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예배자(3): 가인과 아벨 (3)/ 창세기 4장 9-24
성경 속 예배자(3): 가인과 아벨 (3)/ 창세기 4장 9-24
가인과 아벨 (3)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특히, 독립 선언서를 준비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개신교 인사가 다수였습니다. 이분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으며, 우리도 미국에서 자부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된 독립운동가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간직해야겠습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예배자들인 가인과 아벨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마음과 태도가 언제나 완벽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릇된 모습이 발견되면 다음에 고치면 됩니다. 가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냈습니다.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이 분노로 발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셔서, 죄가 문 앞에 웅크리고 있으니, 죄를 다스리라고 당부하십니다. 이와 관련해서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에 나오는 “팀셸”이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부탁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데리고 들로 나갑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불리게 된 슬픈 사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죄로 발전했고, 동생을 죽이는 어이없는 엄청난 잘못을 범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11절)는 말씀이 안타깝게 들릴 뿐입니다. 아벨(히브리어 ‘하벨’)은 전도서에 나오는 “허무함”에서 왔는데, 그의 이름처럼 한숨 같은 허무한 인생을 살다 갔습니다. 신약 성경의 세례 요한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죽으신 예수님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았듯이, 히브리서 말씀대로 아벨의 믿음은 대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가인은 태연하게 자신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말은 뻔뻔하게 들립니다. 죄를 범한 이후에 가인의 말과 태도는 그의 마음이 죄로 인해서 완악해졌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은 배회하는 자가 될 것이고, 그가 농사를 짓는 땅에서 저주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계가 끊어지는 벌입니다.
가인은 회개는커녕 하나님의 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투덜댑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이마에 표시하셔서 사람들이 가인을 해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 같은 범인은 가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우리 지역 출신 작가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을 소개했습니다.
이 소설은 창세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해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형은 아론, 동생은 갈렙입니다.
아론은 이상적이며 순진하고 선한 인물입니다.
갈렙은 형을 향한 아버지의 편애에 불만을 품고,
형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입니다.
1955년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는
제임스 딘이 갈렙을 실감나게 연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갈렙이 형에게 어머니의 비밀을 말하면서
아론은 군에 입대했다가 목숨을 잃고,
아버지 아담도 그 충격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합니다.
이 집안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의외의 인물은
중국인 하인 Lee입니다.
Lee는 죽어가는 갈렙의 아버지 아담에게
죄책감에 빠져사는 아들을 용서하고
힘과 희망을 주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긴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팀셸 timshel>입니다.
2.
소설 중반부에서
Lee는 창세기 4장 7절에 나오는
<팀셸>이라는 단어의 뜻에 의문을 품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있는
아흔이 넘은 중국 노인들을 찾아가서 해석을 부탁합니다.
이분들은 유대인 선생을 초빙해 히브리어를 배우며
약 2년 동안 연구와 토론을 거친 끝에
마침내 <팀셸>의 의미를 밝혀 냅니다.
영어 흠정역(King James Bible)은
약속과 예정(운명)의 의미가 담긴
“너는 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Thou shalt rule over him/sin)”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은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Do thou rule over him)”
라고 명령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에 가까운 번역이지만,
가인은 이 명령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스타인벡이 소설에서 강조한 해석은
“너는 죄를 다스릴 수도 있다(Thou mayest rule over him)”입니다.
인간에게 선택의 가능성과 책임이 함께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스타인 벡의 해석을 따르면,
<팀셸>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이 단순한 운명이나 명령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의 자리에 서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담과 이브, 그리고 가인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을
그릇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을 끝까지 믿으시며,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선한 길을 선택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이처럼 크다는 사실 앞에서
더욱 커다란 책임감을 느낍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편 25:12)
Who is the man who fears the LORD?
Him will he instruct in the way that he should choose.(Ps 25:12)
하나님,
기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26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2): 가인과 아벨 2/ 창세기 4장 6-7절
가인과 아벨 (2)
<성경 속 예배자>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 가운데 창세기 가인과 아벨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예배자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고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지만, 형제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본문이 명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을 갖고 설명해 보았습니다:“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물론 창세기 본문에는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대신, 아벨이 자신이 키우던 양들 가운데 첫 번째 새끼를 갖고 각을 떠서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에서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반면, 가인은 땅에서 추수한 열매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물과 제사법에 비해서 가인의 제물은 밋밋합니다.
