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05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공포한 날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모든 성자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만성절(All Saint’s Day) 전날입니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에서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고 교황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이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신앙과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발표한 95개조의 반박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5.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27.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하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95.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 14:22).
루터 외에도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선구자들이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는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것이 이단이라면서, 죽은 지 31년 만에 무덤이 파헤쳐지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위클리프에 영향을 받은 얀 후스는 면죄부의 부당함과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다가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교회사 속의 인물들입니다.
거기에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발명된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가 제기한 95개조의 반박문이 인쇄물로 제작되어 세상으로 퍼져 나갔고, 훗날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도 일반 백성들에게 손쉽게 보급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 외에도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비텐베르크 교수와 학생들, 멜랑톤과 같은 동지들, 루터를 보호하던 당시의 프레더릭 선제후 등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루터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법률가의 길을 걷다가 우연한 기회에 수도사가 되기로 결단하고 사제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루터에게는 온전한 신앙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 참회와 선행 등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길 기대했지만, 루터에게 평안함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자신에게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낯선 의가 손님처럼 찾아왔을 때 그 은혜로 의롭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 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나왔습니다. 개인의 고민이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되었고, 교회의 잘못을 세상에 알린 용기 있는 행동이 교회는 물론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론, 루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