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은 쉽게 읽어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무척 재미있고, 지루한 말씀은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책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을 취사선택해서 읽곤 합니다. 구약성경의 일관된 주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God’s endless love)”입니다. 구약 성경의 첫번째인 창세기 3장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엇박자가 시작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구약 내내 메아리 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자리를 엿보고 때마다 변명하고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하나님 속을 푹푹 썩이던지요!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특별히 구약성경의 사사시대는 어지럽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미디안 족속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합니다. 그때 백성들이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기드온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군중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행간을 읽지 못할 만큼 충동적입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현명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적군에게서 탈취한 전리품 가운데 귀고리 하나씩만 나에게 주십시오.” 삼백 명을 이끌고 미디안을 무찌른 하나님의 용사가 백성들에게 귀고리 하나씩만 달라는 쩨쩨한 요청을 합니다. 그것도 적군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달라는 것이니 신앙의 지도자로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기드온의 청을 들어줍니다. 기드온은 겉옷 위에 백성들이 던진 귀고리로 에봇을 만듭니다. 에봇은 구약시대에 대제사장들이 입던 성스런 예복입니다. 기드온은 에봇을 자신의 고향에 둡니다. 자신의 고향을 성지로 만드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민족을 구한 전쟁영웅 기드온이 만들어 놓은 근사한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여기서 “음란하다” 라는 말에는 (매우 추잡한) 성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기드온 마음에 슬며시 들어온 욕심이 백성들까지 죄의 길로 빠지게 한 셈입니다.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가미가 되었다”라는 말씀으로 에봇 사건은 끝을 맺습니다.
기드온이나 그 시대의 백성들만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사사로이 자신을 높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아 다닙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와 충동적인 신앙이 위험한 것입니다.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나아야지,” “내 수입이 저 사람보다 적을 수는 없지.” “내 교회 아니 내 가정에만 하나님께서 계셨으면…”등등 끊임없는 경쟁심과 욕심이 속에서 생겨납니다. 전쟁영웅이었던 기드온이 쩨쩨하게 귀고리를 가지고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땅에 모셔 두었듯이, 우리들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기 영역 안에 가두어 두려는 죄를 짓습니다. 물론 그릇된 신앙입니다.
올 해도 이제 달력이 한 장 남았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나 에봇에 한눈이 팔려 있지 않았는지,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은 번드르하게 했지만 그 속에 슬쩍 자신의 생각을 끼워 넣지 않았는지, 혹시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에봇은 없는지 –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신앙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마지막 한달 만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조로 살기 원합니다.
(2011년 11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