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목사 입장에서는 설교나 예배 후에

“은혜받았습니다”는 말을 들으면 내심 흐뭇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받았다는 것은

종종 감정이 움직였다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설교를 비롯한 예배 시간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정과 연결하다 보니

기복이 심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주관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동하지 않거나 자기 확증이 되지 않으면,

좋은 말씀이나 예배조차 ‘은혜’로 느끼지 못합니다.

 

2.

저는 ‘은혜받았다’는 표현을

‘깨달음’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말씀에

커다란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예배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감정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감정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입니다.

때로는 낯설거나 불편한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큰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고,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바꿉니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3.

지난주에 제가 존경하던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라는

여성 구약학자께서 9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신학교 시절, 트리블 교수님의 저서

<공포의 텍스트, Text and Terror>를 처음 읽었습니다.

100쪽 남짓한 작은 책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구약 성경의 네 여성(하갈, 다말, 사사기의 어떤 여성, 입다의 딸)에 관한

교수님의 해석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하찮은 네 명의 여성에게 얼마나 무관심했고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또는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쳤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뜰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에 집중하면서,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가르쳐 준 ‘교과서(text)’였습니다.

 

트리블 교수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책꽂이에서 교수님의 책을 꺼내서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 21:19)

 

하나님,

눈을 밝히셔서 깨달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