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버지께서 마흔 아홉에 낳으신 말 그대로 늦둥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동안 흙과 씨름하신 평범한 농부셨습니다. 약주를 한잔 하시면 말문이 열리시지만 그 전에는 차근차근 얘기하시는 법이 없으신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무뚝뚝한 아버지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밤만 되면 왜 그렇게 등이 가려웠는지요? 저의 짧은 팔로 등을 긁적거리면 아버지께서는 슬며시 다가오셔서 커다란 손으로 말없이 등을 긁어 주셨습니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마다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됐다고 말씀드릴 때까지 말없이 제 등을 긁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표현은 안 하셔도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쉰 가까이 낳은 자식이 커가는 것을 대견해 하셨습니다. 귀한 막내 아들이 농부가 되는 것이 싫으셨는지, 아버지의 일을 도우려고 논밭에 나가면 극구 만류하시면서 얼른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문과대를 택했습니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여느 집 자식들처럼 아버지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어느 날 갑자기 신학교를 갔습니다. 팔십이 넘으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서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신 후, 아버지의 수첩 속에 저의 옛날 직장 명함이 들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가신 지 5년이 지났지만, 바쁜 목회를 핑계로 아버지 묘소에 가서 큰 절 한번 올리지 못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섭섭함과 노년의 외로움을 속으로 감내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어느덧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말 그대로 신세대 아빠입니다.아이들과 한 침대에서 뒹굴고, 가끔씩 아이들과 팔씨름을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종종 합니다.하지만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자기들 고집대로 하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장가도 가기 전에 이놈들이 벌써 아버지를 무시하나……’ 별 것도 아닌 일에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자기는 모로 걸으면서 자식들에게는 바르게 걷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아빠인지도 모릅니다.
곧 아버지 날이 다가옵니다. 올 해는 왠지 모르게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말없이 깊은 정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과 손길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우실 만큼 무뚝뚝하신 아버지셨지만 그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에 마흔 아홉에 낳으신 늦둥이가 어느덧 대학생이 된 아들을 둔 아빠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얼만큼이나 자식들에게 나눠 줄 수 있을 지……자식들이 내 생각대로 가지 않아도 속으로 삭히고 자식들이 잘 되기를 응원해 주고 기도해 줄 수 있을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다시금 실감하면서 마음 속으로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 봅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9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