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그리스도인:로마서 12장 (1)/ 로마서 12장 1-2절
진짜 그리스도인:로마서 12장 (1)/ 로마서 12장 1-2절
로마서 12장 (1): 너희를 권하노니
오늘부터 로마서 12장을 차근차근 연속해서 공부할 예정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당시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얼마전 아침에 나누었듯이 바울이 드디어 로마로 가서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로마서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전반부(1-11장)는 “무엇을 어떻게 믿을까”에 대한 대답이고 설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인은 물론 로마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은 역사합니다(롬1:16).
로마서의 후반부(12-15장)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12장 1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전반부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백성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가리키는 접속사입니다. 전반부가 ‘신앙’에 관한 교훈이었다면, 후반부는 ‘생활’에 관한 교훈인 셈입니다.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신앙이 생활과 삶에서 결정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혹자는 로마서는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한 교리를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마서의 종착지는 신앙을 넘어서 생활 즉 거룩한 삶에 있음을 “그러므로”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바울이 앞에서 설명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은혜를 모두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긍휼(compassion)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긍휼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처럼 큰 은혜를 힘입었으니 그 은혜에 걸맞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씀은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부탁입니다. “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속에는 “강요하다” “간곡히 부탁하다” “가르쳐서 행하게 하다” “위로하면서 격려하다”와 같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길 부탁합니다. 몸은 육체를 뜻합니다. 영과 육을 분리하고 영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바울은 몸을 강조합니다. 육신은 영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그리스-로마 철학과 다른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사람들에게
맥도널드의 “빅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라면”이 있습니다.
빅맥은 1967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당시 가격은 0.45센트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2022년 기준으로 $3.95).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의 노동자들이
미국 부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 죽”을
(부대찌개의 원조라고 하면 더 서글퍼지는군요)
단돈 5원에 사 먹기 위해서 줄을 길게 섰습니다.
그것을 본 삼양식품의 창립자 고 전중윤 명예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라면 제조 기술을 배워와서
1963년 9월 15일에 처음으로 삼양라면을 세상에 출시했습니다.
꿀꿀이 죽보다 비싼 10원에 팔았지만,
30원 하던 김치찌개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엊그제 9월 15일,
우리나라 라면이 회갑을 맞았습니다.
2.
쌀이 부족하던 1960-70년대,
정부는 보리나 콩을 섞어서 먹는 혼분식을 장려했습니다.
저도 국민(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이 도시락 검사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보리밥이 절반을 차지하지 않으면 벌을 받던 시절입니다.
라면이 쌀 부족을 톡톡히 메꿔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매운맛이 가미된 농심 신라면, 오뚜기 진라면,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까지
다양한 라면이 경쟁적으로 출시되었습니다.
떡볶이에 라면을 넣은 “라볶이”도 유행했습니다.
꼬들꼬들한 면발은 물론
국물까지 호로록 마시는 라면 먹기의 정석,
과자처럼 라면을 부숴서
그 위에 스프를 끼얹어 먹는 라면 먹기의 변칙,
꿀꿀이 죽에서 시작된 부대찌개에 라면을 넣어 먹는 아이러니,
건강을 생각해서 자제하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 라면의 치명적인 유혹!
우리 국민의 라면 사랑은 여전히 식지 않아서
국민 한 명당 한 해에 77개의 라면을 먹는다니,
거의 4-5일에 한 번은 온 국민이 라면을 먹는 셈입니다.
라면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면 업체들의 매출 절반이 해외에서 옵니다.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도 대한민국이 아닌 베트남입니다.
라면 업체들이 BTS 멤버까지 광고 모델로 쓰면서 홍보하는 이유입니다.
라면 출시 60주년을 맞은 삼양 라면은
음식과 과학을 융합한 신제품을 출시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라면의 진화를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3.
삼양 라면이 60주년을 맞은 9월 15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전 세계 인구의 9.2%가
장기적인 식량 부족으로 고생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인구 10명 가운데 한 명이 기아선상에 있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기아 인구는 더 심해졌답니다.
모든 사람이 최소한 먹거리는 해결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이 없으니
세상에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없어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4)
하나님,
배고픈 이웃을 돌봐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21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8):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시편 27편 1절
세상에는 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베풀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분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신뢰를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좋은 교회들이 훨씬 많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밝고 맑게 만드는 원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찬송가 429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를 지은 엘라이자 휴잇(Eliza E. Hewitt, 1851-1920) 역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밝힌 인물입니다.
휴잇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 학생이 널판자로 자기 선생님인 휴윗을 공격했습니다. 그 사고로 휴잇의 척추에 문제가 생겼고, 평생 척추 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졸지에 장애인이 된 휴잇에게 하루하루가 절망이었습니다. 6개월쯤 지났을 때, 깁스를 풀었지만,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었고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고, 아이들도 성실하게 가르쳤는데 자기에게 찾아온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원망이 나왔습니다. 당장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휴잇 여사에게 공원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생겼습니다. 담당 의사의 허락을 받고 목발을 짚고 공원에 나와서 햇빛을 씌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밝은 빛으로 그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자기 몸은 비록 망가졌지만, 하나님은 따스한 봄볕처럼 휴잇 여사를 비추고 언제나 거기에 계셨습니다.
