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가운데

1.
지난 주말,
조국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참사가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벗고 맞이한 핼러윈 주말에
150명이 넘는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핼러윈 날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독교인들은
감정이입 없이 나름 냉철하게(?) 이태원 참사를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 핼러윈을 지킬까? 왜 그곳에 갔을까? 쯧쯧”

 

물론, 내 자식이, 형제자매가, 친구가 그곳에 가서 희생되었다면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180도 바뀌었겠지요.
조금 미숙하고 이기적 관점입니다.

 

사고 전체를 관망하듯이 보지 말고
사고 속으로 들어가서
희생당한 분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세심함이 요청됩니다.

 

2.
하루는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난 특별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그럴 만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비통한 일을 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들, 죄가 작아서(없어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죽은 사람들에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누구든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실로암 망대 사고를 아실 정도로
시사에 밝으셨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커서 죽었겠냐고 반문하시면서
“No, 아니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없는 재난입니다.
일종의 사고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죽은 사람에게 죄인 프레임을 씌우고
살아있는 자신들이 의로운 척,
무엇보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멋쩍어서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3.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누구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같이 망하리라”)은
사고와 희생으로 죽은 특정한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가는 죽음의 길을 가리킵니다.

 

재난 또는 사고를 보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길을 떠올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를 두고,
빌라도와 같은 악한 인물이 사라지는 것,
실로암 망대를 허술하게 지은 건축가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찍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기억합니다(눅13:6-9).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임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자연재해 또는 사고와 같은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두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커다란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완전한 쾌유가 임해서
더욱 씩씩하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5)

 

하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