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지난 6월에는 학업을 위해서 미시간으로 떠난 큰 아이와 자동차 여행을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3박 4일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 네 식구가 둘러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제 목소리가 떨립니다. 애써 참고 있던 아내도 아들을 안아주면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큰 애도 손으로 눈물을 훔칩니다. 이렇게 약간 무거운 마음으로 아들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넓고 넓은 미국 대륙의 절반을 횡단하는 여행은 저와 아들에게 큰 추억을 남겼습니다. 하루 10시간 정도를 번갈아 가면서 운전했습니다. 좁은 자동차 안에 둘만 있으니 저절로 얘기꽃을 피우게 됩니다. 어릴 적 한국에서부터, 커네티컷과 인디애나를 거쳐서 캘리포니아에 오기까지 우리 가족의 얘기, 학교생활과 친구들간의 에피소드, 교회 안에서 목사의 자녀로서 겪었던 애환, 앞으로의 학업과 그 이후의 계획까지 부자지간에 깊은 대화가 오갔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매우 엄격하게 키웠습니다. 지금도 제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 큰 애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잔뜩 긴장합니다.그것이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 부분도 건드렸습니다. 아빠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아빠를 용서하고 훌훌 털어버리길 부탁했습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자신이 잘 클 수 있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아들과 단둘이 하는 자동차 여행이기에 가능한 대화였습니다.

정착을 도와주고 아들을 미시간에 남겨둔 채 비행기편으로 돌아오는데 못난이처럼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빠를 배웅하고 혼자 학교로 돌아가는 아들의 마음이나, 아들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는 저의 마음이나 아쉽고 허전하기는 매일반이었을 겁니다.

요즘은 둘째와 둘이 지냅니다. 아내가 2주 예정으로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2주가 아니라 한 달도 견딜 만큼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냉장고에 얼려놓았습니다. 우리 부자가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을 수 있을지 염려가 되는지 매일 카톡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 역시 음식을 만들거나 집안일에 젬병이라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를 많이 닮은 둘째이기에 아내가 없는 두 주간이 꽤 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생활 3년 동안 자취를 해서인지 둘째가 음식을 잘합니다. 제가 챙겨줘야 할 줄 알았는데 대학원 준비로 바쁜 이 녀석이 밥도 미리 해놓고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 부자지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도 솔솔합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아들이 알고 있을 때는 살짝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낍니다.

단 둘이 마주하고 있으니 더 잘해 주지 못한 일들이 생각나면서 한없이 미안해집니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난 괜찮아, 아빤 괜찮아?”라고 저를 걱정해 줍니다. 아직은 제가 젊지만, 이렇게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고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아들과 각각 단둘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에 감사했습니다.

아들을 향한 제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저에게 가장 잘해 주고 싶으실 겁니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결국에는 선을 이루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주 가끔 매우 엄격하게 대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께서 사랑의 매를 드시는 듯 합니다. 정신이 바짝 납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의 측은지심이 저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과연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스럽고 대견한 아들인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공항에서 제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손을 흔들어주던 큰 아이만큼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지, 힘들면서도 “난 괜찮아, 아빠는?”이라고 말하는 둘째처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많이 부족한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자지간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은혜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2014년 9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