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4)

영생을 사는 것

 

지난 한 달 동안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고 그곳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시스템에 주목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일등만 살아남는 베데스다의 법칙이 요즘 세상과 비슷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사가 내려오는 것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혹시나’하고 기다리는 연못가 병자들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삶으로 보이지만, 정작 헛된 희망이 이들을 묶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나서 걷는 놀라운 사건은 보지 않고 쓸데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거에 묶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선입견과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만나서 38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병에서 해방된 사람은 담대하게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하고 증언했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거칠 것이 없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누워서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생에서 일어나 걷고 자기의 삶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생각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쌓아놓은 기득권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것에 연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하시면서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을 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박해하고 급기야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가 생명을 주관하시듯, 예수님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버지는 심판하는 권한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격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경멸하고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생명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