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골짜기의 골리앗

지난 넉 달 동안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이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고난도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더욱 바른 신앙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두 달 정도 구약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기록된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은 매우 유명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이름을 알 정도입니다. 또한 베드로전서의 흩어진 나그네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살아가면서 골리앗과 같은 커다란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곧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당시의 강대국 블레셋과 역시 출중한 지도자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이 진을 쳤습니다. 엘라 골짜기는 테레빈이라고 불리는 큰 나무들이 서식하는 곳이었습니다. 55피트(16 미터)까지 자라는 큰 나무들이 골짜기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나무처럼 큰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맞은편에 진을 치고 아침마다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승장구하던 사울 왕도 골리앗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왕이 용기를 내지 못하니 함께 온 군사들도 저절로 겁을 먹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감히 골리앗을 대항해서 싸울 군인들이 없었습니다. 사울은 손을 놓고 40일을 아침마다 골리앗의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온 베들레헴 목동 다윗이 물 맷돌 다섯 개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넘어뜨립니다.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우기 까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형들은 물론 사울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말씀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임하는 골리앗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넘어뜨리는 비결을 찾게 될 것입니다. 골리앗은 무너져야 합니다. 골리앗을 보고 겁에 질려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이기에 그를 물리치는 것은 영적인 승리입니다. 그런데 골리앗은 강력합니다. 보고 있어도 겁을 먹게 될 정도입니다. 골리앗은 같은 시간에 나타나서 괴롭힐 정도로 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의 도전이기에 분명히 넘어뜨려야 합니다. 골리앗이 넘어지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기 원합니다. -河-

질투의 우상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성경 통독과 새벽기도회에서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의 가증스러움을 고발하고,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쓰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에스겔서 8장에는

“질투의 우상 (the ido/imagel of Jealousy)”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북쪽 문에 세워진

가나안이나 이방 신들의 형상으로 추측합니다.

 

그것을 두고 “질투의 우상/형상”이라고 부른 것은

그 우상이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2.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베이컨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네 가지 우상을 제시했습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나 특정 집단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

동굴의 우상은 동굴 속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빛으로 나와서 갖게 되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편견,

시장의 우상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의존해서 세상을 판단하고 거래하는 편견,

극장의 우상은 소신없이 극장의 배우처럼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처한 환경에 갇혀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자신은 옳다고 믿고 따르지만 결국 우상에 갇힌 셈입니다.

 

3.

에스겔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백성들이 이방 신을 섬기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섬깁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각종 곤충과 짐승의 그림을 붙여놓고 그곳에 절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생명과 진리의 길인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신을 따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떠나서

다른 신과 자신들의 생각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우상에 갇힌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입장이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동굴 속의 사고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종족의 우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때로는 자신을 숨긴 채

극장의 배우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정립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치장한 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상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등을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우상들을 몰아내고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으로 서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117:2)

For great is his steadfast love toward us,

and the faithfulness of the LORD endures forever.

Praise the LORD! (Psalms 117:2)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길 가는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발길 가는 곳을 찾아가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14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시는 하나님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편지를 권면과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많은 것을 잃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명과 진리의 길임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것이 가치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는 서신 마지막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믿음과 태도에 대해서 요약해 주었습니다.

 

우선,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힘들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내어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의 한 가지 예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를 맡기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염려를 하나님께 던지고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허리를 동이고, 고난이 닥쳐도 그것에 맞설 수 있는 갑옷을 입고,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안이하게 서 있으면 시험에 들고 신앙이 무너져 내립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신앙 가운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믿음을 영적 싸움에서 방패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시험을 이기고 마귀를 막아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넷째로,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혼자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함께 당하고 있다는 동지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래될 것 같아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잠깐이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고난의 끝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담대하게 고난을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참되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영역이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마음에 숨은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주일설교에서 살펴본 베드로전서 말씀이

이번 주로 마무리됩니다.

 

넉 달 가까이 베드로전서를 읽었습니다.

그래도 모두 살펴보지 못한 채 넘어간 본문도 많습니다.

대개 주일 예배에서 다루기보다

성경공부나 특강 등에서 다루어야 할 본문들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도 살짝 건너뛰었습니다.

그런데 3장 4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but let your adorning be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with the imperishable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n God’s sight is very precious.(1Pet 3:4)

 

베드로전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바른 믿음을 강조합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잠깐 지나갈 것으로 알고

시련을 순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승화시키길 요청합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핍박이나 고난

안에서 일어나는 염려와 갈등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내면이 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데

3장 4절에서는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또 다른 자아/존재를 가리킬 것입니다.

