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은혜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했던 2020년 3월에 모든 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부활절에는 다시 만나자고 광고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웬걸,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2년여 계속되었습니다. 한창 힘들 때는  교회에 다시 모여서 예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때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부활절은 물론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작년 말부터 주일학교 아이들까지 함께 예배할 수 있으니, 한국말을 쓰는 참빛 공동체가 말 그대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리면 감사가 나옵니다. 막연했던 상항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묵묵히 걸으니 빛이 찾아왔습니다.

 

올해도 지난해에 이어서 <부활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굳게 신뢰할 때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가 누리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부활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그를 신뢰할 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선물로 얻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부활절 달걀(Easter Egg)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달걀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어미 닭은 생명을 갖고 있는 유정란을 3주 동안 품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3주가 되면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세상에 탄생합니다.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어미 닭이 3주 동안 달걀을 날개 아래 품고 있는 것도 감동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들어옵니다.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심깁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달걀이 비슷하지만, 생명을 갖고 있는 유정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계신다는 것도 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압니다. 생명을 품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달걀을 뚫고 병아리가 세상에 태어나듯이, 올해 부활절을 맞으면서 우리 안에서 탈피(脫皮)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기를 원합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무덤 문을 활짝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길 원합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힘겨운 세상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시다.-河-

십자가의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3주에 걸쳐서

‘길’에 대한 글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은

베드로와 바울이 걸었던

로마의 <아피아 가도>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을 모두 겪는 인생이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해골(골고다, 갈보리)”이라는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지은 죄의 무게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적으로도 많이 지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과 겟세마네 기도,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심문, 군인들의 조롱까지

밤새도록 시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아프리카 북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시켜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2.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라틴어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는 것은

기독교의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기념하는
“성묘 교회(Holy Sculpture Church)”까지

600미터 (2000ft)에 달하는 길입니다.

 

비아 돌로로사에는 14개의 스테이션이 있답니다.

앞에서 말한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곳,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예수님께서 세 번 넘어지셨다고 추정되는 곳들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힌 무덤이 마지막입니다.

각 지점마다 교회가 세워졌거나 기념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를 걷는 순례객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사”를 생각하고 걷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지나온 발길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모두 지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지난주에 나눴던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 목사님의

“갈보리산 위에(Old Rugged Cross)”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우리도 걷겠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So I’ll cherish the old rugged cross,

till my trophies at last I lay down;

I will cling to the old rugged cross,

and exchange it some day for a crown.

 

 

하나님,

낡고 거친 십자가 붙들고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17. 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 (13) 갈보리산 위에

갈보리산 위에 (찬송가 150장)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습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으면서, 교회가 함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믿음이 충만해지는 시간이길 원합니다.

 

오늘은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마치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 길목에서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찬송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갈보리 산 위에”(찬송가 150장)입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로 시작합니다. 영어 제목은 “Old Rugged Cross(오래된 험한 십자가)”입니다.

 

이 찬송은 1912년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 1873-1958) 목사님이 만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물론 당시의 부흥 집회에서 많은 은혜를 끼친 찬송입니다. 찬송가 인기가 한창이던1960년대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으로 뽑힐 정도였습니다.

 

조지 베나드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찬송을 꼭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상(詩想)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만 눈에 그려질 뿐이었습니다. 고민과 기도 속에 미시간 집회를 인도하는 날에 찬송시가 폭포수처럼 떠올라서 단숨에 찬송을 완성했습니다.

 

베나드 목사님은 집회를 주최한 미시간 포카곤 감리교회의 담임 목사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방금 완성한 “갈보리 산 위에”를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보스트윅(Rev. Bostwick) 담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불멸의 찬송을 허락해 주셨군요. 다른 찬송을 통해서 받아 본 경험이 없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극찬하셨습니다. 보스트윅 목사님은 이 찬송을 출판하는 재정을 담당했고, 그 찬송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면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를 처음 연주한 미시간 포카곤 감리교회는 미시간주의 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고, 찬송가 가사를 동판에 새겨 놓았답니다.

 

찬송가 “갈보리 산 위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바라보니 죄 사함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렴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河-

 

 

인생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길(道)”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도 우리가 걸어가는 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걸어가다”는 뜻인데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도(道)”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행18:26).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자체가 “길(道)”입니다.

 

2.

우리가 걷는 길이 결코 일정하지 않습니다.

