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근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우리 안에서 독버섯처럼 생기는

염려, 불안,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것들까지 친히 맡아 주시고 돌보심을 확인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 불안, 두려움이 생기면

우선 멈추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몰아내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이나 상담을 비롯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도

마땅한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염려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요 없는 염려, 해결할 수 있는 염려, 과거에 대한 염려,

일어나지 않을 염려, 불가항력적인 염려.

 

예를 들면, 필요 없는 염려는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 팀의 승리를 놓고 안절부절 염려하거나

유명인의 기사를 읽고 괜히 그들을 걱정해 주는 것,

해결할 수 있는 염려는

해결하면 될 일을 괜스레 염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염려는

이미 지난 일이어서 염려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일어나지 않을 염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사서 염려하는 것,

불가항력적인 염려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염려의 5%에 해당한답니다.

 

3.

우리는 염려를 갖고 삽니다.

염려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염려가 생길 때,

그 자리에서 <우선 멈춤>을 외치고

기도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염려를 막는 백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소위 쓸데없은 것임도 꼭 기억합시다.

 

4.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염려]과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을

명쾌하게 구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돌아보며 근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의 끝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근심은 믿음 가운데 통제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로 근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

 

 

하나님,

우리의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25 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시는 하나님 (4)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 (2)

 

염려, 불안, 두려움 – 이 세 가지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수시로 또는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염려는 수시로 생깁니다. “염려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나오>는 둘로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양쪽에서 당기니 둘로 갈라집니다.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염려가 생깁니다. 조바심이 납니다.

 

염려는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염려가 마음과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불안은 모습과 행동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초조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안절부절입니다.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염려와 불안의 끝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최종적으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으로 결론지은 상태입니다. 밝은 것은 사라지고 어두움만 남았습니다. 염려와 불안의 단계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자 했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손을 놓고 멍하게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요동칩니다. 힘이 들어서 절망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자신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실존적 죽음이라고 했고 이것을 곧 죄라고 보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절망을 경험하는데, 절망 가운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절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절망으로 이어지면 절대 안 됩니다. 중간에 빠져나와야 합니다. 염려는 수시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빈도만큼 염려가 생긴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염려가 생기면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염려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던져 버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찬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찬송을 부르거나 찬송을 들으십시오. 찬양에는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불안을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안이 심해지면 의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혹자는 365회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말씀을 갖고 기도하고 외치면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다스려야 합니다.

 

염려와 불안, 두려움 그리고 그 어떤 절망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 원합니다. -河-

조바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처음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30대 후반의 늦깎이 유학생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공부를 시작했으니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도 헛되게 쓸 수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점수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고 순항하고 있었는데,

한 과목에서 점수가 기대보다 덜 나왔습니다.

그리 중요한 시험도 아니었는데,

마음도 상하고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점수는 올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는 한 과목 점수에도 조바심을 하고 속상해했습니다.

 

2.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당시에는 너무 크게 보여서

집착하고 실망하고 마음 상했던 일이 꽤 많습니다.

 

계획한 일 전체가 망가지거나

인생 전체가 무너져서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불안에 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조바심은

바라고 계획했던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조바심이 찾아오면, 갖가지 경우의 수들이 생각나면서

모든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이 멀어만 가고, 광야 생활이 길어지면서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잘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왔냐고 모세를 향해서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압제와 학대받을 때를

그리워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바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일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인생사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 여지없이 ‘조바심’ 불쑥 찾아옵니다.

 

조금 멀리 보고 갑시다.

조바심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나갑시다.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29:11)

 

 

하나님,

마음속의 조급함을 통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8 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시는 하나님 (3)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 (1)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돌보다”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을 갖고 보살피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셨기에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여나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어리석은(silly)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이거나, 기술과 과학의 발달을 의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믿고 싶은데 하나님의 돌보심에 확신이 없으니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는 말씀을 듣거나 동료 그리스도인을 보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 삶에 깊숙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살피고 함께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이 실체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몇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주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었는데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움을 받은 것과 도움을 준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으니 하나님과 그 돌봄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거나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롬8:28)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입해서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 연결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피고 해석하는 것에 노력(훈련)이 필요합니다. 생각하고 숙고하는 노력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늘 강조하듯이 영적일지(spiritual journal)를 쓰시는 것도 권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삶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느끼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河-

미소 되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이어서

반강제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

미소를 잃은 것이 아쉽다는 목요 서신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미소”입니다.

