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가기 전부터 여러 분들이 한국에 가면 많은 것이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 주셨기에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내와 함께 고국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오랜만의 고국방문에 설렜던 제 마음을 시기했는지 열두 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기류가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많이 흔들렸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는 비행기 멀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기분 좋게 공항을 빠져 나와서 가족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올해는 윤달이 끼어서 봄이 늦게 왔답니다. 이제야 개나리가 핀다는 누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들판을 보니 여전히 겨울빛이었습니다. 4월의 생동감 넘치는 고국의 자연을 머리에 그리면서 왔는데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 길가에 전에 없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보면서 이곳이 대한민국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그리운 친지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안 파킨스씨병을 앓아오신 장모님은 많이 수척해 지셨고 걸음걸이도 힘겨우십니다. 아내는 장모님을 뵙자마자 눈물을 닦습니다. 누님과 매형들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깊이 파여있습니다. 조카들도 많이 장성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삼촌을 맞으러 왔습니다.미국에 간 이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조카는 어느덧 오십이 된 삼촌이 늙어 보인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정입니다.
그 동안 하늘나라로 가신 부모님과 장인 어른 그리고 큰 누님은 성묘를 통해서 만나야 했습니다. 고즈넉이 봄볕이 드리운 선산에 누워계신 부모님께서는 사랑하는 막내가 찾아왔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불효자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면서 기뻐하실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생전에 사시던 아파트를 가보았습니다. 부모님의 체취가 여기저기서 느껴집니다. 살아생전 부모님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오르고 그리움이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꽤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났습니다. 고향친구 삼총사를 만나서 복 요리를 코스로 즐겼습니다. 군대시절 신우회 활동을 함께 했던 옛 전우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그랬듯이 큰 힘을 주었습니다. 선교단체를 함께 섬겼던 후배들과도 오랜만에 호형호제하면서 회포를 풀었습니다. 한국에 귀국한 옛 교인들도 한국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처음 만난 친구들은 중년을 지나서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다 보면 때때로 외로움이 밀려오고 고국의 친지들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서 서로를 그리워했고 기도해주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만남이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얘기해 주신대로 한국은 정말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고향마을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외곽도로가 많이 생겼다지만 교통체증은 여전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얼굴의 반 이상을 덮은 황사방지용 마스크를 쓰신 아주머니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종종 걸음을 걷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삶도 녹록하지 않음을 금새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서 길을 걷고 있는 제 자신이 때때로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 사용해본 교통카드에 익숙해 지고 시차가 적응될 즈음에 샌프란시스코의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가 생각납니다. 교회 식구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해 집니다. 역시 제가 있을 곳은 샌프란시스코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오랜만의 고향 방문을 끝내고 고국에서의 모든 만남을 마음에 간직한 채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해주시는 고국의 가족들이 있기에 저희 네 식구가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목회도 능히 해 낼 수 있습니다. 친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마음은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모든 만남을 가슴에 품고 그들의 모습을 눈 앞에 그리면서 새벽마다 기도해주고 축복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앞 길에 어떤 만남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을지 기대하면서 모든 분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가꿔가야겠습니다. (2012. 4. 27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