육신과 마음을 뛰어넘는 영적인 영역(심령 spirit)을 가리킬 것입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 심령이

온유(gentle)하고 고요(quiet)해야 합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안팎에서 파도가 닥쳐오지만

깊이 숨겨진 심령에서 온유와 고요가 활동합니다.

 

절대로 썩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값진 신앙 인격입니다.

 

2.

신앙은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순간마다

온유하고 고요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살면서

자칫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남에게 보이는 것들로 치장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베드로전서에서는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소개하면서

썩지 아니할 온유와 고요함을 누리길 요청합니다.

 

저는 이것을 위해서

하루 적어도 5분의 묵상(five minute meditation)을 제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고요한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성령 하나님의 만져주심, 위로, 능력,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수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차분하고, 침착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온유와 고요함을 누리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but let your adorning be the hidden person of the heart with the imperishable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n God’s sight is very precious.(1Pet 3:4)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삶이 요동쳐도

주님께서 주시는 고요함, 부드러움, 소망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9.7이-메일 목회 서신)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장까지 왔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육체적인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기는 이전 것들과의 단절도 여기에 속합니다. 옛날 습관과 결별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로부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는 자신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여정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부활과 생명의 인생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때 꼭 필요한 것이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지들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공동체를 세워가라는 말씀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공동체를 이루는 대표적인 두 세대가 나옵니다. 우선, 장로 입니다. 장로는 “원로”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보면, 교회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고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부릅니다. 공동체를 이끄는 중에 받은 고난이 헛되지 않고 장차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지도자이지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주의 일에 참여하고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장로에 이어서 젊은이들에게 교훈합니다. 여기서 젊은이는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 힘있게 활동하는 사람을 가리킬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장로들에게 순종할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것을 경험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세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겸손하게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같은 생각을 품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것을 부탁합니다. “모든 염려”는 예수님을 믿는 여정 가운데 생기는 불안과 근심입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당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각 개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나그네 된 하나님 백성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河-

샐러드 보울

지난 8월 12일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의 후폭풍이 미국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반대편 시위자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나치 사상에 물든 한 청년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서 20대의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물론 곳곳에 남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동상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대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남부 연합의 사상이 깃들어 있거나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하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공장소가 아닌 박물관 또는 특정 장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로 발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 등 백인 편향으로 보이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냅니다.

 

중서부를 비롯한 백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에게 “미국을 떠나라(get out of America)”는 구호와 함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강하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는 LA에서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백인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예정되었던 샌프란시스코의 극우단체 “패트리엇 프레이어”의 집회가 논란 끝에 취소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폭력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뒤숭숭합니다. 이미 4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학창시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께서는 미국을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라는 그릇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소개된 개념이니 백인 중심의 유럽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멜팅 팟”보다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녹아내려서 하나가 된 미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물이 같은 접시에 들어있는 샐러드처럼, 각각의 문화, 인종, 관습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미국이라는 그릇 속에 어우러진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만화경을 뜻하는 영어 표현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도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아름답다(beautiful)”에 “모양(form)”을 합친 말입니다. 다른 배경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샐러드 보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워야 할 미국이 많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KKK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물론 나치의 깃발을 들고 폭력을 일삼는 네오 나치 단체까지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혐오 범죄”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고, 폭언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총격을 가하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염소와 어린아이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 경계하고 안타까워할 일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일삼고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마음으로라도 동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인들처럼 보이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미국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화합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됨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멜팅 팟처럼 하나로 녹아질 수는 없지만, 샐러드 보울처럼 각자 제 맛을 내면서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각각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7년 8월 3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한 가운데

좋은 아침입니다

 

성경 통독과 수요예배,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는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애가는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Lament)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0-33장을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깨지는 돌 판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십니다.

새 언약의 선포입니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 애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가서 한 가운데인

3:19-25절에 소망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깜깜합니다.

쑥과 담즙(쓸개)과 같은 고난이 닥쳤습니다.

마음이 낙심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을 걸으면서도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돌보시고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애가 3:49-50)

My eyes will flow without ceasing, without respite,

until the LORD from heaven looks down and sees. (Lam 3:49-50)

 

2.

예레미야서와 애가서의 ‘한가운데’ 위치한

소망의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 가운데를 향해야 합니다.

주변을 맴도는 신앙은 어둠 속에서 헤매며

신앙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을 두신 것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한가운데”로 향해야 함을 배웁니다.

 

신앙의 한 가운데서

모든 참빛 식구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고 싶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애 3:25)

The LORD is good to those who wait for him, to the soul who seeks him.(Lam 3:25)

 

하나님 아버지,

고난의 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언제나 선하신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3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