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서 지난 봄에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부쩍납니다. 어머님께서 저를 마흔 셋에 나셨습니다. 그때 아버님 연세가 마흔 아홉이셨으니 거의 쉰둥이로 태어난 셈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습니다. 은근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님께서도 그러셨지만, 어머님이야말로 저에게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마흔 셋에 막내를 낳으셔서 하나님 나라에 가시기까지 44년동안 어머님께서는 한시도 막내 아들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막내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달게 치르셨습니다.
막내아들 가족을 미국으로 떠나 보내실 때도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울면 떠나는 아들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님께 큰 절을 올리고 어머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아들을 못난 자식이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저희를 떠나 보낸 후에 슬픔을 삭히시느라 한없이 힘들어하시면서도 전화를 걸면 “너희만 객지에서 고생하지 않으면 된다. 쌀은 떨어지지 않았니?”라고 또박또박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두분 모두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께 받은 사랑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그리고 부모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번 뵙고 싶을 만큼 그립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내리사랑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님을 생각해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빼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평생 동안 갚아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철이 들어서 갚을라치면 부모님께서는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사랑만 내리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라는 작품을 보고 헨리 라우웬이 같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누가복음 15장 속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한 말 그대로 ‘못된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맞아 줍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아주 감명깊게 화폭에 옮겨놓았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아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아버지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습니다. 분명히 흐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옷은 누더기입니다. 신발이 벗겨딘 왼쪽 발은 퉁퉁 부어있습니다. 오른쪽 발에 신고 있던 샌들은 모두 달아서 뒤꿈치가 드러날 정도입니다. 아버지 역시 아들을 기다리느라 무척 수척해진 모습입니다. 수염도 다듬지 않았고 볼은 푹 파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손을 내려서 아들의 어깨와 등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녀석아! 왜 이제 왔니?”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탕자를 조건없이 맞아준 아버지는 우리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지 돌아가서 안길 수 있는 피난처되십니다. 설령 우리가 잘못 했더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큰 손을 우리 어깨에 드리우시고 사랑으로 맞아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복덩이들임에 틀림없습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