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

믿음의 역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항상 기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모든 교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바울에게 감사한 일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특별했습니다. 폭력배까지 동원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밤중에 데살로니가를 떠났건만, 그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가 멋지게 열매를 맺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8)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신앙 안에서 올바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 사랑, 소망의 세 가지 덕을 온전히 간직했습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가 올바른 토대 위에 신앙을 세워갔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나타내는 결과(열매)가 더 소중합니다. 믿음에 역사가 따릅니다. 사랑에 수고, 소망에 인내가 있었습니다.

 

우선 믿음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매주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잘 나타납니다. 전능하시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은 물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용서받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와 하나님을 가로막던 죄와 허물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를 돕고 인도할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믿음의 역사에서 “역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믿음에 반드시 합당한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위는 내면적인 믿음이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개인의 삶과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 삶과 세상에서 믿음의 역사를 보고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 준 이웃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낱낱이 세면서

우리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기 원합니다.

 

동시에

함께 울고 함께 웃어준 이웃들,

무엇보다 가족들, 교회 식구들, 동료와 친지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섭섭하고 아쉬운 것들은

쉽게 기억하는데

받은 은혜와 사랑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이웃에게 받은 사랑을

찾아서 세어 보기 원합니다.

 

2.

우리의 감사가

가까운 이웃을 넘어서 더 멀리 퍼져 나가면 좋겠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세상을 지키는 분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희생하는 분들 등등

– 감사의 지경이 넓어지기 원합니다.

 

올해도 캘리포니아에 큰 산불이 났을 때

산불을 제압하기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운 소방관들이 계십니다.

 

이번에 소노마 카운티에서 난

킨케이드 산불 (Kincade Fire, Kincade st에서 시작해서 붙여진 이름)은

7만여 에이커를 태웠고, 강풍과 더불어 열흘 넘게 계속 되었습니다.

그 현장에 수많은 소방관이 투입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독도에 환자를 실으러 갔던 소방 헬기가 추락해서

탑승한 사람들이 모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악천후를 무릎 쓰고 환자를 살리려던 소방관들의 희생정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소방관들은

의레 불을 끄고 사고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아내, 자식, 형제자매,

자나 깨나 걱정하시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그들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아들입니다.

 

독도 헬기 사고의 부기장 아버지는

소아 마비 장애인으로 목발을 짚고 생활하시는 분입니다.

공군에서 11년을 근무하고 다시 소방관이 된 아들이 늘 자랑스러웠는데

몇 년 전 병으로 잃은 둘째에 이어 이번에 첫째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기만을 기도하면서 강원도에서 대구로 내려온

아버지의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메었습니다.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는 많은 분 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산불을 끄고

위급한 목숨을 구하는 소방관들께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의미부터

모든 상황과 모든 분께 감사하라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갔던 이웃들, 사람들, 상황을 포착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2)

Let us come into his presence with thanksgiving;

let us make a joyful noise to him with songs of praise! (Psalms 95:2)

 

하나님 아버지

감사가 넘치는 11월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11.7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3)

바울의 감사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감사가 먼저 나왔습니다. 3주동안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자신을 초대했던 야손은 물론 그리스의 고위층 귀부인들까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이고,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때로는 논쟁하고 선포했는데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이 데살로니가에 임한 것입니다.

 

하지만, 폭력배까지 동원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밤중에 도시를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마무리를 못한 것 같아서 디모데를 보냈고,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들으니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를 정성껏 가꾼 데살로니가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했습니다.

 
바울의 감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로 표현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를 위해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보낸 편지에 어울리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의 기도에서 제외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자나깨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곳에 남겨둔 성도들 생각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기억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항상 기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의 세 가지 기둥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의 신앙을 믿음, 소망, 사랑 위에 세우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을 택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살전 1:2-4)은 감사한다는 주동사를 중심으로 기도 속에서 교회를 기억하고, 교회의 믿음을 기억하고, 선택하심을 확인해 주는 세 가지 현재 분사 구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앞으로 3주 동안 데살로니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세가지 신앙의 덕목들(믿음, 사랑, 소망)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첫째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행함이라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내면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믿음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행동과 삶도 똑같이 귀합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세상 속에서 믿음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한 주간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을 보기 원합니다. 믿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河-

10월의 마지막 날에

좋은 아침입니다.

 

1.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할로윈 데이네요.

언제부터인지 할로윈 데이가

꽤 유행해서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할로윈 코스튬을 입고 인사합니다.

 

시장에 가니

할로윈 데이 호박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대목을 기대하면서 한 해 농사를 지은 분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뜸한 것 같은데 교회에서는

할로윈 데이 대신에 할렐루야 나이트를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세상과 대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칫 아이들에게

세상에 적대적인(against culture)사고방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물론 할로윈 데이를 문화적인 행사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 중심은 잡고 가야 합니다.

세상을 대적하지 않지만, 세상과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도, 단순하게 해답을 찾을 일이 아니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 고민하고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면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2.

마틴 루터가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개신교의 생일인 셈입니다.

 

면죄부를 파는 등 당시 가톨릭의 그릇된 관행에 대한

마틴 루터의 저항이었습니다.

루터뿐 아니라 스위스의 쯔빙글리, 제네바의 칼빈까지

종교개혁 정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된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세상은 변하는데 제자리에 있으면 순식간에 뒤처집니다.

교회가 재물과 권력을 탐하면

길에 버린 소금처럼 맛을 잃고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입니다.