아벨이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은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의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형식은 같았어도, 제사를 드리는 마음(정성)은 아벨이 앞섰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생각하면, 공평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전통적인 해석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 이후에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를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것을 두고 형 가인이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냅니다.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셔서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해서 가인이라는 사람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인을 찾아오셨고, 행여나 가인의 분노가 더 큰 죄로 발전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친절하게 알려주시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냈습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시작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가인이 얼굴을 들지 못하는 모습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나무 뒤에 숨은 것이 생각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이 어느덧
신명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이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우리 성경 제목, 신명기(申命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듭’ 펼쳐서 기록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제목 Deuteronomy는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두 번째 율법/Second law”이라는 뜻이니 우리 말 신명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첫 번째 율법을 주셨고,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번째로 당부하신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5장에는 출애굽기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이 나옵니다.
신명기 말씀은 매우 명확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
2.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 말씀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도 100%의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길 꿈꾸면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명기 법전의 정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최고 사랑합니다.
이웃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신명기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선과 악의 심판이 신명기에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악(惡)은 없고 선(善)만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땅의 악을 진멸하고 완전한 나라를 세우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이스라엘을 향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버렸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신명기에 이어서 기록된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하)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한 후에
신명기 말씀에 비추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3.
신명기 말씀이 너무 완벽하고
축복과 저주가 확실해서 읽기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말씀에 깃든 정신을 생각하면
신명기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두 마음을 품고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선과악의 이분법, 축복과 벌의 이분법,
인과응보 논리는 언제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명기 5장 33절)
하나님,
오늘 하루 만이라도
완벽한 신앙을 꿈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19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1): 가인과 아벨 2/ 창세기 4장 1-4절
가인과 아벨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선의 길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거하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는 물론 세상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곧 예배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배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광야의 성막에서,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후에는 성전에 모여서 다같이 예배했습니다. 바빌론 포로 기간에는 가정과 회당에서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면서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에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떡을 떼면서 교제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끝으로 펴져 나가면서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 시대 모두 자신의 백성을 예배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이 두루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개인과 가정, 민족과 공동체들입니다.
앞으로 “성경 속 예배자”라는 제목으로 성경에 나오는 예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간의 제약으로 전수 조사하듯이 성경 속 모든 예배자를 공부할 수 없습니다. 대신,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배자들의 모습을 함께 나누면서,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참된 예배자로 신앙의 길을 가기로 다짐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예배자는 가인과 아벨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낳은 형제들입니다. 이브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가인(얻음)”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분명하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이브가 주도적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이어서 둘째 아들인 “아벨(헛됨)”을 낳았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형 가인은 농사짓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가인과 아벨이 각자 준비한 예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커다란 문제가 생깁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모습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절대 배타적이지 않으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가 배타적이 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마태복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천국(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을
애지중지 지키는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배타적인 것의 반대말을 꼽으라면
“배려”를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님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맞지만,
자칫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는 배타적인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끗 차이 같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필요하지만,
다른 종교나 다른 신들을 악마화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중동 분쟁이 유일신 하나님/알라를 믿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의 싸움인 것이 좋은 예입니다.
각자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이 서로 소통하십니다.
서로 손을 잡고 춤추시는 ‘페리 코레시스’의 하나님이십니다.
매우 색다른 유일신 신앙입니다.
2.
엊그제 성경 통독에서 읽은
레위기 마지막 27장에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다면,
율법이 정한 값을 제단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한창 활동할 연령인 20-60세 남성은 은 오십 세겔,
같은 연령대의 여성은 30세겔,
5-20세의 남성과 여성은 각각 20세겔과 10세겔,
1개월에서 다섯 살까지 남자와 여자아이는
각각 은 다섯 세겔과 삼 세겔입니다.
요즘 은 값이 많이 올랐는데,
최근 은 값으로 환산하니 남성 은 오십세겔은 약 1,500불입니다.
예수님은 성인 여성의 서원값인 은 삼십 세겔에 팔리셨지요.
은 삽십 세겔은 노예 한 명에 해당하는 값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정해진 서원값을 지불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힘이 버겁습니다.
율법은 가난한 백성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서원값을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찾아가고, 제사장은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신약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
공동체 속에서의 배려가 차고 넘치게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크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시작이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하나님,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12 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 (15):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마태복음 13장 44-4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