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品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는 코미디 프로그램 한 꼭지의 주제가 “거지의 품격”입니다.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를 패러디한 코미디라고 들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거지와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실랑이를 벌입니다. 넉살 좋은 거지는 순진한 아가씨의 질문을 빌미로 500원 이상을 꼬박꼬박 챙깁니다. 아가씨는 “뭐 이런 거지가 다 있어”라며 거지를 향해서 소위 돌직구를 날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지에게 마음이 끌리는 듯 합니다. 품격 있는 거지와 도도한 아가씨 사이의 은근한 로맨스도 볼거리입니다. 코미디 속의 거지는 자신을 꽃 거지라고 밝히면서 꽃으로 장식된 겉옷을 입고 춤을 춥니다. 보통 거지와 다른 품격이 있는 거지임을 밝히는 동작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쓴 풍자소설가운데 <허생전>이 있습니다. 허생이라는 남산골 선비는 10년을 작정하고 학문을 시작했습니다. 7년쯤 지났을 때 집안일을 책임지던 아내가 푸념을 하기 시작합니다. 집은 다 무너져 내리고, 쌀독에 쌀은 떨어지고, 옷이 헤어지는데도 글만 읽고 있으니 아내가 부화를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길로 허생이 집을 나서서 장안의 부자인 변씨에게 일만 냥을 빌려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해서 상당한 돈을 법니다. 그렇지만 허생은 번 돈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변씨에게 빌린 만 냥을 갚은 후에 남산골 오두막집으로 돌아갑니다. 허생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본 변씨가 허생에게 먹거리를 대주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됩니다. 남산골 선비 허생은 부자 친구 변씨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물건을 대주면 정중히 사양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싶으면 곧장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어째서 내게 재앙을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

남산골 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품격을 지키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품격(品格)을 사전에서는 “사람의 품성과 인격”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가치나 위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품격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풍겨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갖고 있고, 높은 위치에 올라갔어도 저절로 품격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품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가치와 위엄이 있어야 품격이 살아납니다. 또한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부자 친구 변씨가 자신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의 호의를 베풀어 줄 때는 “어째서 내게 재앙을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 남산골 선비 허생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사회가 품격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고위 공직자가 남의 나라에 와서 추태를 벌인 것은 국가의 망신입니다. 어디 그 한 사람뿐일까요? 어쩌면 빙산의 일각처럼 사회 곳곳에서 무례하고 저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남의 말을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품격이 요청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배불리 먹여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한번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비난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메시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품격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살았습니다. 거기에 성령의 능력까지 더해지니 초대 교회가 부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인지 돌아볼 시점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품성과 신앙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가치와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식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말보다 삶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검증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로부터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답습니다. 당신을 보니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는 평판을 들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갖춘 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6절). (2013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