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던 소망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비롯한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거세지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향한 소망이 더 커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다시 오실 예수님이라는 기대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교회에서 상투적으로 가르치고 말하는

일반적인 교회 용어일 수도 있습니다.

 

2.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언제든지 기쁨으로 그리도 당당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수시로 삶을 정리 정돈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립니다.

거추장스러운 삶을 못 견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수시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루를 사는 것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3.

단순한 삶입니다(Be simple).

중요한 것, 서너 가지 우선하여 선정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영성가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때 신앙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연스레, 주어진 삶에 집중하면서

밀도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은 물론 삶의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그렇지만 ‘단조로운 삶’은 경계해야 합니다.

삶이 단조로우면 지루합니다.

무색무취, 특색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이

분명한 색깔과 맛, 영향력이 있는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삶입니다.

 

단조로움이 흑백 텔레비전이라면

단순함은 다양하고 선명한 색상의 컬러텔레비전입니다.

대신, 너저분하고 불필요한 채널이 없을 뿐입니다.

 

4.

올해도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한해 내내 끌고 다니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과감히 가지치기(pruning)하고

가벼운 발길로 새해를 맞기 원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장 2절)

 

하나님,

단정한 신앙과 삶을 갖추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5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5)

소망의 인내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머리(head교리doctrine)-가슴(heart체험 experience)-손(hands실천 practice)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균형 잡힌 신앙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그동안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번 소개했기에 참빛 식구들이라면 세 가지 H(3 H’s)로 요약되는 신앙의 모습을 아실 것입니다. 배우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균형 있는 신앙으로 멋지게 자라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알려주는 신앙의 덕목은 우리가 그동안 배운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신앙의 세 가지 최고 덕목(spiritual top 3)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에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고 그중에 제일은 지난주에 배운 사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고전13:13).

 

여기서 믿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사역 중심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믿음의 삶, 사랑의 애씀을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믿음을 통한 행위와 삶, 사랑에서 비롯된 수고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행위)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과 행함이 동반된 사랑이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덕목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이미 기독교인을 향한 핍박과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도 유대인들이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으니,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세상에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핍박은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커졌습니다. 당시 문명을 선도하는 제국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해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닥치면 당황스럽습니다. 어려움이 지속되면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소망에 인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소망 가운데 끝까지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기다림에 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믿음의 행위(삶),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꽃피우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숨은 축복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나무 마루가 있었습니다.

 

옛날집 마루는 신발을 벗어 놓고 올라가는 앞쪽이 트여 있습니다.

가지고 놀던 작은 공이나 구슬 같은 것들이

마루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마루 밑이 깜깜하니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청색 플래시(손전등)를 갖고

마루 밑을 비춰서 공이나 구슬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마루 밑을 손전등으로 비추면

온갖 쓰레기들과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비추고 자세히 살펴야

마루 밑으로 굴러 들어간 공이며 구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예전에 잃어버렸던 제 물건도 덤으로 찾곤 했습니다.

먼지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2.

겉으로는 번드레해도

우리 삶의 뒷면은 꽤 복잡합니다.

마루 밑창처럼 먼지를 비롯한

쓸데없는 것들이 쌓여 있기도 합니다.

 

‘쓸데없는 것들’이 정말 많지요.

마루 밑에 슬쩍 넣어버린 것들도 많구요.

먼지가 쌓여가는 것들입니다.

 

비유가 심한 것 같아 보여도

솔직한 우리 모습입니다.

 

올 한 해도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마루 위만 신경 쓰지 말고

마루 밑도 살피기를 원합니다.

 

3.

그런데요!

제가 잃어버린 구슬이 마루 밑에 숨어 있듯이,

그곳에도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더 사랑하시거든요.

 

우리 삶이 너저분하고 부끄러워도

그곳에 숨겨진 하나님 손길의 흔적이 꼭 들어 있습니다.

숨은 축복들(hidden blessings)입니다.

 

4.

믿음의 잣대로 우리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곳을 빛 되신 예수님으로 비춰서

빛의 자녀에 걸맞은 신앙과 삶을 갖추기를 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었던

숨은 축복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축복이 아닙니다.

마루 위에 올려놓고 세상에 자랑할 축복도 아닙니다.

먼지 속에 숨겨져 있는 보석 같은 축복입니다.

