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세 번 정도 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나사로의 오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우십니다(요11:35). 조금 지나면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친지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모습이 의외입니다. 하지만,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성전과 도시를 보고 우셨습니다(눅19:41-44).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운 예루살렘의 망가진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평화의 일”을 언급하십니다. 단지 분열과 갈등, 다툼을 넘어서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찾아오는 진정한 샬롬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지만, 진정 종교를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인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눅22:43-44).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2:42)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비탄에 젖어 있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기도하셨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되는 구절은 창세기 6장 6절입니다:”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한탄하신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셨다는 뜻입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심은 애통에 가까운 비통한 마음입니다. 한탄하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가 한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사는 인류를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소리는 내지 않으셨지만,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악함과 반역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립니다:“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예레미야의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함 앞에서, 사랑하는 자를 잃는 슬픔 앞에서, 하나님 백성의 그릇됨 앞에서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