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 무감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는 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볼품도 없고 힘도 없어서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무시했습니다.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우리 주님, 나사렛이라는 하찮은 동네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종의 형체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고 무시할 수밖에요.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죽기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무시 받고 버림받은 주님의 종에 대한 연민이 생깁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53장 4-6절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버림받은 종과 우리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그분이 무시 받고 버림받은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갖고 계셨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이 겪는 고난을 보고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결과라고 단정했듯이, 주님의 종이 겪는 질고와 슬픔 역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가시와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징계)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평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회복되었고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종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서 보내지셨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겪을 고난과 질고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까지 모두 자신이 담당하셨습니다.
본문 속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가진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로부터 수없는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일이었다니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죄의 짐이 없어졌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53장 속의 고난 받는 종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6절은 앞 두 구절의 마무리입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해서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시력이 약한 양은 대열에서 이탈하면 금방 길을 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길을 고집부리면서 갑니다. 우리의 모습이 양에게서 발견됩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양처럼 가야 할 길에서 이탈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버리는 본능이 아담과 하와 이래 우리들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자기 힘으로 대열로 돌아오기 힘들듯이 우리들도 우리 힘으로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의 은혜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를 맞아서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 속 깊이 떠올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 조아리며 감사하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