잃어버린 축복이고, 꼭 찾고 싶었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리임을,

우리가 믿는 믿음이 생명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우리에게 임했음도

덤으로 그리고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숨겨진 축복을 찾아내는

감사절이 되길 바랍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하나님,

감사절을 맞아서

잃어버린 진짜 중요한 축복들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1. 28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4)

사랑의 수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기억”은 마음에 남은 잔상입니다. 좋은 기억이 있고 나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어떤 기억으로 남느냐가 중요합니다. 또한 기억의 특징은 생각나게 합니다. 연상 작용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감사했으니 좋은 기억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연상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멋진 모습이기에, 우리 교회도 닮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깃든 세 가지 신앙의 덕목을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믿음의 역사(works of faith),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 소망의 인내(perseverance of hope).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라는 뜻임을 지난주에 배웠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위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그런 점에서 행위는 믿음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보낸 편지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믿음과 사랑은 짝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특권과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신6: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요15:13). 여기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은 물론 십자가의 핵심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요일3:18).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수고’라고 설명한 이유입니다. 손과 발을 사용해서 애쓰고 힘쓰는 행위입니다. 신약성경에 쓰인 헬라어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하는 노동과 힘씀”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에 수고가 필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사랑을 수고로 실천하는 멋진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河-

 

아슬아슬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입니다.

재선에 실패했다가 다시 당선된

두 번째 징검다리 대통령입니다.

 

하여튼, 그의 이력과 성품이 보여주듯이

미국 역사에 없던 독특한 대통령임이 틀림없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측근들을 정부 주요 부서의 장관과 기관장에 앉히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파격적인 인사라고 우려 섞인 보도를 내놓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엊그제는

미국에 있는 불법체류자(서류 미비자)들을 추방하는데

주 방위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의중도 내비쳤습니다.

실제로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를 책임자로 내정했답니다.

 

트럼프 대통령 1기 정부에서도

불법 체류자는 물론 이민자에 대한 규제가 심했습니다.

영주권을 신청하신 분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시민권을 신청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는 일도 생겼습니다.

 

비슷한 일이 재발한다면,

미국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분들께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2.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체하러

단골 정비소를 찾았더니 손님이 무척 많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겠다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부품값이 올해만 세 배가 올랐다고 푸념합니다.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 뽑힌 대통령이

물가를 꼭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옆에 있던 여직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거들었습니다.

 

단골 정비소 주인의 소원이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

 

3.

어떤 비영리 단체에서 교회로 이-메일보냈습니다.

체류 신분을 갖추지 못한 채 미국에 거주하는

청년들의 추방을 유예하는 프로그램(DACA)이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폐지되지 않도록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체류신분을 갖추지 못하면 합법적 신분증이 없어서

심지어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

받아주는 대학교만 가야 하고, 취업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DACA(서류미비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으로

체류 신분을 연장해 가면서 미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나마 취소된다면 살길이 막힙니다.

그들의 심정으로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4.

지난 토요일 아침 기도회에서 시편 72편을 읽었습니다.

<솔로몬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통치 덕목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공의로 다스리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공평하게 재판하고 통치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때 산들까지 기뻐하고 풍성한 비를 내려 주시고

바르게 살려는 의인이 형통케 되는

샬롬(평화)이 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 백성들의 소박한 꿈이 이뤄지고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기 원하는 청년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아슬아슬’이 ‘휴-안심’으로 바뀌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시편 72:5)

 

하나님,

이 땅의 약한 자들이

꿈과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1. 21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1장 (3)

믿음의 역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감사의 글을 써 내려갑니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감사했습니다(1:2;2:13).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한없이 기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습니다(3:10). 핍박을 피해서 아테네에 머물고 있는 바울에게 궁핍과 어려움이 몰아쳤습니다. 그때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위로와 힘이 임했습니다(3:7).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소망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자랑스러운 면류관이 될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2:19).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세 가지 덕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믿음과 소망 사랑은 사도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신앙의 세 가지 덕목입니다(살전5:8; 롬5:2-5; 고전113:13; 갈5:5-6;엡4:2-5; 갈1:4-5).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등장하니, 우리의 신앙을 바치는 기둥임이 틀림없습니다(히10:22-24; 벧전1:21-22).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세 가지 신앙의 덕목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믿음을 더해 주셨고 그 결과 사랑과 소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개인의 신앙이 굳건해졌고 멋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덕목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성령께서 확증해 주십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교회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한 사람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받고 “큰 확신”(5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각처에 소문날 정도였습니다.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에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는 행함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핍박과 환난을 견뎠습니다. 삶이 변했습니다. 믿음으로 서로 사랑했고, 믿음으로 소망을 갖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믿음 안에서 신실했습니다.

 

“믿음의 역사(the works of faith)”- 우리도 믿음이 신앙과 삶을 통제하도록 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