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해설(14): 내 너를 위하여(찬송가 311장)/ 빌립보서 2장 5-11절
Author: 참빛
찬송가 해설 (14)
내 너를 위하여 (찬송가 311장)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찬송가 <갈보리산 위에>를 소개하였습니다. 아이오와 출신의 조지 버나드(1873-1958) 목사님은 십자가의 은혜에 관한 찬송가를 만들고 싶었지만,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미시간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데, 가사가 생각나면서 단숨에 써 내려간 찬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버나드 목사님 자신이 갈보리산 현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신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치면서 오늘은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찬송가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1절).
오늘 읽은 빌립보서 2장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케노시스(비움)”입니다. 케노시스라는 헬라어에는 “헛된 것이 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워놓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19:5)라고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부활로 이어질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비워서(케노시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것(케노시스)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배웠듯이 속죄, 화해, 승리였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는 프란시스 해버갈(Frances Havergal, 1836-1879)이 “이 사람을 보라”에 해당하는 라틴어 <에케 호모 ecce homo>라는 주제의 그림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군중 앞에 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이 탄생했습니다. 훗날, 필립 블리스의 <케노시스>가 찬송가의 곡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河-
기적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죽음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자연법칙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말 그대로 기적(miracle)입니다.
저는 2천 년 전의 부활을 증명하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살아냄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효력이 있음을 드러내자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2.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이라는 영국 작가는
동화 속의 상상력을 갖고 기적을 설명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동화처럼 자유자재로
세상을 만들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기꺼이 기적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체스터튼은 기적을 ‘더 큰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을 비롯한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는
더 큰 세계라는 뜻입니다.
기적을 인정할 때,
사고나 상상력이 하나님의 세계로 이어지고 확장되지만,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성의 영역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튼에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1898-1963)는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 S. 루이스에게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의 문을 열고
잠깐 방문하시면서 생긴 특별한 사건(special divine event)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믿고 인정할 때,
세상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3.
현대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진부한 말(cliché)이거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동화와 같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을 뛰어넘는 일들이 매번 발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모두 겪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말도 듣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비한 것만 쫓는 왜곡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올해 하반기가 되길 바랍니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시편72:18)
하나님,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신비를 보는 새달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 이-메일 목회 서신)
2025년 6월 5주 말씀
십자가의 은혜 (9): 십자가와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57-58절
십자가의 은혜 (9)
십자가와 부활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과 연결해서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핍박과 박해를 견뎠습니다. 죄인들이 죽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은혜를 속죄, 화목, 승리로 정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희생양이 되셨고 동시에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장 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을 담당하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 주셨음을 십자가의 세로목으로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의 가로목은 이웃과의 용서와 화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을 이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십자가를 자랑한 것도 십자가의 승리를 믿었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믿을 때,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요12:23; 13:31-32; 17:1).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속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히2: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시고 담당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영광과 존귀라고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영광이 되는 것은 그 끝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완성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는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되길 바랍니다. -河-
우주의 신비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월요일에는
매우 흥미로운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8억1천만 달러를 들여 건설한
칠레의 베라 루빈 천문대를 소개하는 자리였습니다.
.
과학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앞에서 발표하는 과학자들의 얼굴은 상기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라 루빈 천문대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새로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베라 루빈”이라는 명칭은
암흑물질(black matters, 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의 존재를 발견한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의 이름에서 왔답니다.
베라 루빈 천문대는 지름이 1.65 미터인 카메라 렌즈 3 개를 통해서 관측합니다.
32억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애플 핸드폰 카메라는 4,800만 화소).
베라 루빈 천문대가 찍은 사진을 한 번에 보려면,
농구장 크기의 초고해상도 TV 400대를 연결해야 한답니다.
앞으로 베라 루빈 천문대에서는
매일 같이 100장 이상의 고화질 우주 사진을 찍어서 정보를 축적하고
자격을 얻는 회원(국)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랍니다.
2.
