 허무하게 쓰나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는데도 우리들은 한 푼이라도 더 갖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면서 피조물인 인간이 최고인양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니 도리어 안쓰럽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번 일을 눈으로 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정돈하기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 욕심껏 펼쳐 놓았던 삶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세상 것들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 모드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앞서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던 교만도 거둬들여야 합니다. 욥이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들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겸허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기 원합니다. (2011년 3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