평평한 인생길은 없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곧게 뻗은 길이 있으면

구불구불한 길이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이 지나면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이 나옵니다.

오솔길도 있고, 신작로도 있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우리는 모든 길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때로는 옆에 펼쳐진 길은 쉽고

자신이 걷는 길은 늘 어려운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떤 길도 쉽지 않습니다.

우여곡절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3.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국의 한 재판관의 사연을 보았습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자폐증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폐 아들을 키우면서 겪는 아픔이 너무 컸습니다.

아들이 달려드니 부부의 몸에 상처가 끊이지 않고

네 식구가 외출하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마음이 편치 않답니다.

그래도 주말이 되면 아들과 등산하는 것이 기쁨이고

그 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아 보였고,

그 분이 걸어온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같아 보였는데,

말못할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발자국만 들어가보면,

한두 시간 깊은 대화를 나눠 보면,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평탄치 않습니다.

돌멩이를 가슴에 안고 걷는 무거운 발길입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평안하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분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4.

우리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 앞에서만 했던 말들을 모으면 한 자루는 될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눈에 그리고 꾸역꾸역 걸어갑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옆에서 걸어가시는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 1:9)

 

 

하나님,

함께 하시니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10. 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복음 5장 (4)

영생을 사는 것

 

지난 한 달 동안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고 그곳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시스템에 주목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일등만 살아남는 베데스다의 법칙이 요즘 세상과 비슷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사가 내려오는 것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혹시나’하고 기다리는 연못가 병자들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삶으로 보이지만, 정작 헛된 희망이 이들을 묶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나서 걷는 놀라운 사건은 보지 않고 쓸데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거에 묶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선입견과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만나서 38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병에서 해방된 사람은 담대하게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하고 증언했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거칠 것이 없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누워서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생에서 일어나 걷고 자기의 삶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생각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쌓아놓은 기득권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것에 연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하시면서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을 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박해하고 급기야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가 생명을 주관하시듯, 예수님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버지는 심판하는 권한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격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경멸하고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생명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아피아 가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영토를 넓혀가면서 대로를 만들고

군사, 무역, 치안 등을 관리했습니다.

 

로마가 첫 번째 만든 대로가

아피아 가도(via Appia)입니다.

주전 312년 아피우수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라는 집정관이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피아 가도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반도 남부에는 늪지대가 있어서

군인들의 이동은 물론 보급품 공급이 힘들었습니다.

이것을 파악한 아피우수가 군사용 대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훗날, 이탈리아 남부 부린디시 항구까지 연장되면서

군사는 물론 무역과 일반인의 통행까지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563킬로미터(350마일)에 이르는 로마 제국 최초의 대로(大路)입니다.

 

2.

아피아 가도는

군인들과 화물의 편리한 이동을 위해서 직선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운데를 높여서 배수가 가능했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했습니다.

길 양옆에 사이프러스와 같은 나무를 심는 조경도 잊지 않았습니다.

 

길에는 자갈과 모래를 깔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돌 조각을 아스팔트처럼 넓게 배치했습니다.

악천후가 되면, 로마 제국의 도로들이 진흙탕으로 변하는 것에 비하면

아피아 가도는 포장도로인 셈입니다.

현재도 국도로, 관광객들의 순례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박해와 사역에 지친 베드로가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가 로마를 두고 떠나면 예수님 자신이 로마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서 로마로 향했고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아피아 길 초입에

베드로를 기념하는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 안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의 성화가 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된 사도 바울 역시

보디올이라는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항구에 도착해서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1960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설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가

금메달을 딴 것도 아피아 가도 코스였습니다.

돌로 만든 길이어서 아스팔트처럼 도로 면이 평평하지 않은데

그곳에서 마라톤 경기를 진행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3.

작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잠시 아피아 길을 걸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걸었던 길이라고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2,300년 전,

돌을 깔아서 만든 튼튼할 길입니다.

2천 년 동안 다녔던 발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길이었습니다.

 

4월, 새달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길로 이어질지

근심과 우려가 큽니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임시방편이 아니라,

얄팍한 계획과 행동이 아닌,

깊이가 있고 수많은 발길과 사건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튼튼하고 살아있는 대로이길 원합니다.

 

함께 그 길을 만들어갑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튼튼하게 길을 만들고

꿋꿋하게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