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종종 미국에 처음 오던 때를 회상하곤 합니다. 13년전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내렸을 때는 무척 더운 한 여름이었습니다.네 식구가 이민가방 일곱 개를 카트에 밀면서 꿰제재한 모습으로 공항을 빠져 나왔었습니다. 처음 미국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학교 기숙사 앞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는 다람쥐 가족의 보금자리였습니다. 30분만 운전해서 가면 대서양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세심하게 관찰하길 좋아하는 저에게 미국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행동 그리고 말투까지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프리웨이에서 한국 차를 보면 온 식구가 “저기 한국 차가 있다”고 소리치면서 애국심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습니다. 아침에 창문 틈으로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눈을 뜨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이처럼 미국에서의 첫 경험은 일종의 희열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다가왔던 것들이 점점 익숙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길가의 들꽃 앞에 한참 동안 멈춰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늘 거기에 있었다는 듯이 눈길 한번 주고 지나갑니다. 프리웨이를 달리면서 “야- 미국이 참 넓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행여나 교통 티켓을 받을 까 염려하면서 속도계를 점검합니다. 미국의 신선한 공기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거추장스럽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제부터인지 미국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감탄사를 쓰던 말투가 평서문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왜 이렇지?”라고 투정 섞인 의문문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요.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한없이 좋아서 몇 날 며칠을 함께 붙어 다닙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증을 느끼고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결혼생활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끓여주는 김치찌개 하나에도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아내의 음식 솜씨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진수성찬에도 무덤덤합니다. 칭찬은커녕 맛이나 간을 두고 투정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성경말씀을 눈을 비비면서 읽었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일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단지 믿음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감사였고 감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앙이 아니라 교회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것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려는 신앙은 뒷전으로 밀리고 교회 안의 인간관계와 이런 저런 가십에 신경을 씁니다. 점점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하는데 간신히 주일만 지키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익숙함이 신앙 속에 남겨놓은 잔재들입니다.
그런데 “익숙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뒤를 돌아보면 놓친 것들이 너무 많음을 발견합니다. 조금만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익숙해졌다는 선입견으로 대충대충 넘긴 것들입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을 힐끗 보았듯이 소중한 순간들과 이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숙하다는 핑계로 무례하게 행하고 그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만 주변을 신경 쓰다가 신앙의 진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감사와 감탄이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젠가는 현재의 익숙함도 커다란 아쉬움으로 밀려올 것 같습니다. 모든 것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재생도 불가능하고 뒤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올해도 반이 지나갑니다. 그래도 우리 앞에는 새로운 반년이 남아 있습니다. 익숙함이 남겨놓은 잔재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하루 하루 새롭게 그리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살아갑시다. (2011.6.24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