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인물 – 우찌무라 간조

오늘 살펴볼 신앙의 인물은 일본 기독교 역사에 토대를 놓았고 기독교는 물론 일본의 사회와 문화 발전에 공을 세운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군인이었고, 아버지는 문무를 겸비한 학자였습니다. 일본에는 천주교가 1549년에 일찍이 전래가 되었지만 200여년간 박해를 받아서 30만 이상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명치유신이후에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금지되었다가 1873년 기독교 금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은 삿포로 농업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입니다. 그곳에는 선교사들은 물론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기독교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해서 마가복음 주석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서양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주석을 모두 읽고는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이후에 우찌무라 간조를 통해서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How I became a Christan>라는 책에 그가 미국에 와서 경험한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마음속에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도 미국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884년 11월 24일 새벽에 나는 황홀한 눈으로 기독교 국가의 희미한 윤곽을 처음으로 포착했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묵었던 3등 선실로 내려가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 여러 사람들의 흥분에 뒤섞이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해안 산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자 내 꿈이 실현되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나를 압도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금세 금문교를 지났고, 눈앞에 펼쳐진 굴뚝과 돛대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교회 첨탑처럼 보였다.”

미국에 온 우찌무라 간조는 성경식 이름이 많이 있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랍니다. 사람들이 성스러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랍니다. 소매치기도 당하고 처음 미국에 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자선까지 물물교환을 하는 이 나라에 대해 놀라움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망연자실”했다고 적었습니다. 시카고를 거쳐서 보스턴에 간 우찌무라 간조는 애머스트 대학과 커네티컷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신학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썬다싱이나 종교개혁자 루터가 한 순간에 예수님을 체험한 것과 달리 우찌무라 간조는 끊임없는 고민과 질문을 통해서 차근차근 기독교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일본에서는 신앙의 동지들과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미국에 와서는 그의 스승들과 목사들과 교제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고 기독교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명감을 갖고 평생을 살았습니다.“맑고 기분 좋은 날이다. 고요하다. 아직도 너무 외로울 때가 많지만 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그의 일기 중에서.-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