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

어느덧 올해도 두 달 남짓 남았습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12월 첫 주에 대강절(Advent)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니 11월이 교회력의 마지막인 셈입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시작으로 성탄절과 주현절, 사순절과 부활절을 거쳐서 거의 반년을 성령강림 주간으로 지냅니다. 강단 색깔이 초록이듯이 성령의 임재와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가는 기간입니다. 성령강림 주간을 마무리하고 대강절을 기대하면서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고, 한 해를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성령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앞에 있는 골리앗은 무너져야 함을 배웠습니다. 일상에 강했던 다윗이 자신이 양을 칠 때 만났던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말씀은 통쾌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일상의 경험을 현재는 물론 믿음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미래에 적용하길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다윗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할 때 어려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다윗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윗과 비교되는 우리의  부족함에 의기소침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올해 남은 두 달 동안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다윗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양을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키고, 한 마리의 양이라도 끝까지 쫓아가서 구해내는 다윗의 모습은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골리앗 앞에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모습 속에서 오늘 본문에 있듯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목자되신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모든 양의 이름을 알고 끝까지 양을 지킵니다. 양도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반면에 돈만 받고 양을 치는 것에 소홀한 삯꾼 목자는 양이 어떻게 되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다윗을 따라갈 수 없지만,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그 이름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목숨을 바치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河-

경계선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에스겔서는

마지막 40-48장에서 성전의 회복을 약속합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의 모습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건축물입니다.

여러 개의 방과 구조물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질서와 균형의 절정입니다.

 

에스겔 성전은 실제로 건축되지 않았고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성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이 서로 어우러지고

자세히 읽을수록 예사롭지 않은 하나님의 경륜(plan)을 발견합니다.

 

오늘 새벽에는 에스겔서 42장을 읽었는데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공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은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구약의 거룩함은 정함(clean)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충분히 정결해야 합니다.

부정한 것들(unclean)이 들어오지 못해야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방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담(wall)”을 쌓아서 영역을 구분했습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성스러운 것(Sacred)과 속된 것(secular)을 구분하는 담입니다.

 

2.

우리에게도 거룩함을 유지시켜주는 영역이 필요합니다.

부정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서 교회로 숨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세상에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구별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경계선을 긋는 것입니다.

 

에스겔에 이어서 읽게 될 다니엘서를 통해서

우리가 정해야 할 경계를 발견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도 바뀌고, 바벨론 학문과 언어를 배우면서

그가 살아야 할 제국 바벨론에 녹아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먹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부정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먹거리가 다니엘이 쌓은 “담/경계”였습니다.

 

3.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경계선을 긋고

거룩한 영역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거룩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 가운데 몇 가지에 “뜻을 정해서”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지혜로울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담/경계”를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세상을 구별하는 경계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유지시켜주는 영역입니다.

 

잠시 멈춰서

각자가 세워놓은 경계를 점검해 봅시다.

 

세상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근사한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방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 42:20)

It had a wall around it, 500 cubits long and 500 cubits broad,

to make a separation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Ezek 42:20)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세상에 맛과 신선함을 주는 소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9이-메일 목회 서신)

다윗: 승리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두 달 전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교리(머리)-체험(가슴)-실천(손과 발)>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공부하고 나름대로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교리). 머리에 머무는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올 때 (체험), 신앙에 역동성이 생기고 손과 발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면서 신앙의 지경을 넓혀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인 개인적인 차원과 이웃과 세상에 대한 공적인 차원으로 나눴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서 신앙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개인을 넘어서 세상까지 신앙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개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것이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체험이 교리와 실천에 힘을 주듯이, 공동체가 개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주고 신앙의 지경을 세상으로 확장시킵니다. 참빛 공동체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이번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연속 설교는 개인과 체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 각자가 마주하는 골리앗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안팎에 수없이 많은 골리앗이 있습니다. 골리앗을 만나면 우선 두렵고, 주춤거리게 되고, 골리앗의 공격이 지연되면 방심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부의 갈등이 겹쳐서 자중지란이 생기면 큰일입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다윗이 전쟁터에 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던 방식 그대로 막대기를 들고 목동의 옷을 입고 골리앗을 상대했습니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 골리앗으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에만 맴도는 생각도 아니었고, 다윗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형성된 신앙이었습니다. 물맷돌 다섯 개를 준비한 다윗은 첫 번째 물맷돌로 골리앗을 무너뜨립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체험을 통한 믿음이 이룬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 다윗 개인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승리는 곧 이스라엘을 구하는 공적인 승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골리앗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 어떤 골리앗도 무너뜨리고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골리앗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河-

마른 뼈가 살아나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차례로 한 장씩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예언서 말씀을 새벽에 읽기가 쉽지 않아서

거친 자갈길을 걷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주로 등장하니

거리감도 느껴지고 말씀에 은혜를 더하기가 솔직히 어렵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에스겔서의 절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37장을 읽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신비롭고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3절)고 물으십니다.

 

난감한 질문입니다.

