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서신은
새벽기도회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쓰게 되는군요.
은근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라는 압력일까요?
(esp. 젊은이들이여 새벽을 깨웁시다!)
예레미야서를 모두 끝내고
예레미야 애가서를 이번 주에 시작했습니다.
애가(lamentation)은 “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듯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두고 슬픔의 노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가”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애가가
슬픔의 노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애가 한 가운데인 애가서 3장에
“소망”의 말씀이 나오기때문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가 3:19-22)
Remember my affliction and my wanderings, the wormwood and the gall! My soul continually remembers it and is bowed down within me.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Lam 3:19-22)
2.
예레미야 애가 3장은
제 감신대학원 졸업논문 본문입니다.
(서른일곱 살의 늦깎이 신학생이 논문상을 받고 졸업했었네요^^)
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그때 논문 파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긴 논문이었지만 그 중의 한 문단을 옮겨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희망과 절망의 양극단으로 놓고 우리의 삶을 저울질 한다면 대부분 절망과 고통으로 기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경륜이나 환경을 막론하고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다. 아니 고통이 없는 인생은 마치 진공 속의 삶과 같아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고통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요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형극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고통의 문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민족도 국가도 그들이 어떤 역사를 갖고 있든지 고난이 없는 공동체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현실은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 고통 저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 아닐까? –하시용, 감신대 석사학위논문(1998),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해석학적 재고찰”에서-
그렇습니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그대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고통 저 너머에 숨겨진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3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