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추수감사라는 용어는 농경사회에 적합해 보입니다. 우리처럼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라는 말보다 댕스기빙(thanksgiving)이라는 영어표현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과 주변의 친지들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는 가을에 포도농사를 마친 후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천막을 짓고 살던 것을 되새겨 보려는 초막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1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전통은 1620년 11월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66일간의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생소한 곳에서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부의 혹독한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 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신앙의 자유와 신대륙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보려는 부푼 꿈을 갖고 왔지만 밀어닥친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때 이들을 도와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인디언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옥수수를 심는 법부터,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법, 산에 자라는 독초들을 구분하는 법까지 원주민들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해 가을 첫 번째 수확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원주민들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초월해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원주민들과 함께 감사의 축제를 즐긴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전통에는 이처럼 자신의 종교와 생각을 넘어서 도움을 주고 받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함께 어울려 즐기는 속 깊은 감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첫번째 추수감사절을 지키던 청교도들의 마음이 한없이 기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같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동료들 가운데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대륙에 와서 첫 번째 수확을 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청교도들의 마음 한 켠에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아쉽고 허전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갖는 미안함입니다. 곧이어 닥치게 될 겨울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겨울을 나면서 동료들을 더 잃게 되면 큰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든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불안함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역시 속 깊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유카리스테오”입니다. “행복하다” 또는 “기쁘다”는 뜻을 갖고 있는 접두어 “유”와 “은혜”라는 의미의 “카리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첫 번째요 그 다음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은혜에 신앙을 초월해서 기쁨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냈던 청교도들이 아쉬움과 불안함 가운데 감사예배를 드렸듯이 우리네 삶 속에도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기쁜 일보다 속상한 일이 훨씬 많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생각처럼 세상일이 펼쳐지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마음에 휩싸여서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이 앞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 깊은 감사는 마음의 상처, 실패, 슬픔과 아쉬움까지 감사로 변환시키는 능력입니다.
요즘은 추수감사절보다 블랙 금요일 쇼핑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감사는 주는 것인데 많은 것을 값싸게 취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침 일찍 줄을 서며 쇼핑을 즐기는 분주한 발길들을 보면서 추수감사절의 본뜻이 많이 퇴색되었음을 느낍니다. 추수감사절 주간을 마무리하면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임했던 감사를 다시금 헤아려보기 원합니다. 스쳐 지나가면 잊혀질 일들도 잠시 멈춰 서서 그 안에 깃든 은혜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그때 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우러나올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은은한 기쁨이 샘솟고 소망의 빛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환해 지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해피 댕스기빙!
(2012년 11월 22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