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한 달에 한번씩 몇 분 목사님들과 함께 은퇴하시고 베이지역으로 오신 신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읽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영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빈부격차가 생기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로 인해서 신음하고 있을 때 ‘성화’라는 모토를 갖고 교회는 물론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에 이를 정도의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화를 촉구하면서 당시 영국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웨슬리가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큽니다. 그의 신앙운동은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 일어난 19세기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신앙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성과 개인적인 체험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사회운동에 초석을 놓기도 했습니다. 속회라고 불리는 소그룹 역시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회가 가장 강조한 사역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체계적인 신학서적을 저술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했던 설교와 일기 속에 그의 사상이 깃들어있는데, 평생을 웨슬리를 연구하시고 가르치신 은사님의 해설을 곁들인 웨슬리 설교 읽기는 저를 비롯해서 참석하시는 목사님들의 개인 영성과 목회에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열심에 대하여>라는 설교를 읽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열심이라고 하면 말씀과 기도와 소위 영적인 일에 힘을 쏟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나 교회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가리키곤 합니다. 이처럼 열심은 신앙생활이나 교회활동에 국한된 말로 쓰입니다. 심한 경우, 가정이나 세상 일을 소홀히 하면서 교회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을 두고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반쪽 짜리 또는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아졌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해졌습니다.
부작용도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보상을 바라면서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교회를 좌지우지 합니다. 웨슬리는 그릇된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독재자들이나 세상 권력의 그릇된 열심이 무고한 희생자를 낸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열심의 동기와 방향이 자신을 향할 때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공동체에 도리어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정한 열심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판지 않습니다.성급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를 향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한 두번 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해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큼 말씀과 기도 등 경건의 행위에 힘씁니다. 무엇보다 열심의 한 가운데 사랑이 위치합니다. 사랑이 빠진 열심은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열심은 마음이나 생각에 그치지 않고 손과 발로 나타납니다. 열심은 마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행위(works of mercy)”가 되어야 합니다. 웨슬리는 열심을 두고 “사랑의 불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열심의 시작과 끝에 불꽃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진정한 열심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완성이 곧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열심입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세상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많이 잃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만 강조하다 보니 반 쪽짜리 믿음이 되었고, 세상과의 소통을 상실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믿음의 총체요 완성인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가장 큰 열심을 내야 합니다”라는 웨슬리의 설교를 귀담아 들을 때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기 원합니다.말과 생각에 그치는 허풍쟁이 열심보다 손과 발로 사랑을 실천하는 알짜배기 열심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2014년 8월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