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5): 로마서 3장 23-24절
Author: 참빛
그리스도의 복음 (5)
우리가 로마서 3장을 공부하면서, 생각할 것은 ‘종교의 일반적인 요소들’과 ‘기독교만의 특수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도 기복주의로 대표되는 종교의 일반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왕 예수님을 믿었다면 잘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세상에서 나름 꿈을 이루고,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기도합니다. 권사님들의 경우 육신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 자녀들의 앞길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세상의 대부분 종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종교의 일반적인 모습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3장이 이것을 자세하게 안내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우쳐줍니다. 세상은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정도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둘째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안에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밖에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는 물론 자신의 죄를 놓고 씨름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셋째로, 죄를 해결하는 방식도 특별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홀로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노력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집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구원의 집의 현관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현관을 통과해서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문(열쇠)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 놓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집을 세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배우는 “칭의(justification)”와 “속량(redemption)”으로 우리와 세상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분하게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구원의 집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요 선물입니다. -河-
맡아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다니던 직장을 접고 목회의 길로 들어오면서,
몇 가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제가 섬기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각박합니다.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앞서고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제가 꿈꾸는 교회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핑계가 아니라
대형 교회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사람 냄새가 나고, 정겹고
목사인 제가 한 분 한 분을 친밀히 섬길 수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났고,
우리 교회에서만 21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교회는 맞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를 이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그룹도 시도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진행하지 못했구요.ㅠㅠ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교회가 좋다” “교인들이 좋다”고
말씀하실 때는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아마 저의 목회는
이 정도에서 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2.
지난 토요일 아침기도회에서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은
제가 꿈꿨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각각의 자리와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지체도 크거나 작지 않고, 강하고 약하지 않습니다.
모두 소중합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머리가 발에게 “너는 쓸모가 적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구절이 감동입니다.
우리 몸에서 머리가 최고인데
땅을 밟고 다니는 저 끝의 발을 무시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도리어 약한 지체에게 힘을 실어주고
부족한 것을 대신 맡아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3.
지난번 주일 예배에서 나눴던
가인과 아벨의 말씀에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 4:9)라는
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에게 서로 지켜주고
서로를 맡아주는 형제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서로 지켜주고 맡아주는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위로와 힘, 격려와 도전이 끊이지 않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6)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의 참맛을 느끼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1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6월 1주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4): 로마서 3장 23-24절
그리스도의 복음 (4)
로마서 3장 말씀은 물질이 최고인 요즘 세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잘되고 장수하며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알려주는 행복은 세상의 것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의 복음을 공부하면서도 감동이나 깨달음이 적은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선포하는 복음이 우리의 마음에 직접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효능감도 떨어집니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밝히 알고 깨닫는 신앙의 안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며 그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한 교만이 하나님보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더 높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3:18-3:20)에 의하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와 같은 훌륭한 신앙인들이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인간과 세상 깊숙이 자리 잡은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라는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인간의 실존을 다시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앞에 이를 가능성과 능력이 이미 상실되었기에,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의롭게 됩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자격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그 영광에서 멀어졌습니다. 죄의 힘과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河-
메꿔감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어떤 글을 쓸 때,
우선 초고(draft)를 가능한 한 빨리 작성해 놓습니다.
조금 부족하고 서툴러도
초고를 끝내 놓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번 읽으면서
중간중간 필요한 것을 메꿔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작성할 수 있으면
시간도 절약하고 일찌감치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한 번에 글을 완성하려다가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시간만 허비하고
마감 날짜에 허둥지둥할 때가 많았습니다.
2.
저의 이런 습관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작성하면서 생겼습니다.
3년 만에 필요한 모든 수업을 듣고
종합시험까지 통과했습니다.
목회하고 있었고
교회도 계속 문제가 있었기에
논문을 남겨놓고 거의 6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제 지도교수님께서
시간을 정해 주시면서
논문 초고를 완성해서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문 통과는 불가능하다고 겁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6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하고 책만 읽었다면
마지막 1년은 교수님의 엄한 명령에 순종해서
초고를 완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초고가 완성되니
교수님께서 코멘트하신 것을 위주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가면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생각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을 때가 다반사입니다.
완벽하게 하려고 고민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실제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겠다는 다짐보다
우선 무릎 꿇어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초벌구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메꿔가면 됩니다.
채워가고, 완성해 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새달 6월을 맞았습니다.
미뤄두었던 것을 시작하고 실행해 옮겨봅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16:3)
하나님,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4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5월 5주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3): 로마서 3장 21-22절
그리스도의 복음 (3)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3장 21-31절은 로마서는 물론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망가진 세상에 “그러나 이제” 복음의 빛이 비쳤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면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의 능력이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바름’을 가리킵니다. 죄가 침투하지 못하는 완벽한 ‘의’입니다. 거짓 없는 온전히 참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율법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가 선택한 백성에게 기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물론 양심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악한 길로 갔습니다. 율법을 죄를 범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율법은 물론 선지자들이 예고한 하나님의 한 의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중요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세상의 도덕과 선한 행위를 갖고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구원을 주도하고 성취합니다.
믿음에 이르는 데 두 가지 과정이 요청됩니다. 우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개입니다. 로마서 전반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본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으로 살아온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십자가 앞에 나가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입술로 말하는 회개를 뛰어넘는 행함이 동반된 회개입니다. 구약에서 회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슈브”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신약의 회개(메타노이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현관과 같습니다.
회개에 이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됩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河-
아이러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이러니(irony)는
반어(反語)로 불리는 문학 용어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날씨 한번 참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과 속뜻이 정반대일 때
이것을 언어적 아이러니(verbal irony)라고 합니다.
영화나 연극에서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데
등장인물만 모른 채 전개되는 것을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고 부릅니다.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적 아이러니(situational irony)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죄인들이 달리는 나무에 달리셨지만,
그 죽음이 오히려 죄인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으니,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아이러니입니다.
2.
엊그제 읽은 기사 역시
아이러니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요즘 구직 시장에는
AI를 이용한 지원서(job applications)가 많답니다.
손쉽게 지원서를 만들 수 있으니
지원서의 숫자도 크게 늘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돋보이려고 사용한 AI 기술이
지원서들의 형식, 어투와 내용을
비슷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답니다.
그러다 보니
AI로 작성한 지원서를
AI로 걸러내는 기업까지 등장했습니다.
AI를 사용해서 훌륭한 지원서를 준비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적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사 속에서 전문가들은
AI로 초안을 만들고,
실제 경험과 구체적인 수치,
그리고 지원자 개인만의 이야기가 포함된
‘나만의 개성 있는 지원서’를 작성하라고 조언했습니다.
3
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돋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서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 기술이
서로를 비슷비슷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행여나 자신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길까
염려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남을 닮은 모습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조금 부족해도
참되고 솔직한 모습을 더 기뻐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길 원하십니다.
겉모습보다
우리 안의 <참됨과 선함>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만의 삶”을 살아봅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9)
하나님,
‘참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28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5월 4주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2): 로마서 3장 21-22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