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삶은 물론 신앙생활에서 형식에 치우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앙이 형식화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랑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로 드셨습니다.이들은 늘 따로 서서 기도했고 자신들이 행하는 신앙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기도 가운데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민족의 반역자로서 백성들로부터 눈총을 받던 계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했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으로 뛰어났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신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신앙이 형식화되면 겉만 번드르할 뿐 핵심이 사라집니다. 위선적인 신앙은 겉과 속이 다르니 회칠한 무덤처럼 역겨움이 밀려옵니다. 동시에 신앙이 습관화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신앙은 무엇이든지 소중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진실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대충 넘어가거나 겉으로만 잘하고 있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신앙이 형식으로 흐르고 습관이 되는 예 가운데 하나가 기도해 준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이웃사랑입니다. 당사자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서 같은 심정으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수많은 훈련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남발합니다. 아마 교회 안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기도할게요”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나서 마지막에는 기도해 주겠다고 마무리합니다. 메일을 쓰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도 기도한다는 말을 관용구처럼 사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해 주고 있는 지는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임에서는 기도제목을 나누는 일이 일상입니다. 어떤 분들은 남들의 기도제목을 꼼꼼히 적습니다. 어떤 분들은 적당히 듣고 넘깁니다. 최악의 경우는 모임에서 나눈 기도제목을 갖고 뒷공론을 하거나 구설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기도제목을 나누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모임에서 나눈 기도제목을 갖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이 교회 모임의 한 순서로 전락해서 형식화되지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입니다.
제가 만난 어떤 집사님은 이웃을 위한 기도제목을 두꺼운 파일로 만들어서 늘 갖고 다니셨습니다. 새벽마다 또는 자신의 기도시간에 손수 적어 내려간 또는 부탁 받은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기도하셨습니다. 이달 초 한 모임에서 강사로 나선 목사님께서는 백여 명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되는지 간증하시면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서 실제로 기도할 수 있는 숫자가 곧 그가 섬길 수 있는 교회 숫자의 최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만큼 이웃을 위한 기도가 고귀하고 “기도할게요”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기도할게요”라고 말하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커다란 위선입니다.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함께 기도제목을 나눈 이웃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럴 것이면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상투적으로 변하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신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무엇보다 “기도할게요”라는 말에 책임지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2015년 8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