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마음

지난 주간에는 먼저 하나님께 가신 선배 목사님의 추도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홀로 남으신 사모님께서 꿋꿋하게 잘 지내시고 두 딸이 이제는 대학을 모두 졸업해서 사회인이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계신 목사님께서도 흐뭇하게 내려다보실 것 같습니다.

목사님과는 30여 년 전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직장은 서로 달랐지만 같은 건물에서 그것도 같은 금융 쪽에서 일했기에 종종 만나서 식사를 했고, 사회생활 선배로서 저에게 조언도 해 주셨습니다. 대학시절 목회자가 되기로 헌신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시더니 결국 좋은 직장을 뒤로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저도 2년 후에 같은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목사님의 뒤를 따라서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10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임지를 옮기면서 생각지도 않게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목회현장에서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배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욥기는 구약성경에서 지혜문학에 속하는데 욥기를 좋아하시는 것에 걸맞게 현인(賢人)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여러 분야에 박식하셔서 어느 하나 막히는 곳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으신 훌륭한 목회자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가신 지 6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각이 나고 그립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일찍 데려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물론 하나님의 더욱 깊은 뜻이 있겠지요.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에서 저는 “듣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거의 백지수표를 솔로몬 앞에 내미십니다. 그때 솔로몬은 모든 것을 제하고 단지 지혜로운 마음을 구합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마다하고 지혜를 구한 것을 칭찬하시면서 다른 것들도 덤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마음”에 해당하는 말씀을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읽으면 “듣는 마음”이 됩니다. 그것도 현재 진행형이 쓰였으니 매 순간 듣고 있는 마음이라고 풀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듣다는 히브리어 동사에는 이해하다 또는 분별하다는 뜻도 있어서 지혜로운 마음 또는 분별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래도 히브리어 본문을 읽다 보면 제일먼저 “듣는 마음”이라는 의미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지혜는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늘의 지혜를 얻습니다. 앞에 가신 선인들의 말씀이나 그들의 인생을 살피고 들으면서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세상에 많은 지혜로운 현인들의 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들도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살면서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서둘러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지혜롭기 보다 어리석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SNS)가 발달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인터넷 상의 댓글 문화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너도 나도 자기가 옳다고 말하니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차분하게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 남의 사정을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듣는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그립습니다. “지혜는 들음에서 나오고 후회는 말함에서 생긴다”는 영국속담이 있답니다. 성경에서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했듯이 듣는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 가운데서 들을 것을 듣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합니다.(2015년 3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