 

어쩌면 요즘 교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감격하지 않고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개혁은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3.

뜬금없을 수 있는데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한국에서 대목을 보는 가요가 있습니다.

 

<잊혀진 계절>이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기고 연인과 헤어졌습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행여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는 가사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꿈을 꿉니다.

매년 같은 꿈을 꾸면서 그날을 맞는데

때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인 것 같아서 슬픕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4.

10월의 마지막 날을

멋진 날로 만들어 봅시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곳을 과감히 손보고

그분을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

Paul, Silvanus, and Timothy, 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in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Grace to you and peace. (1Thessalonians 1:1)

 

하나님 아버지

깔끔하게 10월을 마무리하고

11월 새달을 맞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10.31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2)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빌립보에 이어서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바울이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멋지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매우 이른 주후 51-52년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기와 핍박으로 서둘러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의 씨가 데살로니가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귀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과 헬라의 귀부인들, 핍박을 무릅쓰고 바울을 맞이했던 야손과 같은 성도들의 섬김과 희생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멋지게 자랐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한 소문이 인근 지역까지 퍼질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칭찬합니다. 더욱더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부탁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이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5장밖에 되지 않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넘칩니다. 제국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영적 싸움을 벌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염려되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말씀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책망할 것도 별로 없고,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을 조심하라는 말도 없고, 감사와 기도 그리고 칭찬이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의 특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여느 바울서신처럼 일반적인 편지 양식을 따릅니다. 인사말에서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은혜와 평강으로 문안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편지를 받는 수신인입니다.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편지요 말씀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이 보내는 편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사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의례적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진정성있게 하나님의 교회로 자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와 참빛 식구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것이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세상속의 기독교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 1974년에 열렸던 엑스폴로74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최대 백만이 넘는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만 명이 철야기도를 했고, 정부는 집회 기간 동안 여의도 일대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였습니다. 체신부에서는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기독교가 주관한 전도 부흥 집회가 온 국민의 관심과 국가의 지원 속에 말 그대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세속화로 불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이미 60년대부터 기독교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는 다원주의 사회에 돌입했습니다. 대학촌에서 목회할 때, 캠퍼스에서 종교활동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행여나 캠퍼스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외친다면 누군가 고발해서 금세 경찰이 출동할 기세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종종 기독교가 세상을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는 공공도로 밑에 성전을 건축했다가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불법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가 공공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단 총회가 부자 세습을 인정해주기로 결의한 것을 일반 언론까지 앞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일반 언론이 종교 문제 다루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교회나 종교를 일종의 성역으로 대우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특집 보도까지 만들어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한 세상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동화 속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뒤로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세상을 올바로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욕심까지 더한다면 교회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할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세상을 탓할 것도 아니고 무작정 세상을 등질 것도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이의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와 삶의 방식을 따라 삽니다.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자율 자동차가 나온다면 편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의 것들을 변혁, 또는 용도 변경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문화 안에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창조성이 요청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합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최근 유행인 인공지능(AI)이나 드론이 폭력과 테러에 사용된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믿으면 교회 안에서야 편할 수 있지만,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서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요청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도 구합니다.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우리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까지 확대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부탁을 마음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장 16절).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고 외쳤던 45년 전의 구호가 현실이 되는 ‘새로운’ 부흥을 소망합니다. (2019년 10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브엘세바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이-메일 서신에서는

조금 앞서가서 야곱과 요셉의 만남에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은 뒤로 돌아가서 야곱이 브엘세바에 잠시 머무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브엘세바는 “일곱 개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셰바”에 숫자 7과 맹세라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터를 잡고

야곱도 이곳에서 자랐을 테니 고향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고향과 다름이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향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이

원주민의 왕인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은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수양버들과 같은 에셀나무(옮겨 심고 가꿔야 하는 나무라고 식물에 대한 설교에서 배웠음)

아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삭 역시 아비멜렉과 그의 부하들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우물만 파면 그들이 와서 차지했습니다.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던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어서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고 브엘세바에 머물렀습니다.

 

2.

브엘세바는 야곱이 살던 헤브론에서 남쪽입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던 야곱이

브엘세바에 들려서 밤을 지냅니다.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가족 초청 이민으로 이집트로 가는 중이지만,

야곱의 마음은 무척 착잡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정도로 혼이 났다는 얘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 자신이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 이집트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조국을 떠나서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야곱의 마음이 십분 이해됩니다.

 

3.

야곱도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처럼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간절히 기도했겠지요. 주님의 뜻도 물었을 것입니다.

 

어느덧 130세가 되었으니 젊었을 때 야곱이 아닙니다.

벧엘에서 돌 베개를 하룻밤을 보냈던 것이나,

얍복 강가의 씨름도 이제 불가능합니다.

힘이 다 빠졌습니다. 민첩함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뿐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창 46:3-4)

 

이집트로 향하는 야곱에게 꼭 맞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이집트)으로 내려가겠고 (창46:4)

I myself to down with you to Egypt (Gen 46:4)

는 말씀이 야곱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만 내려가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기다리시는 것도 아니고

야곱에게 내려가지 말라고 말리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 가시겠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일행을 이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야곱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것입니다.

 

4.

우리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헷갈리고 불안합니다.

 

그때, 야곱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도 듣기 원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이집트)으로 내려가겠고 (창46:4)

I myself to down with you to Egypt (Gen 46:4)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주어진 인생길을 담대하게 걸어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10.2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