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붙드심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다섯 번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선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사실 교회에 오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될 정도로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특히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펼쳐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와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기에 우리들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마음이 분산되는 것 역시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신앙의 길을 경주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

오늘 살펴볼 시편 139편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 가지 모습을 연상해야 합니다. 첫째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르시고 우리를 안수해 주십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십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멀찍이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했고 이런 하나님을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은 물론 우리들의 인생길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십니다. 9절 말씀대로 우리가 바다 끝에 가 있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치를 다 파악하십니다. 여기서 바다 끝은 절박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쓰이던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바다 끝에는 폭포수와 같은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다 끝에 있다는 것은 백척간두의 아찔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오장육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신묘막측합니까? 우리들이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15절). 그 하나님을 우리가‘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임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를 감싸시고, 하늘에서 돌보시고,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삶 속에서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