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트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20년 전 한국에 있을 때를 회상하면

이맘때가 되면 캐럴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흰 눈도 내리면서 연말연시 기분이 났는데

미국은 땅이 넓어서인지 늘 비슷비슷한 일상입니다.

 

우리 교회도 12월 첫 주가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것이 최고의 변화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 가정의 80% 정도가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답니다.

 

예전에는 거의 생나무 트리를 사용했지만

요즘은 인조 트리도 많이 사용합니다.

초기 비용은 비싸지만

매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에서 수입한 플라스틱 제품이 대부분이어서

환경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생나무를 훼손하면서

일 년에 한 달 트리를 세우는 것이 자연 훼손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합니다.

 

생나무 트리를 지지하는 분들은

서부의 오레곤이나 동부의 노스캐롤라이나의 대형 트리 농장에서 재배된 것으로

트리를 뽑고 나면 다시 심는 식이고,

침엽수인 트리는 아무 곳이나 잘 자라서 쉬는 땅을 이용하는 이점이 있다고 반박합니다.

 

2.

트리 하나를 놓고도 이렇게 사람들의 견해가 갈리니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살펴보는 로마서 3장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생각을 갖고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희생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역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추구하는 삶의 목표, 생각하는 관점,

세상을 보는 견해가 흑과 백처럼 갈라졌습니다.

화평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가 임하길 바랍니다.

 

자잘한 것에는 의견의 차이가 생겨도

크고 중요한 이슈에 마음을 합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인조 트리가 좋을까요? 생나무 트리가 좋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트리를 파는 야드에 가서 트리를 골라와서

장식하는 것을 생각하면 생나무가 좋을 겁니다. 향도 느낄 수 있구요^^

비용이나 재활용 측면에서는 인조도 괜찮겠지요.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자잘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로마 3:25)

God put forward as a propitiation by his blood, to be received by faith. (Rom 3:25)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6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한 의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한 의”는 죄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 절인 1장 16-17절입니다.

 

로마서 2장부터 복음이 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는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로마서 2-3장에서 복음의 핵심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을 버렸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고,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며 섬겼습니다. 세상의 추한 일들이 모두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가 될 때까지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율법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도 그릇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이 최고라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고 했을까요(롬2:24). 헬라인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나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결코 나을 수 없습니다(롬3:9). 이처럼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을 믿거나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의인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술의 말로 저주하고, 발은 피 흘리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전혀 필요가 없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로 충분하니 구약성경은 용도폐기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요 말씀이니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죄가 무엇인지 판명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되는 21절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일찍이 예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은 물론 양심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성품과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와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河-

지킴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를 읽고 있는데

어제는 창세기 4장의 가인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생명의 기운을 갖고 태어난 가인(“생명”)이

허무하게도 동생 아벨(“하벨/허무함”)을 죽였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서 에덴에서 쫓겨났다면 (창 3장)

가인이 아벨을 죽이므로

사람 사이 (특히, 가족)의 관계를 깼고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우를 지켜줘야 할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쫓아내시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mark)를 주셔서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거역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배우고 있듯이, 이 사랑이 결국 우리에게도 임했지요!

 

가인이 이렇게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놓고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내면서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 하나님을 향한 원망, 자존심, 분노 등등이 작동한 것입니다.

 

가인의 불편한 심기를 아신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고 너를 원하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고 부탁하고 경고하셨건만

훗날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그랬듯이

가인 역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한 질문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래, 너는 아우를 지켜 주어야 했어”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키는 자(keeper)”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을 지키는 자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자였습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고 유혹했을 때 이브를 지켜줘야 했습니다.

형 가인 역시 동생 아벨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동생 아벨의 생명을 빼앗은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청지기(steward)”라고 부릅니다.

 

매 주일 한마음과 한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각 인생은 물론 세상의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인생을 살고

가족과 공동체는 물론 이웃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까지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올 한 해도 한 달 남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습니다.

