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자고 일어나면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숫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경제활동 제한은 물론

통행 금지를 권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 지루한 팬데믹이 언제나 지나갈지요!

 

그런데

요즘 동네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가끔은 마스크 없이 거리나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코스코를 비롯한 시장에 가도

6 ft 거리 두기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경제를 닫게 되면

소상공인들은 물론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 분명하기에 염려스럽습니다.

 

2.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이 돌면

자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이웃의 건강을 위해서도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예수님 말씀의 적용입니다.

 

지난번에 나눴던 요한일서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동안 기독교는 이웃 사랑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공동체 구원을 무시했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무시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주일예배로 모이지 못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습니다.

목숨 걸고 예배드리던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뀐 예배 형태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또 다른 사랑의 실천을 배웠습니다.

나보다 남을/이웃을/세상을 먼저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억지스럽게(?)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깨닫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느슨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3.

모든 것이 느슨해지기 쉬운 시간입니다.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우리의 마음가짐,

매주 현장 예배로 드리지 못하면서

솔직히 우리 신앙도 느슨해지는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팬데믹이 갖고 온 새로운 일상에

점차 길들여진 느슨함입니다.

 

이제 2020년의 마지막 달력을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세대가 특별한 해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세상을 향해서도

느슨해진 것들을 다시 정돈하면서

한 해를 근사하게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p.s. 팬데믹 초반에는 Happy birthday노래를 두 번 부르면서 손을 씻었는데

요즘은 손을 씻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다시 처음/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Philippians 2:5)

 

하나님,

팬데믹의 고난이 얼른 지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3이-메일 목회 서신)

2020 대강절에 (1)

교회력에 따르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로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이기에 네 번의 대강절 주일에 촛불을 하나씩 켜놓고 예배합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또는 가정에 촛불을 밝히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면 더욱 뜻깊은 대강절이 될 것 같습니다.

 

올해 대강절과 성탄절 말씀은 성서일과(lectionary)에 주어진 본문을 따라서 말씀을 준비해서 나눌 계획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사야서 64장 1-9절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70년 동안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았습니다. 비록 포로로 이방 땅에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잊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는 등 이스라엘에게 바빌론 포로 기간이 신앙을 다시 세우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국 바빌론이 페르시아와 고레스에 무너지면서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다시 짓고 신앙 회복에 힘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바빌론을 물리친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고향에 돌아온 감격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떠났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이처럼 다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죄로 찌들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presence)가 하나님 부재(absence)로 변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 셔도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때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간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임하시길 간청합니다.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강림에 산들이 진동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제국들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벌벌 떨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도 하나님처럼 임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깨어 있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 나옵니다. 토기장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길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는 회개입니다.

 

올해 대강절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맞이합니다. 흩어진 참빛 식구들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고 우리 안에 능력으로 임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河-

감사절에

Happy Thanksgiving!

 

1.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모임이 취소되고

조촐하게 맞는 감사절입니다.

 

그래도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샘솟길 원합니다.

 

2.

올해는

1620년 겨울, 메이플라워를 탄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동부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400년되는 해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원래 예정했던 뉴욕 허드슨강 하구가 아닌

보스턴 근처 플리머스에 상륙해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이

집을 짓는 법부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법과

사냥까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벌인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3.

그런데 4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의 관점이 아닌

원주민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새롭게 조망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USA Today/Cape Cod Times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추수감사절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대한 기획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생존 비법을 알려준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것에 대해서,

사실 청교도들은 자신들만의 조촐한 감사절 축제를 했고,

총을 쏘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는데

총소리를 들은 원주민들이 무장하고 찾아오면서

협상과 동시에 원주민들이 사냥한 사슴 등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화기애애한 축제이기보다

어색한 긴장감 속에서 펼쳐진

일종의 외교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이지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신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청교도들도 원주민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 신사협정을 맺지만, 청교도들에게 유리한 조문들이었습니다.

 

결국,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청교도들에게 제압당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오늘이

이 땅에서 원래 살고 있던 네이티브 어메리칸들 입장에서는

통곡의 날(the day of mourning)이 된 것입니다.

 

4.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한 지 157년,

그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축제의 날로 흥겹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마음 한쪽에

추수 감사절을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어쫓긴 비극이  시작된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 혜택을 입으면, 누군가 손해를 입고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하고

세상일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감사절을 보내면서,

올 한 해 동안, 행여나 나(우리)로 인해서 슬퍼하거나 손해 본 이웃은 없는지

내가 기뻐하고 감사할 때, 같은 상황에서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은 없는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피고, 매사를 속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22:2)

The rich and the poor meet together; the LORD is the maker of them all. (Prov 22:2)

 

하나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어그러진 세상을 품고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26이-메일 목회 서신)

 

 

 

 

 

 

2020 추수감사절에

오늘은 2020년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예년 같으면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여선 교회가 준비한 추수감사절 만찬을 나눌 텐데, 올 해는 각자 흩어진 자리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흩어져서 예배한 지 여덟 달이 넘었으니, 새로운 일상에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주일마다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친교할 때 더욱 힘이 생기는 것을 실감한 올 한 해였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뜻 깊게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어보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지 못했지만, 지난 8개월여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한 예배에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아가방에 있어야 하기에 부부가 따로 예배드려야 했는데, 집에서 드리는 예배가 집중이나 참여도에서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또한, 집에 있으니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영상 예배의 이점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니, 예전의 공동체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했는지 실감했습니다. 아직은 언제 모여서 함께 예배할 수 있을지 정해진 날짜가 없습니다. 그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다시 모였을 때 우리의 기쁨이 배가되고 더욱더 뜨겁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개인별로 또한 가정별로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불평이 먼저 나오고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는 찾아서 세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95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오라”로 시작되는 1절은 모든 백성을 하나님께로 초청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노래하고 즐거이 외치는 장면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부르는 승전가처럼 들립니다.

