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수없이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아무런 뜻도 모른 채 연인과 헤어진 사연을 노래한 가요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헤어진 커플들은 물론 이 세상에 이별의 슬픔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미국에 오니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헬로윈으로 떠들썩 합니다.아이들은 헬로윈 코스튬을 하고 학교에 갑니다. 저녁에는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샌프란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말 그대로 광란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10월의 마지막 날은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마틴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한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결국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신학을 여러 가지로 논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신학입니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고 그것을 그의 신학은 물론 삶에 적용했습니다. 루터가 이처럼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게 된 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들이 십자가 고난을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인간의 이성과 노력, 업적을 통해서 인간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높이고,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잠시 있을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소위 값싼 은혜를 설파하는 천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루터는 십자가 신학이 모든 신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간 사건입니다. 모진 고난과 수치를 십자가 위에서 한 몸에 실제로 겪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교만과 자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누리는 영광과 형통이 십자가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면 그릇된 신앙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영국의 신학자는 자신이 청년시절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도리어 거부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믿는 신앙 까지도 이성을 사용해서 증명해 내고 글이나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상아탑 안에서 머리로 생각하던 신앙과 그가 몸으로 부딪친 목회현장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의 삶은 신학적 지식이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처절했습니다. 그때 맥그래스는 루터가 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십자가를 교리적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대속(代贖)의 교리가 십자가의 모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악에 대하여 승리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한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하고 신비로운 사건이 교리에 머문다면 우리의 신앙은 매우 추상적이 될 것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연인과 헤어짐을 노래한 감상이나 헬로윈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처럼 십자가가 단순한 감상이나 신앙의 겉치레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교리를 넘어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 우리의 이기심과 쓸데없는 자존심을 못박고 자신의 옛자아가 죽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예수가 되어서 세상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주간을 맞으면서 십자가를 믿는 신앙과 그 안에서 체험하는 은혜가 교리를 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2014년 10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