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부활주일에

부활을 사는 것

 

성서일과(聖書日課Lectionary)는 교회력에 따라 매일같이 신구약 성경을 읽는 성경통독 방식입니다. 3년 주기로 성경 전체를 균형있게 읽도록 돕기 때문에 매일같이 성서일과의 본문을 읽거나 성서일과를 따라 주일 설교 본문을 정하고 말씀을 전하는 교회나 교단도 있습니다.

 

성서일과를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것에 장단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주어진 본문과 틀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네 개 정도의 본문을 정해주지만 그래도 유연함이 떨어집니다. 장점은 목사가 임의로 설교 본문이나 주제를 정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설교 속에는 전하는 목사의 의도가 들어갑니다. 대부분 섬기는 교회에 맞는 본문과 주제를 선택하지만, 목사 개인의 생각이 반영될 수 있는데 성서일과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해 줍니다.

 

저는 연말 대강절(Advent)에 성서일과의 본문을 사용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절기 설교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지만, 오늘처럼 진행 중인 연속 설교를 한주 쉬고 절기 설교를 할 때는 성서일과를 참고합니다. 올해 부활절 성서일과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10:34-43; 시편 118편 1-2,14-24; 골로새서 3:1-4; 요한복음 20:1-18 또는 마태복음 28:1-10. 부활 주일을 보내면서, 성서 일과의 본문을 읽고 묵상하셔도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의 삶> 진도를 따라서 아침 말씀을 나눕니다. 역시 주어진 본문입니다. 중복해서 읽기도 하지만, 5년 정도 지나면 성경 전체를 통독할 수 있습니다. 3년마다 매일 성경을 깊이 읽고 통독하기를 원하시면, 개별적으로 성서일과(A, B, C유형이 있음)를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성서일과의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고넬료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식민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던 선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각각 환상을 보여주셔서 두 사람이 고넬료 집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꺼리던 베드로였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고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매우 뜻깊은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갖고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은 베드로는 물론 초대교회가 붙들고 있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부활을 살게 되었습니다.-河-

힌네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모리아 산의 사건을,

아브라함의 입장과 이삭의 입장에서

두 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상식과 윤리, 도덕을 존중하시는 하나님도

발견하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부조리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노년의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을 따르기 위해,

10대에 접어든 아들 이삭의 협조가

꼭 필요했음을 나눴습니다.

 

이삭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모습도 발견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설교를 마친 후,

제 마음에 계속 머무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그리고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대답한 한 마디 히브리어  <힌네니>였습니다.

 

히브리어 <힌네니>는

“보시옵소서. 내가 여기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세, 사무엘, 이사야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힌네니>라고 대답했습니다.

 

3.

<힌네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는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언어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나’라는 자아도 내려놓았습니다.

어떤 주장이나 생각, 제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무장해제하고

드리는 고백이 바로 <힌네니>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힌네니>의 정신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뜻에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힌네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가길 원합니다.

 

내 생각이나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난 주간,

아니 오늘 하루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여 만일 만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 Lord)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4 2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7)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습니다.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첫 약속이 현실이 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삭은 평범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구김살 없이 컸습니다. 이집트 출신 하갈에게 태어난 이복형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웃음”이라는 그의 이름을 갖고 조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아들 이삭도 모리아 산에서 경험한 여호와 이례 하나님은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제사에 쓸 장작을 지고 가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나이는 10대 어간이었을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해서 제물로 드릴 때, 이삭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했습니다. 힘이 없는 노인 아브라함이 청소년 이삭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제물로 바쳐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이삭도 정말 대단합니다.

 

“포기”와 “기대”를 통해서 믿음이 도약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삭은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말 대로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잃기 바로 직전에 살아난 이삭은 평생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모리아 산의 사건이 아브라함  믿음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면, 이삭에게는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엄청난 경험을 하면서 믿음의 길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이삭의 인생은 예전에 설교했던 제목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내 리브가 얻는 과정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타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이나 그의 아들 야곱에 비하면 평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창세기에서 이삭에 대한 본문은 비교적 짧습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창세기에 한 번 나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흉년이 들어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그랄이라는 곳에 정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두 번째 속인 곳인데, 이삭도 똑같이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랄에서 이삭에게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떠나달라는 그랄 왕의 요청으로 그랄 골짜기로 이주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합니다. 우물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때마다 이삭은 다툼보다 양보를 택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머물던 브엘세바에 정착하고, 우물을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河-

두려움과 떨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 뿐인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인신제사를 금지하는 성경 전체의 흐름,

오늘날의 상식과 윤리로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두말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로 드릴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가 나왔습니다.

 

2.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 Fear and Trembling>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기사(knight of faith)”로 부르면서,

그의 믿음은 보편적인 윤리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상식이나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개별자”의 결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매우 고유한 사명입니다.

이를 보편화하여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도

쉽게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을 근거로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규정하면,

신앙이 “두려움과 떨림”에 매일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잘못 형성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확대하기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특별한 믿음의 사건으로

신중하게 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첫째, 이 말씀을 서둘러 결론 내리지 말고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야 합니다.

모리아 산을 향하는 두렵고 떨렸을 여정,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이삭을 묶고(아케다, 결박)

칼을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 본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두렵고 떨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아브라함 믿음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시험을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셔도

아브라함에서 보듯이 분명한 목적을 이루십니다.

 

셋째, 믿음의 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상식과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신비의 세계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이루기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 걸음 더 뛰어오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하나님,

온전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26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6)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다섯 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한 세겜에서, 벧엘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가뭄을 피하려고 이집트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회개와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네 번째는 조카 롯과 결별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걸어보고 헤브론에 정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창세기 15장에도 아브라함이 제물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주도하신 예배였기에 이번 성경 속 예배자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아브라함의 예배는 매우 독특합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절정에서 드린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뿐인 아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고, 아브라함은 멋지게 통과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자세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시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12:2)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가나안 땅으로 내려올 때도 하나님 약속만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곧바로 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 fear and trembling, 1984>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자세히 다룹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윤리적인 기준을 정지시키고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케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전사>라고 부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설입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다시 주실 것도 믿었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보았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다시 얻었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제물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河-

기쁜 날

좋은 아침입니다.

 

1.

전쟁이 점점 격화되는 요즘입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주유소의 일반 개스(휘발류)값이

갤런당 5불 후반대를 찍은 곳도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샌프란 기름값이 5불 가까이 올랐습니다.

제가 처음 샌프란에 왔던 2005년보다 두 배나 오른 것입니다.

그때는 도로에 차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미국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심각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은 반으로 떨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은퇴 계좌의 주식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감을 함께 느끼며

함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3-4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경제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미국의 저력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코비드 팬데믹을 지나며

많은 것이 왜곡되었습니다.

빈부 격차는 K자형으로

사회 전반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전쟁까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유지되던 세계 평화와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물가는 계속 치솟고 있습니다.

K자의 아래쪽에 계신 분들의 어려움은 심각합니다.

 

그래도 좋은 날은 올 것입니다.

당장은 멍이 들고, 심한 경우 피가 흐르는 상처를 입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질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더 힘겹게 살아가게 될까 염려됩니다.

 

2.

세상이 혼란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몇일, 찬송가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을

계속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뜬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씻어 주시고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능력이 온 세상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구속(redemption), 구원(salvation)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로’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말 기쁜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모두에게 기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하나님,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할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1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