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술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유토피아는 유토푸스라는 사람이 만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섬입니다.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 주민들은 한 군데 오래 머물면 타성에 젖고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10년마다 이사해야 합니다.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게으름 피우는 사람없이 모든 주민이 똑같이 일하니 노동생산성이 매우 높습니다. 화폐가 없어서 재산 축적이 불가능합니다. 주민들은 시장에 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큼 갖다가 먹고 쓰면 됩니다.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은 노예들을 결박하는 쇠사슬로 사용됩니다. 주민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가 독재를 일삼거나 부패하면 곧바로 퇴각시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없다”라는 헬라어 <우>에 장소를 가리키는 <토포스>가 결합한 말로서 “지상에 없는 장소(no-place)”를 가리킵니다.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탐욕과 교만, 권력에 취한 세상이 유토피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을(乙)로 사는 우리네 범인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재물과 권력을 손에 쥐고 수퍼 갑(甲)으로 사는 이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사는 유토피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입니다.
토머스 모어의 친구였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풍자소설을 썼습니다. “모리아”라는 여신을 통해서 당시에 부패했던 종교계와 가진 자들의 위세를 비판합니다. 두 눈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동네를 방문하면 바보 취급받는 것이 우리네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보고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동굴 밖의 세상을 알려주면 도리어 그를 어리석다고 놀립니다. 우신예찬의 주인공 모리아가 세상을 올바로 보고 있지만 바보 취급받듯이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96년 전, 유토피아를 꿈꾸며 유럽을 떠나서 신대륙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저항하며 바보처럼 살았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66일 동안 메이플라워를 타고 우여곡절끝에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유토피아를 꿈꾸며 목숨 걸고 대서양을 건넜지만, 신대륙의 혹독한 추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절반이 죽고 50여 명만 살아남습니다.
이들이 찾은 신대륙도 유토피아는 아니었습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들이 씨를 뿌리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가축을 키우는 법 등을 가르쳐줍니다. 어리석고 야만인처럼 여겼던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그해 가을,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벌였는데 그 순간은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의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입니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을 것 같습니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 역시 완벽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디스토피아(나쁜 곳)”로 불릴 정도로 추하고 슬픈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편견도 심해서, 두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진실을 왜곡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선거 때마다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만, 권력을 손에 쥐면 자기 배를 채우고 갑질하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서 유토피아를 향해서 나갑니다.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서로 격려합니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당해도 진실되고 바른길을 걸어갑니다.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깜깜한 세상에 빛을 밝힙니다. 정의가 물같이, 하나님의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도 기억합니다. 세상 속에 개입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유토피아를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둔 채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가까이는 추수감사절에 함께 모이는 가족, 교회 식구들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 유토피아를 경험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2016년 11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