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기도로 넘어갑니다. 첫 번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가 관심을 끕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만 각각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 오리겐은 <에피우시오스>가 육신의 양식(떡)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영적인 떡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리겐의 관점을 계승한 견해가 교회에 많이 있었는데,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물론 영어 성경에 보면 “일용할 양식”에 “내일 양식”이라는 주(註)를 달아 놓았습니다. 헬라어 <에피우시오스>에 다음 날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네 번째는 매일 같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길 구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 당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 기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일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과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하루분 양식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가져가면 다음 날 썩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믿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에 대한 내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일용할 양식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먹거리였으니 양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성찬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믿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신앙에 꼭 필요한 영적인 양식, 즉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우리 역시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잠30:8). 거친 세상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