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2

좋은 아침입니다.

 

1.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교회 표어에 맞춰서

다시 한번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월에는 “우리의 돌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 달에는 “하나님의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돌봄을 실천하면 자칫 지치기 쉽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돌봄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돌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용서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지난 1월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헨리 나우웬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 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돌봄의 영성, 46-47쪽)

 

돌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헨리 나우웬은 신앙이 식었다는 표시라고 일러줍니다.

 

3.

7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compassion), 돌보심을

아주 깊이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고, 무조건적이고 때로는 예상을 뒤엎는지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더없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돌보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힘과 은혜로 돌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돌봄을 말씀드리면서 외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시는

참빛 식구들을 챙기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서로 세심하게 챙기고 실제로 돌보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 (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Psalms 6: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8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2)

가죽옷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임합니다. 은혜에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이유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믿고 난 다음에 돌아보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길을 가는 여정이 모두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방문과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기에 예정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섭리”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각이나 삶의 중심을 나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돌보라는 의도였습니다. 돌봄의 최종 목적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롬12:1) 것입니다. 그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주인공이 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이러한 본성을 통제하고 뛰어넘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조건없이 어느 때나 작동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졌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서로의 허물과 수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려니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치, 즉 부끄러움은 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그릇 행했을 때 밀려오는 감정입니다.

 

옆에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하는 일이 결국 그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수치를 가려 주시고, 결국에는 이들을 다시 에덴으로 부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연약하고 심지어 거역한 모습 가운데도 임합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정성껏 빚으신 인간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감을 감사하고 주님의 돌보심을 깊이 경험하는 한 주간 되기 바랍니다.-河-

사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시편 말씀은 우리 신앙에 종합 비타민과 같습니다.

 

제가 신앙을

<머리/교리 또는 앎Doctrine>

<가슴/체험 Experience>

<손과 발/생활 Practice>로 설명하는데,

시편 말씀 속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지혜를 알려주는 시편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탄식함으로 주님께 나가는 탄식 시편,

온몸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의 일을 하겠다는 결단의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막힐 때

시편을 갖고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으로 찬양합니다.

시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도 얻습니다.

 

2.

시편 말씀 가운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42:1)는 구절을 종종 묵상합니다.

 

“갈급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그>는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은 사슴이

살기 위해서 헐떡거리며 물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뜻합니다.

 

물 한 방울이 그립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물만 생각하고 물이 그립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일치시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3.

우리 삶이 참 바쁩니다.

중요하고 다급한 일들에 쫓겨 삽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추구하고 찾아 나서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당장 필요한 의식주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헐떡거리며 찾아 나설 수 밖에요.

그렇게 우리의 힘을 모두 소진하니 하나님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외의 것(extra-), 즉 욕심을 버리고, 경쟁심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서면

하나님을 찾고 사모할 여유가 생깁니다.

 

요즘 시대에 우리가 헐레벌떡 찾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헐떡거리며 찾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 안에서 다시 시작되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책임지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가 추구할 생명길입니다.

이것을 신앙 안에서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실제로 힘이 있고

우리 삶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간증할 만큼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시편 107:9)

For he satisfies the longing soul,

and the hungry soul he fills with good things.(Psalms 107:9)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향한

간절함, 갈급함, 갈망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1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1)

  • 토기장이 하나님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돌보는 교회”입니다. 요즘 세상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돌보는 것보다 내 것을 챙기고 내가 행복한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의 도움을 구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향하길 바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자세로 살아가니 세상살이가 각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성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억지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면 저절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으로 확대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돌보며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새해 첫 달에 함께 나눴던 말씀의 요약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돌보는 삶을 사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가족, 참빛 식구들, 이웃과 세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셨을 것입니다. 이제 하반기에도 돌봄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이번 달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돌봄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기 원합니다.

 

창세기 두 번째 장인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아담을 만드시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웅장하고 조화로운 우주의 창조를 알려줍니다. 반면에 창세기 2장은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4절)라는 말씀이 뜻하듯이 이 땅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히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을 경작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세상을 관리할 의무와 특권을 아담에게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먼지(dust)라고 직역할 수 있는 땅의 흙을 빚어서 아담(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다마”이니 “아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아다마>에서 먼지를 취해서, 거기에 물을 묻히시고 <아담>을 정성껏 세심하게 빚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토기장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세심하게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성껏 빚어서 만든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돋보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듯이 선한 일을 하라는 의미와 목적도 부여하셨습니다(엡2:10). 다음 한 주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살기 원합니다.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河-

독립 기념일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243번째 맞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 기념일(4th July)은

불꽃놀이를 하는 날,

여기저기서 큰 세일을 하는 날,

무엇보다 하루를 쉬는 휴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립 기념일은 말 그대로

미국이 영국의 통치에서 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

 

영국은 미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인도 회사의 결손을 미국과의 무역으로 보충하고,

그러면서도 미국 대표단이 영국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차단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자치의회를 구성해서

1776년 7월 2일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동부 13개 주의 독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틀 후인 7월 4일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로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에 완전히 승리하고(1781년)

1783년 파리에서 조약을 맺음으로 완전한 독립이 가능해졌습니다.

