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울음, 예수님의 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로 향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니 슬퍼하는 친지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우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울음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에덴을 내보내는 순간

하나님은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하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주야로 울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울음은 곧 하나님의 울음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시고, 예수님께서 우셨으니

우리 역시 우는 것이 결코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진실함도

울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경우에 맞는 울음은 숭고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八福)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젊어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과도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애통(哀痛)의 의미가 새롭고 깊게 다가옵니다.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토스>는

사랑하는 친지가 죽었을 때 느끼는 비통(悲痛),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흐느끼는 통회(痛悔),

삶 속에서 닥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포함합니다.

 

인생이 우리 동네 날씨처럼 항상 맑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잘못이 없어도,

갑자기 밀어닥치는 손님처럼

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마음껏 울 수 있습니다.

서러움에 흐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치면서 엉엉 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으니

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

저도 예전에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강단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가셨기에

아내 역시 자리에서 울면서 함께 애통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우리 교회 교육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베트남 출신의 전도사가 새벽에 일부러 찾아와서 함께 울어준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우시는 예수님이 되어서

누군가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1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