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 넘어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1일 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완벽주의의 고통(The Pain of Perfectionism)”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완벽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의기소침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소화불량이나 통증처럼 몸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심리학자 프렛(Frett)과 휴잇(Hewitt)은

완벽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자기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

2) 타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

3) 사회가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한다고 느끼는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는

완벽을 위해서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자기 안에 작은 단점이라도 발견되거나,

무심코 실수해도 자신을 탓하고 심한 우울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한시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잔혹하고 지루한 독백자”라고 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완벽주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삽니다.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는 더 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불완전함이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벌을 주거나 화를 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완벽을 요구하면,

결혼생활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마음에 맞추려고 하니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는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쉬운 요즘 세상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삶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2.

평생 완벽주의를 연구한 프렛과 휴잇은

완벽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가치(mattering)”에 집중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의 가치는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귀한 겁니다. 내가 자랑스러운 겁니다.

 

완벽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단순히 기준을 낮추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준만 낮췄을 뿐 여전히 완벽주의에 얽매일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결함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기사를 읽으면서,

요즘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습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42세에 생을 마감한 예도 있었거든요.

 

존재의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더욱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벽주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완벽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갑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Mat 11:28)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1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