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예례미야
예레미야서 한가운데 위치한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나누기 앞서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어떤 인물인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머니 태중에서 선지자로 구별되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심판 예언에 이어서 “건설하고 심게”하는 회복에 대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예레미야의 심정을 잘 표현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사야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많은 예언을 했다면, 예레미야는 그의 마음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예레미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태어나셨듯이 예레미야도 어머니 태중에서 구별되고 부름을 받았습니다(렘1:5).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변방 아나돗 출신이었듯이,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는 말이 생길 정도의 작은 동네 나사렛 출신이십니다.
아나돗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수치스럽게 한다는 명목으로 예레미야를 죽일 생각까지 했습니다(렘11:19). 나무와 열매를 찍어서 없애자는 말을 할 정도로 예레미야의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예수님도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면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당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57).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떠올리셨을 것 같은 대목입니다.
예레미야가 당시의 타락한 성전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분노하고 예레미야를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렘26: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인용하신 것입니다(렘7:11; 마2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과 성전이 타락한 것을 맹렬히 지적한 예레미야가 중첩됩니다.
예수님도 예레미야처럼 우셨습니다. 예레미야가 멍에를 지고 예루살렘을 활보했듯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마음속에 두신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니 예레미야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도 예수님이 드러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