다윗이 갖고 있던 믿음의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워낙 엄청나고 불가능한 일이니 답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최고의 답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에 에스겔을 초청하시는 겁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명령하니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뼈들이 맞춰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복원되었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환상입니다.

(에스겔서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등장한답니다)

 

잘 맞춰졌고 복원은 마무리되었는데

그냥 “물체”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대로 생기를 향해서 명령하니

사방에서 생기가 들어와서 마른 뼈가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나라를 잃고 망연자실,

절망 가운데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일으키시고

주님의 군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새벽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벅차 오르는 감동과 은혜가 임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커졌습니다.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 속에

마른 뼈처럼 내동댕이쳐진 것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죽음이 되살아나는 부활의 역사,

그 생명의 기운이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과 교회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새 달을 맞이합니다.

올 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맞춰 주시고, 돋아나게 하시고, 복원시키시고

마지막에 사방에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무한한 믿음의 상상력을 갖고 힘차게 새 달을 살아갑시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37:14절 중에서)

And I will put my Spirit within you, and you shall live…

Then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Ezekiel 37:14)

 

하나님 아버지,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안에 있게 하시고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불어넣으신 생명의 기운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2 이-메일 목회 서신)

다윗: 물맷돌 다섯 개

교회를 처음 방문하신 분들이 교회에 정착하는데 첫 번째 인상이 매우 중요하답니다. 심지어 처음 10분 동안 갖게 된 느낌이 교회를 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마음이 느껴지면 저절로 발길이 머물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 임원회에서 교회의 사역을 의논하면서, 우리 교회에 방문하시는 발걸음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전도하는 편이 아닌데도 교회를 찾아주시니 더욱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에 마음을 두고 등록하기까지 강권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처음 오신 분들께 무심하게 보일 수가 있다는 지적이 임원회에서 있었습니다.

 

크게 강요하지 않더라도 따뜻하게 맞이하고 예배 중에 인사하는 시간이나 친교 시간에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방문하시고 새로 참빛 식구들이 되신 분들께 조금 더 관심을 보이고 진심으로 환영하기 원합니다. 조그만 관심과 친절이 감동을 주고 처음 오신 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환영팀이라는 마음으로 새로 오신 분들을 안내하고 환대하기 원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는 일곱째 시간입니다. 드디어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사울이 입혀주었던 군복과 갑옷 그리고 놋 투구와 칼은 다윗에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일상복을 그대로 입었습니다. 양을 지킬 때 사용하던 방식대로 시냇가에 가서 물 맷돌 다섯 개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골리앗을 향해서 나갑니다.

 

분명히 다윗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 맷돌 다섯 개를 골랐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골리앗을 맞춰서 쓰러뜨려야 합니다. 골리앗이 워낙 커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물 맷돌로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음을 누구보다 다윗이 잘 압니다. 그러고 보면 다윗은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 즉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다윗 자신도 무척 긴장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길이지만 골리앗은 강합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건져 주실 것을 믿지만 그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골리앗에게 나갑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갑니다.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믿고 나가는 다윗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할렐루야!-河-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 읽기를 잠시 쉬고

마가복음을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읽다가

신약의 복음서를 읽으니 더욱 은혜롭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마가복음 2장에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복음을,

새 부대는 복음을 간직한 그릇, 즉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과

새롭게 세워질 교회를 가리켰을 것입니다.

 

특별히, 금식을 놓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말씀하셨으니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금식과 그것을 장려하는 유대교를

헌 포도주와 헌 부대에 비유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차 실천하게 될 금식과

그 금식에 동참할 교회가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되겠지요.

 

2.

이번 주는 종교개혁 주일이고

10월 31일은 말틴 루터가 당시의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부르크 성당에 게시한 지5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500년 전 말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말 그대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은 사건이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신교라는 새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부대가 많이 헐었고,

포도주도 맛을 많이 잃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개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3.

사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새 날을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새 날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헌- 것이 되지 않도록

새 날을 주시고

새 복음으로 채워 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직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부대가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헌 것은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새롭게 변화되고, 개혁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새롭게 됨은 물론

새로운 세상까지 꿈꾸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예레미야 애가 3:21-23)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Lamentation 3:21-23)

 

하나님 아버지,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담기에 충분한

새롭고 신실한 새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2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말틴 루터 역시 운명적으로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20년 세 개의 논문을 연거푸 발표합니다. 첫번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을 피력합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그 이후로 뜨겁게 전개된 성만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자신을 파문시키려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말틴 루터의 사상을 잘 담고 있는 주옥같은 글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율법의 틀에 가둬두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경에 반하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주장했습니다. 말틴 루터 자신도 탑의 경험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 안에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단지 손님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낯선 의,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죄와 율법 그리고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에서 밝힌 첫 번째 명제 대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가 논문에서 밝히 두 번째 명제는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종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는 억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면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외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말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원했습니다:“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라고 그의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자칫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알려주듯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한 걸음 나가서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길 원합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고귀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2016년 10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