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말씀이
내일(금)부터 다시 욥기로 돌아갑니다.
욥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셈입니다.
다시 읽을 욥기는
엘리후의 연설(32-37장)과
폭풍속에서 욥을 찾아오신 하나님 말씀(38-42장)이 주요 장면입니다.
욥기 전체에서 엘리후의 연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혹자는 엘리후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정도로 엘리후의 연설이 탁월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돔 출신의 이름을 가진 세 친구와 달리
엘리후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이스라엘 배경도 갖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나 친구들에 비해서 젊습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보다
나이가 든 장로들이 지혜롭다는 생각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러한 관습에 도전합니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속에 있는 영에 하나님의 숨결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후가 그렇게 주장할 만합니다.
그는 욥이나 세 친구와 달리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개인과 역사에 임하는 섭리를 강조합니다.
엘리후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넓이가 깊이가 있습니다.
2.
엘리후는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과
욥에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세 친구를 싸잡아 비판합니다.
엘리후는 자기 지식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엘리후를 보고 있으면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회에 나온 젊은 전도사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세상이나 신앙에 관해서 거침없이 판단하고 자기 주장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욥이나 욥의 친구 모두 잘못했고
자신만 옳다는 일종의 양비론(兩非論)과
엘리후의 자기 교만이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등장하자마자
욥과 친구들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도
엘리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후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엘리후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면,
이어서 등장하시는 하나님과 욥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 정도입니다.
3.
우리는 빌레몬서를 함께 읽으면서
“품격”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나 연장자라는 나이를 들어서
빌레몬에게 명령하거나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받아 주기를
신사적으로, 절차를 지키고 배려하면서 부탁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엘리후의 연설은 자기 과시입니다.
아무리 바르고 옳은 말을 해도
말하는 사람의 성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에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해 동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인격’을 갖췄는지 돌아보고 싶습니다.
마음 씀씀이, 언어 습관, 소소한 행위와 삶을 돌아보면서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가는 주님의 사람, 예수님을 닮은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1:5)
하나님,
한해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돌아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