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우를 지키는 자 니이까?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농부였고 둘째는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농부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그리고 목자인 아벨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각각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왠 일인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는 창세기 4장에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후에 일어난 가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하자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화를 내지 말 것을 요청하셨지만 가인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으니 분을 참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죄목을 갖게 된 순간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가인은 시치미 뚝 떼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현재 분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 본문을 다음과 같이 직역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금 지키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형은 동생을 지켜주는 사람입니다.형이 동생을 지켜주지 않으면 세상에 누가 동생을 지켜준단 말입니까?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이 가인의 비수를 찔렀을 것 같습니다.:”(그런데)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

형 가인이 동생 아벨를 죽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만 받으신 것에 대한 형의 질투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장남인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정성껏 준비했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질투는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고, 동생 아벨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것이 분노로 발전했고 결국 자신이 지켜주었어야 할 동생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질투 – 관계를 단절시키는 주범입니다. 마음속에서 만족을 빼앗아가고 불안과 분노를 갖다 주기에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에게 커다란 해가 됩니다.

가인의 이야기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나치게 경쟁적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신앙에서도 그대로 표출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합니다. 축복을 혼자만 받거나 다른 이 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복을 받아야 성이 찹니다. 그리고 툭하면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언제부터인지 가인의 모습이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들이 서로에게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지금 지켜주고 있는 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쓰러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SF 한국일보 2008.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