작은 일까지 충성하는 청지기로 열한 달을 살았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의롭고 선하게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기 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하지 말고

아우를 지키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각자의 삶도 아름답게 관리하고

가족과 공동체도 아름답게 세우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세상까지 지키고 세우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행여나 지킬 것을 소홀히 했거나

쓸데없는 자존심과 시기와 질투로 죄를 다스리지 못한 채

넘어지고 무너진 영역이 있다면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복구하면서

올 한 해 깔끔하게 마무리합시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 4:15)

And the LORD put a mark on Cain, lest any who found him should attack him.(Gen 5:18)

 

하나님 아버지,

서로 지켜주고 세워주는

참빛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9이-메일 목회 서신)

의인은 없나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로마서 3장 10-18절에는 열네 개의 구약 말씀이 절묘하게 인용되고 결합되어 있습니다. 원래 랍비 교육을 받았던 바울이기에 구약 성경에 정통했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구약을 마스터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과시라도 하듯이 구약 말씀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본문의 기초가 되는 말씀은 시편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를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리석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행실도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모실 곳에 세상이 자리잡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굽어살피시니 모두 한가지로 치우쳤고 악한 길로 갈 뿐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자기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혼란스럽습니다. 금세 사라지고 결국은 썩어질 것을 애지중지 여기며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추구하니 하나님 눈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을 묘사했던 말씀도 인용합니다(시편 5:9).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로는 아첨을 떨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세상 풍조에 맞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모함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3천 년 전 다윗 시대에도 있었다니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악인을 고발하는 시편 140편 3절의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약이 되는 말이 아니라 독을 묻힌 말로 서로 저주합니다. 악한 마음이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잠언 1:16과 이사야 59:7-8절의 인용을 통해서 악한 사람들의 행동, 발걸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음을 넘어서 악한 마음을 품고 실제로 악한 행동을 하는 세상입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들이 세상을 주관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과 그것에 조종받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을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의인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니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그 아들을 보내주셨을까요! 세상의 어그러진 모습을 돌아보니 주의 은혜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할렐루야! -河-

소금언약

일찍이 소금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소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곳에 도시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육식을 하면 동물의 육질에서 우리 몸에 꼭 필요한 하루 1g 정도의 소금을 섭취할 수 있지만, 채식을 한다면 소금을 섭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소금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어서, 소금을 유통하는 업자들이 부를 축적했고 나중에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주관하고 세금을 매겼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소금으로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봉급에 해당하는 영어 샐러리(salary)가 나온 이유일 것입니다. 앞의 “살(sal)”이 소금을 뜻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샐러드, 살사, 소시지와 곁들이는 살라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상품성이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위에서 소금을 채취하거나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었던 천연 소금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화학 소금이 등장하면서 소금은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이 되었습니다.

 

소금이 우리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소라는 것 외에도 소금의 진가는 여러 곳에서 증명됩니다. 무엇보다, 부패를 막아줍니다. 맛을 냅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고 간이 맞지 않으면 산해진미도 입에서 뱅뱅 돌 뿐 넘어가질 않습니다. 소금은 나쁜 습관이나 부정을 막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행여나 이불에 실례를 하면 키를 머리에 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와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발길이 집에 들어오면 소금을 뿌려서 퇴치했습니다.

 

성경에도 소금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과 더불어 부패를 막고 세상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라는 부탁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길가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서는 곡식을 빻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룩이나 꿀은 곡식을 부패시키지만, 소금은 부패를 막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살아있는 것들의 기를 죽이듯이 서로 양보하면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부탁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기록한 구약성경 역대기서에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겼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다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비로소 이들은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금처럼 변함이 없으셨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재난을 당했으니 다시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는 상거래는 물론 계약을 맺을 때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소금을 위약금으로 걸거나, 계약 당사자가 소금을 친 음식을 먹으면서 상호 계약을 지킬 것을 약속했습니다. 소금 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친구 관계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소금의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에서 입술의 말에 소금을 치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말 저말 하지 말고 말에 책임지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변치 않는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소금 언약을 하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지만, 하나님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두고 사람들이 왈가왈부하지만, 하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소금 언약을 지키십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우리 역시 소금 언약을 마음에 품고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금 언약이 유효했기에 은혜로 맞는 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금처럼 변하지 않고 맛을 내는 신실한 믿음으로 응답하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감사절을 맞기 원합니다. (2018년 11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해피 땡스기빙

Happy Thanksgiving!!!