 

2.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5인이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이 미국에 가한 학정 등을 조목조목 고발하면서 독립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독립 선언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서문의 첫 문장입니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확실한 권리를 부여 받았으며, 그 안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됨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합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을 고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억제한 것입니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규제안이 극성인데

미국의 건국 정신에 기초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뒷얘기로

영국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노예제도의 거부를 독립선언서에 포함하려 했지만,

전원 일치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누락시켰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그로부터 87년 후인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3.

독립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살고있는 미국을 세웠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갖고 있던 정신을 돌아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적인 건국이념은 아니지만

그 근저에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근거를

창조주 하나님에서 찾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독립 기념일을 맞으면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평화롭고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휴일과 축제 분위기에 취할 것이 아니라

미국 독립의 처음 정신과 선조들의 투쟁을 되새겨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미국은 물론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 넘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Gen 1: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미국 땅이

실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을 갖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4이-메일 목회 서신)

 

 

 

 

용서 (5)

용서와 화해

 

창세기 요셉에 대한 말씀은 용서를 넘어서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요셉이 아버지는 물론 형들까지 그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을 가족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그 꿈을 마음에 두었지만, 형들은 도리어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들에 있는 형들을 만나러 갔는데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37:19)고 말하면서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가 유다의 중재로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들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집트에 팔려 간 요셉은 바로왕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집안일을 총괄하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를 뿌리쳤다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감옥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바로왕의 신하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바로왕의 이상한 꿈도 해석해 주고, 결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해준 바로왕의 꿈처럼 이집트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으로 고생하던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열 명의 아들을 이집트에 보냅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는 곳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쉽게 알아보았습니다. 요셉의 꿈대로 형들이 그에게 절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서둘러 드러내지 않고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밟습니다. 형들을 이집트를 정탐하러 온 첩자로 몰아붙이고,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이 살아있는지도 캐묻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시므온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가서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 동생인 것을 알지 못한 형들은 그제야 살려달라는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먹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후회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결국, 막내 베냐민를 이집트에 데려왔습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이 다른 방에 가서 목놓아 울 정도로 반가움과 서러움이 교차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용서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평온을 찾았을 때 형들 앞에 나가서 자신이 그들이 팔아먹은 요셉임을 밝힙니다. 그때 했던 요셉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한 요셉을 통해서 용서의 최종 목적지가 화해임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가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

온순한 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양극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가 설득력을 갖고, 흑이든 백이든 한쪽을 취할 것을 강요합니다. 중간에 있으면 회색지대라면서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시작하니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화, 협력, 상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양쪽이 혈안이 되어서 싸웁니다. 함께 뜻을 합쳐야 할 공동선(共同善)의 이슈를 갖고도 상대방을 깎아내립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태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치인들이 양극화를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소신껏 주장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상대방을 깎아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외도를 해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요! 이 말속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양극화 현상은 더욱 깊어 갑니다.

 

정치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 한국에서 방영되는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예전에는 방송에서 금지될 법한 용어나 말투가 난무합니다. 조용하고 온화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은 편집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거친 표현을 사용하는 출연자의 말이 자막과 함께 전파를 탑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이 남을 비난하거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식으로 방송 분량을 확보합니다.

 

물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구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래도 방송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거친 표현을 마다치 않는 인기인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시청자들도 이런 식의 방송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아 씁쓸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알려주는 책에서 “급소를 찌르는 말을 삼가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말은 끝까지 마음에 품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급소를 찌르는 말로 상대방을 무너뜨렸다고 통쾌하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부메랑 법칙을 기억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격언도 기억합니다. 자칫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서는 온순한 혀를 생명 나무라고 했습니다. 생명 나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인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그리고 잠언에만 등장합니다. “온순한”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마르페>는 “치료하다<라파>”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온순한 말이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살립니다. 당시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온순한 말속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성경은 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심으로 폭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 제자들이 각 민족의 말로 복음을 전하고 바벨탑 이래 갈라진 언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 말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성취, 다양한 사람까지 하나가 되게 하는 조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친 말을 사용하고,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면서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인상 찌푸리는 말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말로 내 편과 네 편을 가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양편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해도 아름답고 순화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사려 깊은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온순한 혀가 생명 나무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 사용이 세상을 밝고 맑게 만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2019년 6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