병원에 돌아온 휴잇 여사가 창가에 앉아서 받은 은혜를 글로 적어 내려갔고, 그것이 찬송가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입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주의 영광 빛난 광채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그 이후로 휴잇 여사는 교회 초등부를 맡아서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한때는 휴잇 여사가 부장으로 있는 주일학교가 백여개 클래스를 운영할 정도로 부흥했습니다. 비록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었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마음껏 발휘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찬송으로 표현하는 일도 계속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휴잇 여사의 찬송이 여섯 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주 안에 있는 나에게>도 휴잇 여사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예수 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넓은 은혜와>도 휴잇 여사가 만든 찬송입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인류가 큰 역병을 거치고 나면
세상을 지배하는 사상과 종교, 가치관이 바뀌곤 했습니다.
중세 시대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에
신(神)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신본주의 사상이 뒷전에 밀리고
인간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인본주의가 태동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후 위기까지 겹치면서
예측불허의 어지러운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100년 만에 지진이 나고
극한의 더위 또는 한파가 발생합니다.
우선 나만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
분노와 불만이 사람들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에 버금가는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이어집니다.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를 차지한 느낌입니다.
2.
한국에서는
학부모들의 과도한 요구와 괴롭힘에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말은 그만두고
학생은 물론 학부모도 선생님을 향한 예의가 각별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다녔던 시골 국민(초등)학교에는
농사일 중간에 학교를 찾아오신 어머니들께서 “선상님”하고 부르면서
자기 자식들을 부탁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선생님들의 학생 폭력이 도가 지나친 적이 많았습니다.
일제와 군사 독재의 잔재인 것처럼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심하게 구타하고 인격을 모독했었습니다.
그래도 스승과 제자의 예의범절은 깍듯했는데,
요즘 한국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쉬쉬”하면서 덮기에 급급합니다.
3.
언젠가 “내 탓입니다”는 표어가 유행해서
자동차 범퍼에 달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선 내 탓이라고 말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남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손수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기편을 챙기는 것을 넘어서,
공공선(公共善common good)을 추구하는 어른들도 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앞장서면 어떨까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신앙, 기복적인 신앙,
방어하기에 급급한 자기중심의 편협한 신앙을 극복하고
세상을 품을 정도의 관대함, 어지러운 세상을 살리는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공적인 신앙이 꼭 필요한 요즘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지금도 각박한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가시는 분들을
주님께서 꼭 붙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도 함께 울고,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마5:13)
하나님,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14 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8): 내 주를 가까이/ 시편 63편
야곱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치면서, 생각난 찬송이 우리가 즐겨 부르는 <내 주를 가까이>였습니다. 권사님들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찬송입니다.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는 야곱이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갈 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배경입니다. 훗날 고백했듯이 야곱은 지팡이만 들고 집을 떠났기에, 돌베개를 베고 들에서 잠을 자는 신세였습니다. 야곱이 꿈을 꿉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세워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어느 곳에 가든지 함께 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떠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고, 야곱이 누워있는 땅도 장차 후손에게 주실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곳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의 배경입니다.
작사가 사라 애덤스(Sarah Adams 1805-1848)는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던 여배우였습니다. 언론인이자 정치가 아버지를 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애덤스는 어릴 적부터 외모는 물론 다재다능했습니다. 여배우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애덤스 부인이 공연 중에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과로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당시의 치명적인 질병인 폐결핵이었습니다.
애덤스 부인은 나이 서른둘에 배우의 길을 접습니다. 절망에 젖어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 때, 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창세기 말씀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상황이 야곱의 처지에 중첩되면서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를 쓰게 됩니다: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애덤스 부인이 작사한 지 15년 후, 1,600여찬송가를 작곡한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 로웰 메이슨(R. Mason, 1792-1872)이 곡을 붙였습니다. 메이슨은 어느 날 밤에 일어났을 때 고요함 가운데 멜로디가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미국의 25대 대통령 매킨리는 <내 주를 가까이> 찬송을 자주 불렀고 임종과 장례식 때도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 나라로 갔다고 알려집니다. 영화 <타이타닉>에도 침몰하는 배의 갑판에서 평온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1912년 4월14일 새벽 2시 20분, 대서양을 항해하던 호화 여객선 타이태닉호가 암초에 걸려서 침몰할 때, 영국 감리교 신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월리스 하트리(Wallace Hartley, 1878-1912)가 여덟 명의 동료 연주자와 함께 <내 주를 가까이>를 실제로 연주했다고 알려집니다. 이처럼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것이 신앙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5년 만에 야외예배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 갖는 야외 예배였기에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노동절 연휴와 겹쳐서
출타하신 참빛 식구들도 많이 계셨지만,
가능한 분들은 거의 모두 참석해 주셨습니다.
올해는 애완견들도 함께 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풍성한 먹거리,
서로를 소개하고, 힘들 줄도 모르고 뛰고 즐겼던 놀이,
알차게 준비했던 주일학교 아이들 프로그램까지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2.
우리 기독교에서는
“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들어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 마음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별칭도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함께 함을 강조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권면했습니다(롬12:15 ).
사자성어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생각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같은 길을 가라는 부탁입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무슨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 함께 공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거기서 공동체의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 참빛교회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함께 있고 싶은 신앙의 동지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엊그제 야외예배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6개월 된 아기부터 80대 후반의 권사님들까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같은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던지요!
참빛교회를 허락하시고
참빛 식구들을 한 공동체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보라,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 133:1)
하나님,
주님 안에서 하나된 교회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7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