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과 불안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당장 피해를 입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가 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고물가에 시달립니다. 기후 위기도 이곳저곳에서 감지됩니다. 파키스탄은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면서 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반면, 유럽은 극심한 가뭄으로 수백 년 만에 강바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끊임없이 총기사고가 이어집니다. 팬데믹의 어두운 그림자는 3년이 지나도록 완전히 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녹록지 않습니다. 연로하신 권사님들은 부쩍 육체적으로 연약해지심을 봅니다. 젊은이들도 샌프란시스코와 베이지역에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투쟁입니다. 세계에서 돈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물질, 즉 숫자가 모든 것을 가늠하고 결정할 때도 많습니다. 앞만 보고 내 길을 간다고 하지만, 잠시라도 옆을 보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대적으로 초라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염려와 근심, 불안, 두려움이 상존(尙存)합니다. 인간은 원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존재라고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말했는데, 우리 역시 안팎에서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우리 역시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질그릇임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 본문을 갖고 연속해서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혹자는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개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 년 내내 두려움을 느끼기에 매일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 없지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간 제약상 모두 살필 수 없기에 신구약 성경에서 여덟 개 정도의 본문을 살필 계획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2편은 43편과 서로 짝입니다. 원래는 하나의 시편이었는데, 성전에서 예배하기 편하게 둘로 나뉘었다고 봅니다. 두 개의 시편을 묶어주는 후렴구가 있습니다:“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11; 43:5).
사람들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합니다. 예전에는 함께 성전에 올라가서 기뻐하고 예배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상합니다. 그때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왜 낙심하고 불안해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분명히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찬양하라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극복할 대상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