 

시편 기자가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신보다 뛰어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높으신 것이 없으니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주간이길 바랍니다. -河-

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1.

매일 아침

구약성경의 다니엘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6장)는 바빌론에 포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한 말씀입니다.

후반부(7-12장)은 장차 일어날 예언으로

신약의 요한 계시록에 맞먹는 구약의 묵시입니다.

 

다니엘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1차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단순히 포로로 잡혀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서 명철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바빌론식 교육을 시킨 후에

제국 바빌론을 대표하는 현지 출신 지도자

또는 왕의 자문관으로 채용하기 위해서 선발된 것입니다.

 

2.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빌론 왕궁에서

바빌론의 학문과 왕을 보필하는데 필요한 과목을 수강하고

이름도 바빌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니엘의  히브리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이었는데

그만 <벨드사살>로 바뀝니다.

바빌론의 신 ‘벨’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포로 신분이었기에 다니엘은 꼼짝없이

바빌론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한 가지 뜻을 정합니다.

이름도 바뀌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바빌론 학문과 정책을 배워야 하지만

바빌론 신들에게 바쳤던 음식만은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국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다니엘이 지키려는 거룩, 구별점이었습니다.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마침 좋은 상관을 만나서 다니엘은 채소만 먹으면서

수련 기간을 모두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꿈을 해몽하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3.

다니엘은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알아내고 해석하면서

왕을 보좌하는 높은 관리에 임명됩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하는 일은

이방 나라, 제국의 일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백성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일과 별개의 일을 해야 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떤 면에서 제국 바빌론과 흡사해서

신앙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조건 세상일을 거절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은 기꺼이 수용(assimilation)하고

지켜야할 신앙의 원칙은 고수(separation)하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처음에 뜻을 정해서 우상의 음식을 먹지 않은 다니엘이

바빌론의 높은 관리에 올랐지만,

하루 세 번 고향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성취한 업적을 두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서 하나님을 언급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도 하나님을 높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제국 한가운데서

포로 다니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삶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4.

아침마다 함께 읽어나갈

다니엘서 말씀이 기대됩니다.

 

비록 짧은 분량의 나눔이지만,

제국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께 위로와 도전이 되길 기대합니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단 2:47)

The king answered and said to Daniel,

“Truly, your God is God of gods and Lord of kings”(Dan 2:47)

 

 

하나님,

오늘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하시고

다니엘에게 주신 지혜와 용기, 신앙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19 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일서 (8)

담대함이 이것이니

 

요한일서의 결론이 시작됩니다. 사도 요한의 관심은 영원한 생명에 있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도 생명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오늘 본문도 요한복음과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2).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고의 선물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죽음과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죽으나 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누립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동감 있게 살아갑니다.

 

요한일서에는 “담대함(자신감)”이라는 표현이 네 번 등장합니다. 첫째로 예수님 안에 거하길 부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럽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2:28)

 

둘째로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받을 것이 없다면,  담대함을 얻고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이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3:21).

 

셋째는 지난번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마지막 심판을 맞게 될 것입니다(4:17).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도 기도와 담대함을 연결했습니다. 담대함이라는 표현이 마지막 때와 기도를 가리키면서 번갈아 등장한 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5:14).

 

단지 우리의 소원만 알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청해야 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입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한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요!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용감함” “자신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도 자신 있게 예수님을 맞을 수 있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도 용감하게 대면할 능력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힘인지요! 믿음 안에서 담대하고, 자신감 넘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편견

좋은 아침입니다.

 

1.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813년에 출판된 소설인데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당시 영국은 계층 간의 구별은 물론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습니다.

결혼도 가문 간의 연합이었지,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되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부의 차이를 극복해서

남녀가 결혼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 주인공 다아시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 외모도 출중한 청년입니다.

여자 주인공 베넷은 서민에 속했습니다.

 

서민 출신인 여자 주인공은

부자 청년 다아시가 “오만(pride)”하다는 “편견(prejudice)”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아시는 오만하게 행동했습니다.

다아시가 특별히 오만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어도

그의 가문은 물론 외모와 외적인 조건이 그를 오만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은

자신의 오만함과 서로를 향한 편견을 극복하면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부자 청년과 마음씨 착한 가난한 여성의 결혼 –

뻔한 주제인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치밀한 구성으로

당시의 사회상은 물론 인간 내면을 깊이 살피고 있습니다.

 

2.

오만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오만을 해결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겸손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도 오만을 막는 길입니다.

 

편견은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오만보다 조심할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의 결과가 생각보다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편견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부잣집 남자는 오만하다는 편견을 떨쳐버린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하고 은근히 선행을 펼친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이들이 결혼에 이른 비결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한 열매였습니다.

 

우리 모두 “편견”을 갖고 살아갑니다.

 

분명히 잘못된 근거에서 비롯된 선입견인데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는 것들입니다.

 

편견은 떨어 내야 할 불필요한 선입견입니다.

편견을 갖고 사는 것도 오만입니다.

 

3.

요즘 미국의 화두는

흑백갈등으로 대표되는 인종차별(racism)입니다.

 

어떤 작가는 인종차별의 시작이

편견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편견이 차별(discrimination)로,

그 끝에 인종차별이라는 결과물이 생산되었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차별로 발전하면 안 됩니다.

그 결과는 인종차별과 같은 추악한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는 사랑, 배려,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두 달여 살펴본 요한일서에서도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길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오만하지 않고

사랑은 편견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원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일 4:12)

No one has ever seen God; if we love one another, God abides in us  (1 John 4:12)

 

하나님,

행여나 편견을 갖고 이웃을 대한 적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원하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12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