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들 3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것을 두고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네스토리우스교)가 신라에까지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치 않을뿐더러 설령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해도 그것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찌감치 천주교 선교사를 받아들인 일본이 임진왜란과 더불어 군종신부를 한반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고향인 경남 웅천에 군종신부 세스페데스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먼저 한반도에 전파되었습니다. 중국에 갔던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영정조 시대의 실학파 학자들이 서양문물과 더불어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조선시대에 금기시된 종교였기에 절두산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순교자를 냅니다.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627년 네덜란드인이자 개신교인들이었던 벨트브레(박연)이 귀화해서 제주도에 살게 되고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면서 부터입니다.1832년에는 독일 선교사 구츨라프가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겸 선교사로 한반도에 상륙해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해주고, 충청도 일대에 감자씨를 보급하기도 했습니다.1882년에는 만주 국경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 청년들이 연합해서 한글 누가복음이 번역되었습니다. 나라의 문을 굳게 잠가두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조선에 복음의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1884년에는 알렌 선교사가 왕실의 주치의가 됩니다. 이때부터 서양 선교사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한 이수광이 미국의 선교본부에 한반도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드디어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부활절 아침 인천항을 통해서 첫발을 내딛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모두 미국 동부에서 학생시절 예수님을 만났고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친구들이었습니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였고, 기혼인 아펜젤러는 감리교 본부에서 파송을 받고 일본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887년 14명의 조선인 신자들이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 교회의 전신입니다. 아펜젤러 역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정동교회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학생 2명과 더불어 시작한 학교가 배재학교로,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한 것은 경신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언더우드가 세운 최초의 장로교회입니다.

이들은 20대에 조선에 와서 자신들의 젊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선을 위해서 불태웠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정동교회안에 웹잇 청년회를 만들면서 그것이 YMCA로 발전하는 토대를 세웠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발행하였고 성경 번역에도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40세임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모습은 꽤 나이가 들어보였다고 합니다. 1902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내려갑니다. 서해 어청도 앞을 지날 때 아펜젤러가 타고 있던 배가 짙은 안개로 시야를 잃고 다른 배와 충돌하면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아펜젤러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오늘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착한 지 127년 째 되는 부활절입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에 휩싸여 있던 조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이 없는 미지의 국가들과 종족들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늘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써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