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대표하는 단어는 “긍휼(compassion)”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시각 장애인 두 사람이 은혜와 치유를 경험한 사건을 배웁니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라는 헬라어 동사는 이 표현이 얼마나 심오하고 강력한 것인지 보여 준다. ‘스플랑크나(splangchna)는 몸의 내장, 오늘날 우리가 하는 말로 ‘뱃속(gut)’을 가리킨다. 이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 가는 중심 장소이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분의 뱃속(내장)이 움직였다고 표현할 때는 무언가 아주 깊고 신비스러운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느끼신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혹은 동정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훼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온유와 친절이 숨어 있으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되신다. 바로 여기서 모든 감정과 열정이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님의 마음이 긍휼로 움직일 때,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하고 마르지 않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드러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긍휼을 눈으로 보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부터 그들과 한가지로 느끼셨다(마9:36). 예수님은 눈먼 자들, 중풍 병자들, 귀머거리들이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떠셨고,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다(마14:14). 며칠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 명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자,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막8:2). 예수님을 부르며 따라갔던 소경 두 명에 대해서도(마9:27),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던 나병 병자에 대해서도(막1:41) 그리고 외아들을 장사 지내던 나인 성 과부에 대해서도(눅7;13)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예수님은 친밀한 감성으로 그들의 슬픔의 깊이를 느끼셨다. -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