이번에 천문대가 공개한 4개의 우주 사진은
정말 그림 같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천문대에서 공개한 사진을 보면서
‘생뚱맞게’ 창조주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창조주가 없이 우연히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가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텐트처럼 펼치시고
손가락으로 달을 붙이시고 별들을 붙이셨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동화처럼 묘사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만드신 그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자신을 생각하고 돌보시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신비로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3.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찮은 점일 뿐입니다.
샌프란에 사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폼을 잡으면서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을 잠깐 옆에 두고,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돌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문대가 공개한 사진만큼이나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믿음의 세계도 신비롭습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되듯이,
우리 믿음의 상상력도 실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잠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면서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면 어떨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26. 이-메일 목회 서신)
2025년 6월 4주 말씀
십자가의 은혜(8): 십자가의 삶/ 요한 16:32-33
십자가의 은혜 (8)
십자가의 삶: 승리
십자가의 은혜를 속죄, 승리, 화목으로 나눠서 살펴보고, 이제는 십자가의 은혜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화목의 은혜로 초청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가능한 사역입니다(마 16:24).
오늘은 마지막 세 번째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세력들입니다. 인간과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세력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12:2)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역설적으로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셨습니다:“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서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고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하나님 백성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는 위로로 임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조롱을 받습니다. 수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옷이 모두 벗겨지시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조롱과 수치를 없애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십자가의 길을 가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난다고 하시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십니다. 장차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제자들을 미리 격려하십니다:”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십자가는 모든 악한 세력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河-
자라감
좋은 아침입니다.
1.
2025년은 제가 담임 목회의 길을 걸어온 지
25년이 되는 특별하고 감사한 해입니다.
그동안의 목회를 돌아봅니다.
25년쯤 하면 자신감이 생길 만도 한데
아쉽고 부족한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감사한 것도 많습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25년 동안
재정적으로 돕는 형제도 있습니다.
인디애나와 이곳 샌프란까지,
한결같이 돕는 손길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복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함께 세워온 신앙의 동지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교회를 세워온 참빛 식구들께는
앞으로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것입니다.
2.
25년 목회하면서
제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돌아봅니다.
제자리에 멈춰 있거나, 혹시라도 뒤로 후퇴했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는 하나님 말씀 위반입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 목사에게 중요한 설교도 살펴봅니다.
저는 인디애나 시절의 설교 녹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샌프란에서의 20년 설교 녹음도 있습니다.
가끔 예전 설교를 들으면서 저 자신을 점검합니다.
저는 목소리가 맑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젊을 때 목소리가 지금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발음이 뭉치고,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긴장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많이 느려졌습니다.
주중에 설교를 여러 번 들으면서 모니터링하다 보니
발음도 비교적 명확해졌습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설교 내용은
그때그때 교인들의 상황에 맞게 설교했기에
각각의 설교에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만 놓고 보면,
모든 면에서 조금은 자랐습니다.
이다음 은퇴하면, 그동안의 설교를 아내와 함께 들으면서
그 시절 교인들을 떠올리며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3.
우리는 익숙한 것에 멈춰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이 그렇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 내 마음에 맞는 설교를 듣고 “아멘”합니다.
조금 불편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직장이나 세상의 일에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요즘 AI가 대세이듯이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실력을 키웁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만큼의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기도와 말씀, 신앙 서적 읽기, 개인 경건의 훈련 등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나 신앙이 멈춰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행사가 많지 않은데,
자칫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두고
신앙이 자랐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열심 있는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신앙의 환경도 바꿔보지만,
금세 지루해지니, 결국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변하고,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예수님을 향해서 자라가는 각자의 방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추지 말고, 자라가야 합니다.
때로는 탈피, 껍질을 벗는 아픔도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변화와 결단입니다.
그렇다고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면 됩니다.
대신, 멈추면 안 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예수님을 닮기까지 멈추지 않고 자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9. 이-메일 목회 서신)
2025년 6월 3주 말씀
십자가의 은혜(7): 십자가의 삶/ 갈라디아서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