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이 지나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과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만 존재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푸른색의 민주당과

빨간색의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있는 국민들도 많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에 나서거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공감대를 찾지 않고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으니

빨간색과 푸른색만 눈에 띌 뿐입니다.

 

2.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기는

정치, 문화, 경제 전반의 현상입니다.

 

포퓰리즘은

자기들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점점 극단적인 의견이나 정책을 제시합니다.

현실성이 없어도 일단 발표하고 봅니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대중의 요청이나 필요를 무시했기 때문이랍니다.

 

기득권에 취해서 국민들을 챙기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을 때,

포퓰리즘을 내세운 그룹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제 몫을 못 할 때, 이단이 판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은 갈라치기의 명수입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3.

갈라치기가 유행인 세상은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포퓰리즘이 가세하면

세상은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만 옳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포퓰리즘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기를 힘입어 세상을 갈라놓지 않으셨습니다.

 

경계를 허무시고, 차별을 폐지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악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셨지만,

선한 길을 가려는 모든 이를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

예수님이시라면 호되게 꾸짖고

희생자들을 감싸안으시고, 둘을 하나 되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추한 모습이 정상은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품는 예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이라고 갈라치지 않고

‘우리’라고 품어주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생명의 복음, 화해의 복음,

용서와 회복의 복음이 세상에 편만 하길 기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

 

 

하나님,

주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25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3)

영과 진리로 (1)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쉬고 계시던 예수님과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찌하여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성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쏘아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물을 주는 것은 물론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대화를 이어 가셨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도 소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물을 길을 도구가 없는데 자기에게 물을 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여인의 말이 맞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상식을 뛰어넘는 복음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올 필요도 없고, 다시 물을 마실 필요도 없는 생수입니다. 안에서 샘솟는 영원한 샘물입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서 그런 물을 달라고 달려듭니다. 드디어 여인의 마음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4:16). 뜬금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솔직히 자기 사정을 예수님께 밝힙니다.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삶 한가운데로 깊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여인의 실존을 건드리셨습니다.

 

복음은 피상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해서 그곳부터 변화를 일으키고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힘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유대 남성이 아니심을 직감했고 인정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 여성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조상은 이 산(그림신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어떤 것이 맞느냐는 신앙적인 질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앙에 대해서 깊은 조예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을 놓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디서 예배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장소나 출신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드디어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4:26). 여인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河-

탄식할 용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봄에는

시편의 탄식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70%가 탄식시라는 사실은

시편을 기록하고 전해준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보여줍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웠지만,

우리의 현실이 늘 기쁘고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슬픔과 탄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탄식시라는 사실에

도리어 위로를 받습니다.

 

2.

시편 탄식시의 특징은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연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탄식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시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탄식을 넘어서 믿음과 확신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무엇보다, 탄식의 과정을 충분히 갖습니다.

눈물로 이불이 젖을 정도로

자기 죄를 놓고 참회하며 탄식합니다.

뼈가 마를 정도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려달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내놓고 탄식합니다.

 

탄식의 과정을 온전히 지나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3.

어렸을 때는

울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말고

대장부답게 견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혹시라도 눈물을 보이면

약하고 소심하고 쩨쩨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슬픔을 꾹꾹 참는 것을 강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탄식을 올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울어야 합니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탄식은 솔직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도리어 정직하고 진실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10여 년 시간이 흘렀어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분들을 일일이 찾아가시고

눈물을 씻겨 주시길 기도합니다.

 

슬픔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 겁니다.

탄식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탄식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힘

그리고 소망을 구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여전히 슬퍼하며 탄식하는 이웃들을 위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8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2)

내가 주는 물은…

 

갈릴리로 내려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한가운데 수가성에 가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앙금이 깊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서쪽 광야로 돌아서 갈릴리로 내려가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밟으신 것입니다. 700여 년 동안 이어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파격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물려준 세겜 근처 수가라는 동네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쉬셨습니다. 한낮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혼자 우물가에 계실 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먼저 말을 거십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여성이었습니다.

 

물을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이까”(9절)라고 약간 쏘아붙이듯이 대답합니다. 예수님께 말대답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생각보다 강합니다. 물이라는 주제를 갖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living water)를 네게 주었으리라” (10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리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생수라는 말에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서 누구신데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서 줄 수 있느냐고 또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수를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신선한 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여인은 자기에게도 그 물을 주셔서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여인의 마음이 많이 열렸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 “생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은 마법의 물(magic water)을 구할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여기까지 마음을 열고 예수님과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굉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河-

스캠이 판치는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모든 길은 AI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인공지능(AI)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스마트 폰”이라고 불리는 휴대전화가 대표적입니다.

한글이나 영어 번역기도 성능이 약해서 그렇지

벌써 오래전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던 인공지능(AI)이

갑자기 게임체인저가 되고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우리 삶은 훨씬 편리해질 것입니다.

요즘 번역기의 성능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준  전통적인 직업들이 사라지는

슬픈 일도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과연 그럴까 했던 기대도 현실이 되는 느낌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2.

인공지능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요즘 전화, 메시지, 이메일 등에

스캠(scam상대방을 속이는 사기성 연락)과

스팸(spam, 원치 않는 정크 메일들)이 판을 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심코 클릭해서 정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사용한 메일 계정은

누군가 제 이-메일로 로그인하면

저에게 곧바로 연락이 오고, 특정 숫자를 클릭해 주어야 합니다.

계정 정보에 들어가 보니, 성공하지 못한 로그인 시도가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부터 여러 개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보낸 텍스트 메시지로 가장한 스캠도 종종 받습니다.

클릭하기 전에 은행에 가서 보고하니

절대로 은행에서는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고

모두 거짓 메시지라고 명쾌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사기꾼들의 수법이 점점 발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인공지능을 사용한다면,

우리 같은 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낮에 코를 베어 간다는 옛말이

현실이 되게 생겼습니다.

 

3.

성경에도 스팸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했던

거짓 선지자 (junk prophets)들이 꽤-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대표적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도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진다는 심판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했습니다.

 

그때,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운 나라여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평화” “안전”을 역설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는

스팸(거짓 메시지) 또는 사기(스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대표적이지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신 바짝 차리고 분별해야겠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음을 믿습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120:2)

 

 

 

하나님,

진리와 정직이 통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1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에 관한 말씀에 이어서, 앞으로 한 달여 요한복음 4장 속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이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을 듣고 숨은 제자로 살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차별하는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당시에 매우 열등한 위치에 있던 여성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면, 사마리아 여인도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달리,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훨씬 수동적입니다.

 

“물”이라는 주제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더불어 요한복음 2-4장에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를 향해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도 요한복음 3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물은 정결 예식과 함께 깨끗함 즉 회개의 상징입니다. 또한 물은 생명수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고(렘17:13). 에덴동산에도 네 개의 강이 흘렀고, 마지막에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도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물을 좀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실 물을 넘어서는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것도 우물가였고, 미디안 광야로 나간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습니다. 이처럼 우물가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대화가 시작됩니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을 복음으로 초청하는 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찾으셨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