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기도할 때에: 용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길가에 있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으로부터 기도에 대한 교훈이 이어졌습니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에 뿌리까지 말랐습니다. 이것은 장사꾼의 소굴로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종교가 생명이 다했음을 가리키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을 예수님께 알렸지만, 예수님은 더이상 무화과나무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것은 잊혀야 할 이전 것입니다. 버려진 카드입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대안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시작될 새로운 신앙입니다.
새로운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시작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왜 말랐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대답하신 이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성전세를 바치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속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 가운데 하나가 기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내면의 기도입니다.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산이 옮겨질 것입니다. 과장법이지만 기도의 능력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 믿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는 강력한 말씀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고, 기도를 통해서 불가능한 것까지 이뤄낼 수 있음을 깨우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새로운 신앙에서 믿음의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알려준다면, 용서와 화해는 기도가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이어오는 기도의 일반적인 자세입니다. 물론 회개나 간절한 기도를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누군가와 불편한 것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당했던 억울한 일도 생각나고 그것이 기도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씀에서 주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다음에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겠다는 기도가 등장했습니다. 용서의 기도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막혀 있다면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에서 믿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비롯한 사랑도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기도가 우리에게 넘치길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