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이 두번째 이야기

지난 달에 제가 쓴 칼럼의 제목이 “토끼와 거북이”였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그만 중간에 잠이 들어버린 토끼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달려온(?)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지고 만다는 이솝 우화였습니다. 우화 속의 토끼는 자만심은 물론 게으른 잠꾸러기로 좋지 않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새로 각색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하는 토끼가 있었답니다. 토끼는 속으로만 거북이를 사랑했기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 보지 않을래?’ 그날 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북이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각색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입니다. 사람들은 경주에서 이기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승자에게 관심을 가질 뿐, 패자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스스로 양보하거나 은밀히 선행을 행한 경우라도 세상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고,경쟁에서 이기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이야기 속의 토끼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거북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경주에서 일부러 저 주었습니다. 그래도 거북이가 자는 척하고 있는 자기를 깨워서 함께 경주에 임할 줄 알았는데, 거북이는 자신을 지나쳤습니다.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지만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참을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는 친구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토끼에게는 교만하고 게으르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지만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감수했습니다.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일부러 경주에서 져 준 토끼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토끼의 마음을 갖고 싶어집니다. 요즘 세상은 모두가 일등이 되고 싶어하고, 양보와 손해라는 말은 어리석게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일등이 되려는 야심과 더 많은 복을 받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토끼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음 깊이 품고 있으면 가능하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면 훨씬 쉽겠지요.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고, 이웃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넉넉한 마음을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서 한 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2012년 1월 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