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것이 풍족하고 세상에서 염려할 것이 없으면 자연스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성경말씀이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인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간절히 믿은 사람들은 대개 어려움을 겪거나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죄인 취급받던 사람들, 질병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진 환자들, 낙심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았던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도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도 물론 여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데도 여성들의 역할이 꽤 컸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준 이래 여성들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도 부인이 되어서 동네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일도 담당했고, 사경회와 봉사를 통해서 교회가 굳게 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신학문과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김세지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김세지는 1865년 평안남도 여유에서 딸 넷만 있는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 부친이 사망했고, 당시의 관습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열여섯에 시집을 갔지만 2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보쌈해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김세지는 보쌈의 공포 속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시어머니의 주선으로 23세가 되었을 때 김종겸이라는 사람과 재혼합니다. 김세지의 새 남편은 학문과 재산을 겸비한 선비였지만, 나중에는 그만 주색잡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김세지가 교회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남편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안 남편은 그녀를 때리고 집에 가두곤 했습니다. 김세지는 자신을 핍박하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결국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김세지의 인생에 또다시 어려움이 닥칩니다. 두 번째 남편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김세지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합니다. 이름도 생겼습니다. 김세지 역시 당시 많은 여성들처럼 이름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녀를“새디(Sadi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세지가 되었습니다. 김세지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과 성경을 보급하는 매서인으로 열심을 냅니다. 평양의 남산현 교회에 출석하면서 일 년에 2천 번 넘게 심방했습니다. 그는 남성들도 하지 못하는 거친 일을 하면서 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청상과부로 불우한 인생을 살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한국 교회사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남겼습니다. 복음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때 신앙이 온전해 집니다. 김세지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본을 보여준 멋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