 

1.

단비와 함께 맞는

2018년 추수 감사절입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다음 주에도 비소식이 있으니

산불도 꺼지고, 덕분에 공기도 좋아지고,

우리 동네 산천초목이 푸르게 변할 것 같습니다.

 

여름철 교회 앞 정원(?)에 물을 줄 때마다

제가 아무리 정성껏 물을 줘도

아침마다 내리는 이슬과 밤새 내린 보슬비를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곤 하는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추수감사절과 구약의 절기 (특히 가을의 초막절)을 연결해 보았지만

추수감사절 자체는 꽤 미국적인 절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추수감사절 전주에 늘 있는 교회에서의 터키를 곁들인 만찬,

추수감사절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나누는 만찬과 대화,

그리고 추수감사절 다음날(요즘은 상술이 발달해서 당일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Black Friday shopping 등등 – 나름 추수감사절을 꽤 즐기고 있습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코스코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이번 주부터 팔고 있어서 서둘러 트리 하나를 사다가 교회에 세워놓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청년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이 함께 트리를 장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2.

올해 우리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원했습니다.

 

미국 생활이 그렇듯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세 자리가 나는 것이 나그네로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 듯이,

한 해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곁에서 한 길을 걸어간 가족, 교우, 친지들께

무엇보다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준 자신에게 감사하기 원합니다.

 

찬송가 429장 가사 대로

받은 복을 세어보고, 그 복에 이름을 붙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아쉬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니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감사절을 맞는 것입니다.

 

산불로 인해서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과

명절이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분들도 마음 한 켠에 두고

겸손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것도 기독교인의 미덕입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Happy Thanksgiving!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1thes 5:18)

 

하나님 아버지,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2이-메일 목회 서신)

                   

2018년 11월 3주 말씀과 찬양 (추수감사주일)

로마서 3장 강해 (2):  우리는 나으냐/ 로마서 3:9

찬양: 하늘을 바라보라

 

찬양: 저 천국 음악소리

봉헌송: 참 아름다워라 (바이올린; 이지수)

2018 감사절에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추수”라는 말은 예전 우리나라가 농경 문화일 때 붙여진 명칭입니다. 미국은 물론 영어의 표현은 “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12월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계획과 달리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했는데 동부의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듬해 가을 추수를 끝내고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가졌고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성경에서 찾으면 가을 수확을 마치고 지키는 수장절(또는 초막절)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는 봄, 여름, 가을에 걸쳐서 수확했던 이스라엘의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지킨 절기들이고, 추수감사절이 단순히 미국의 명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예전 우리나라도 농사가 주업일 때는 가을에 수확을 끝내고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기에 추수 감사라는 용어가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사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모든 일이 우리가 뜻한 대로 펼쳐진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아쉽고 부족한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가정과 생업을 지켜주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크고 작은 일들 속에 임한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감사하기 원합니다.

 

400여 년 전 청교도들이 처음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들을 도와준 인디언 추장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들이 농사와 사냥은 물론 집을 짓는 생존방법을 알려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생명의 은인들이었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일 년 동안 함께 한 이웃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도 놓칠 수 없습니다. 자칫,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대한 감사를 소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웃의 손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올 한해도 잘 견뎌준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홀로 설 수 없지만, 때때로 외롭고 험한 길을 스스로 잘도 걸어왔습니다. 때때로 혼자라서 외로웠지만 대견하게 견뎠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향한 감사도 빼놓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기 원합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복되고 풍성한 감사절 맞으시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