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 (5)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동안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연속해서 공부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유대인의 공회원이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훗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식에 찾아옵니다. 밤중에 찾아온 이후, 비록 공개할 수 없었지만, 숨은 제자로 예수님을 믿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 남성,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정반대, 땅끝에 위치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와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고, 그것은 계속 진행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에게나 차별이 없음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우물물을 좀 달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생수 (living water),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샘물까지 여인에게 꼭 필요한 복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여인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힘겨웠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가셔서 그곳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 “선지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경계하던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가운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나 예루살렘과 같은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메시아가 왔을 때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밝히셨습니다.

 

음식을 구하러 동네에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가에 놓아두고 동네로 달려갑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고, 메시아가 사마리아를 찾아오셨다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 일행과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河-

변화

제가 5월과 6월에 안식월 갖게 되어서

동안 목요 서신은 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복음 4장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새로운 사건임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땅에 가십니다.

유대인 남성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 여성에게 말을 거십니다.

땅끝을 살고 있던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일을 예수님께서 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전하신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복음을

사마리아는 물론 땅끝까지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사건이기에

인류 역사를 예수님 전과 후(BC and AD)로 나누는 것은 당연합니다.

 

2.

지금부터 62년 전,

아칸소(Arkansas)에서 시작된 한 잡화점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성장했습니다.

 

오클라마호마의 농장주 아들이었던 샘 월튼(Sam Walton)의 가족은

대공황을 맞아서 미주리로 이사합니다.

월튼은JC Penney에서 월 75불을 받고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고향에 돌아온 월튼은

장인에게 빌린 2만 불을 갖고 잡화점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월튼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상품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싼 가격으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종횡무진 뛰었습니다.

물론, 그의 저가 정책이 주변의 상점에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샘 월튼이 시작한 월마트 사업은

훗날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기술 혁명에 버금가는

백화점 사업의 혁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샘 월튼은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3.

월마트가 새로운 브랜드 “Better Goods”을

시작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Whole Foods 이나 Trader Joe’s와 경쟁하기 위해서

양질의 식료품을 저가로 공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이 착수하는 브랜드이니

얼마나 많은 숙고와 연구를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브랜드에 창업자 샘 월튼의 이름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창업자이고

여전히 그의 가족들이 소유는 물론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변화된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옛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꾸준한 변화를 통해서 월마트가 지금의 위치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4.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위에 걸맞게 성품이 변하고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알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날을 사시고

인생과 삶에 새로운 장(chapter)을 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믿음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나님,

어김없이 새날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저도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5. 2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4)

참된 예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대화를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매우 어색한 조합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말씀하신 것도, 사마리아 여인이 발끈한 것도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모두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끊이지 않고 대화를 이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시면서, 여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여인의 가장 아픈 곳까지 들어가셔서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19절)는 고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거기서 예배의 장소에 관한 여인의 질문은 예측 불허였습니다. 여인이 개인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예배에 대해서 질문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저는 여인의 가장 깊은 곳에 진정한 예배에 관한 갈증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선지자 예수님께서 앞에 계시니, 자신이 갖고 있던 신앙의 질문,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관해서 자세히 알려주십니다. 예루살렘이나 여인이 살고 있는 사마리아의 그림신 산과 같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옛 시대의 산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장소를 뛰어넘는 영(靈)이십니다.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요3:5).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하나님 백성이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는 “영과 진리(spirit and truth)”로 예배합니다. “진리의 영”이라고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나 우리의 참됨을 뛰어넘는 표현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진리 되신 예수님,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더불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곧 찾아올 것이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여인은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가 아니라 “누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여인이 장차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내가 그라.” 여인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해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河-

 

갈라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이 지나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과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만 존재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푸른색의 민주당과

빨간색의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있는 국민들도 많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에 나서거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공감대를 찾지 않고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으니

빨간색과 푸른색만 눈에 띌 뿐입니다.

 

2.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기는

정치, 문화, 경제 전반의 현상입니다.

 

포퓰리즘은

자기들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점점 극단적인 의견이나 정책을 제시합니다.

현실성이 없어도 일단 발표하고 봅니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대중의 요청이나 필요를 무시했기 때문이랍니다.

 

기득권에 취해서 국민들을 챙기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을 때,

포퓰리즘을 내세운 그룹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제 몫을 못 할 때, 이단이 판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은 갈라치기의 명수입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3.

갈라치기가 유행인 세상은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포퓰리즘이 가세하면

세상은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만 옳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포퓰리즘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기를 힘입어 세상을 갈라놓지 않으셨습니다.

 

경계를 허무시고, 차별을 폐지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악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셨지만,

선한 길을 가려는 모든 이를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

예수님이시라면 호되게 꾸짖고

희생자들을 감싸안으시고, 둘을 하나 되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추한 모습이 정상은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품는 예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이라고 갈라치지 않고

‘우리’라고 품어주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생명의 복음, 화해의 복음,

용서와 회복의 복음이 세상에 편만 하길 기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

 

 

하나님,

주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25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3)

영과 진리로 (1)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쉬고 계시던 예수님과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찌하여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성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쏘아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물을 주는 것은 물론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대화를 이어 가셨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도 소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물을 길을 도구가 없는데 자기에게 물을 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여인의 말이 맞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상식을 뛰어넘는 복음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올 필요도 없고, 다시 물을 마실 필요도 없는 생수입니다. 안에서 샘솟는 영원한 샘물입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서 그런 물을 달라고 달려듭니다. 드디어 여인의 마음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4:16). 뜬금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솔직히 자기 사정을 예수님께 밝힙니다.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삶 한가운데로 깊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여인의 실존을 건드리셨습니다.

 

복음은 피상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해서 그곳부터 변화를 일으키고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힘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유대 남성이 아니심을 직감했고 인정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 여성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조상은 이 산(그림신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어떤 것이 맞느냐는 신앙적인 질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앙에 대해서 깊은 조예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을 놓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디서 예배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장소나 출신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드디어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4:26). 여인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河-

탄식할 용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봄에는

시편의 탄식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70%가 탄식시라는 사실은

시편을 기록하고 전해준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보여줍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웠지만,

우리의 현실이 늘 기쁘고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슬픔과 탄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탄식시라는 사실에

도리어 위로를 받습니다.

 

2.

시편 탄식시의 특징은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연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탄식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시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탄식을 넘어서 믿음과 확신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무엇보다, 탄식의 과정을 충분히 갖습니다.

눈물로 이불이 젖을 정도로

자기 죄를 놓고 참회하며 탄식합니다.

뼈가 마를 정도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려달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내놓고 탄식합니다.

 

탄식의 과정을 온전히 지나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3.

어렸을 때는

울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말고

대장부답게 견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혹시라도 눈물을 보이면

약하고 소심하고 쩨쩨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슬픔을 꾹꾹 참는 것을 강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탄식을 올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울어야 합니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탄식은 솔직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도리어 정직하고 진실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10여 년 시간이 흘렀어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분들을 일일이 찾아가시고

눈물을 씻겨 주시길 기도합니다.

 

슬픔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 겁니다.

탄식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탄식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힘

그리고 소망을 구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여전히 슬퍼하며 탄식하는 이웃들을 위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