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에는 비가 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따뜻하고 화창한 봄이 되면,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웃 나라에 힘을 과시하고, 재산이며 노비들을 탈취해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작은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므로 지속해서 조공을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다윗도 봄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니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다윗의 왕권은 대내외적으로 견고해졌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본뜬 다윗성을 예루살렘에 세웠고 하나님의 법궤도 모셔왔습니다. 하나님 역시 다윗은 물론 그의 후손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했습니다. 다윗에게 영적인 조언을 하던 나단 선지자가 다윗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이 문제였습니다. 인생의 골짜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고, 꼭대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더욱 겸손해야 하는데, 다윗 역시 뭇 왕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평정하면서 교만해졌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졌습니다.
어느 봄날, 다윗은 부하들만 전쟁에 내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며 한가롭게 지냅니다. 저녁 무렵 늦게 일어나서 지붕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와서 관계를 맺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위해서 전쟁에 나간 히타이트 출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부하의 아내, 외국인이면서도 다윗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수의 아내를 범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밧세바가 아기를 갖습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전쟁에 나간 우리아를 불러들여서 밧세바와 잠자리를 갖게 합니다. 우리아의 아이라고 위장하려는 것인데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는 다윗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죄에는 브레이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고사령관 요압을 시켜서 전투 중에 우리아만 두고 후퇴함으로 그를 죽게 합니다.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밧세바를 아내로 취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무척 사랑해서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이웃에는 양과 소를 많이 가진 부자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나그네 한 사람이 부자를 방문했을 때,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은 묻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그런 부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의로운 척합니다.
다윗 역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자기 식구처럼 양들을 사랑했고 맹수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낼 만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남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딱 두 글자 “you (are) the man” 이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양처럼 돌보라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는데, 부하의 아내를 범했고 그 부하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시치미 뚝 떼고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원래의 다윗이 아닙니다. 그가 변했습니다. 어느새 다윗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 즉 부자가 되어 있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에 즉각 응답하면서 자신을 추스릅니다.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무수한 말이 난무하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기 힘듭니다. 아니 그런 말을 일부러 외면합니다. 그렇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이야말로 양심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곧바로 인정했고 죗값도 톡톡히 치렀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머리가 쭈뼛섭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려놓으시려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주님의 은혜와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다시금,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신앙, 바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그 출발점입니다.(2016년 5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