이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로 인사했습니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마스크 안에서 미소를 짓지만

서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조금 허전하고 삭막합니다.”

(2020년 5월 28일 목회서신)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과연 마스크를 벗을 날이 찾아올지 막막했습니다.

 

지난 5월 여행을 떠나면서

짐을 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40일 가까운 여정입니다.

기차 여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 항공사들의 짐 규정이 까다로웠습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는 꼭 챙겨갔습니다.

 

여행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생소한 나라에서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마스크 착용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곤 했거든요.

 

외국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우리 역시 마스크 착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맨 얼굴로 다녔습니다.

 

유럽의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예전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이 생각날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파리의 지하철에서도,

유명한 그림이나 조각상 앞에 빼곡하게 모인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지만,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2.

온 인류를 괴롭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 놀랍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이런 날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스크 뒤에 숨겨놓았던 미소도 되찾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도 미소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음껏 웃어야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아름다운 미소로 정겹게 인사해야겠습니다.

 

무뚝뚝, 무표정이 아니라

활짝 웃으면서 서로 인사합시다.

교회에서는 물론,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로 인사합시다.

날씨도 덥고, 속상한 뉴스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미소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9)

 

하나님,

밝은 세상을 만드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1 이-메일 목회 서신)

길동무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두 달 간의 안식월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선물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필요한 재정을 제공한 미국의 재단,

안식월을 가도록 허락하시고

교회를 섬겨 주신 참빛 식구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목요 서신을 받아 보시는 지체들 가운데

안식월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연락을 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주 서신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고  관심 가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2.

가족 여행을 포함해서

50일의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제는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반지의 제왕>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여행은 위험한 것이다.

집에서 나가면 어떤 운명이 닥칠지 모른다.”

 

지난 5월 6일, 여행을 떠날 때

기대와 불안함이 교차했습니다.

유럽의 대도시는 소매치기가 다반사라는 정보부터

기차를 타는 것, 정해진 숙소에 제날짜에 맞춰서 들어가는 것,

예순이 넘은 부부가 건강하게 여정을 끝낼 수 있을지 까지

영화 대사대로 집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아- 이래서 여행을 떠나는구나”하는 마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3.

영국 런던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태리, 그리스까지

40여 일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몇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우리가 가려는 곳을 찾지 못해서 캠퍼스를 헤매고 있을 때,

법을 전공한다는 대학원생이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분명히 바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길을 물었는데,

상냥하게 끝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일부러 인지 영어를 못하는 척하면서 지나친 경우도 꽤 있었거든요.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는 저와 아내가 따로 앉게 되었습니다.

둘이 같이 앉기 위해서 옆에 있는 신사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더니

생색을 내면서 딱- 잡아뗍니다. 머쓱했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가 편할 수 있는데,

자존심인지 아니면 우리 부부가 함께 가는 것에 대한 시샘인지 완강했습니다.

그 신사의 불친절한 표정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래도 저희가 묶은 에어B&B의 아랍인 여주인,

길을 묻는 우리의 짐까지 들어주겠다던 독일 시골의 장난꾸러기 십 대들,

군말 없이 무거운 짐가방 두 개를 트렁크에 실어주던 아테네 택시 운전사,

시부모님같은 우리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눠준 서울에서 온 신혼부부까지

기억에 남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부부는 과연 다른 여행객들에게

어떤 길동무가 되었을 지 궁금합니다.

 

4.

집을 나서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여행길이지만,

곳곳에 좋은 길동무들이 있으니

위험이 한결 줄고 편안하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좋은 길동무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커다란 축복입니다.

 

다시 매주 보내드릴 목요 서신도

여러분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잠언13:20)

 

하나님,

우리 모두

서로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는 길동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