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은혜 (9): 십자가와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57-58절
십자가의 은혜 (9): 십자가와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57-58절
십자가와 부활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과 연결해서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핍박과 박해를 견뎠습니다. 죄인들이 죽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은혜를 속죄, 화목, 승리로 정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희생양이 되셨고 동시에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장 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을 담당하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 주셨음을 십자가의 세로목으로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의 가로목은 이웃과의 용서와 화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을 이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십자가를 자랑한 것도 십자가의 승리를 믿었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믿을 때,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요12:23; 13:31-32; 17:1).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속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히2: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시고 담당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영광과 존귀라고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영광이 되는 것은 그 끝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완성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는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되길 바랍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월요일에는
매우 흥미로운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8억1천만 달러를 들여 건설한
칠레의 베라 루빈 천문대를 소개하는 자리였습니다.
.
과학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앞에서 발표하는 과학자들의 얼굴은 상기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라 루빈 천문대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새로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베라 루빈”이라는 명칭은
암흑물질(black matters, 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의 존재를 발견한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의 이름에서 왔답니다.
베라 루빈 천문대는 지름이 1.65 미터인 카메라 렌즈 3 개를 통해서 관측합니다.
32억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애플 핸드폰 카메라는 4,800만 화소).
베라 루빈 천문대가 찍은 사진을 한 번에 보려면,
농구장 크기의 초고해상도 TV 400대를 연결해야 한답니다.
앞으로 베라 루빈 천문대에서는
매일 같이 100장 이상의 고화질 우주 사진을 찍어서 정보를 축적하고
자격을 얻는 회원(국)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랍니다.
2.
이번에 천문대가 공개한 4개의 우주 사진은
정말 그림 같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천문대에서 공개한 사진을 보면서
‘생뚱맞게’ 창조주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창조주가 없이 우연히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가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텐트처럼 펼치시고
손가락으로 달을 붙이시고 별들을 붙이셨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동화처럼 묘사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만드신 그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자신을 생각하고 돌보시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신비로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3.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찮은 점일 뿐입니다.
샌프란에 사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폼을 잡으면서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을 잠깐 옆에 두고,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돌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문대가 공개한 사진만큼이나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믿음의 세계도 신비롭습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되듯이,
우리 믿음의 상상력도 실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잠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면서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면 어떨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26.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8): 십자가의 삶/ 요한 16:32-33
십자가의 삶: 승리
십자가의 은혜를 속죄, 승리, 화목으로 나눠서 살펴보고, 이제는 십자가의 은혜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화목의 은혜로 초청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가능한 사역입니다(마 16:24).
오늘은 마지막 세 번째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세력들입니다. 인간과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세력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12:2)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역설적으로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셨습니다:“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서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고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하나님 백성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는 위로로 임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조롱을 받습니다. 수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옷이 모두 벗겨지시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조롱과 수치를 없애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십자가의 길을 가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난다고 하시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십니다. 장차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제자들을 미리 격려하십니다:”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십자가는 모든 악한 세력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2025년은 제가 담임 목회의 길을 걸어온 지
25년이 되는 특별하고 감사한 해입니다.
그동안의 목회를 돌아봅니다.
25년쯤 하면 자신감이 생길 만도 한데
아쉽고 부족한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감사한 것도 많습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25년 동안
재정적으로 돕는 형제도 있습니다.
인디애나와 이곳 샌프란까지,
한결같이 돕는 손길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복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함께 세워온 신앙의 동지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교회를 세워온 참빛 식구들께는
앞으로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것입니다.
2.
25년 목회하면서
제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돌아봅니다.
제자리에 멈춰 있거나, 혹시라도 뒤로 후퇴했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는 하나님 말씀 위반입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 목사에게 중요한 설교도 살펴봅니다.
저는 인디애나 시절의 설교 녹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샌프란에서의 20년 설교 녹음도 있습니다.
가끔 예전 설교를 들으면서 저 자신을 점검합니다.
저는 목소리가 맑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젊을 때 목소리가 지금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발음이 뭉치고,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긴장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많이 느려졌습니다.
주중에 설교를 여러 번 들으면서 모니터링하다 보니
발음도 비교적 명확해졌습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설교 내용은
그때그때 교인들의 상황에 맞게 설교했기에
각각의 설교에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만 놓고 보면,
모든 면에서 조금은 자랐습니다.
이다음 은퇴하면, 그동안의 설교를 아내와 함께 들으면서
그 시절 교인들을 떠올리며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3.
우리는 익숙한 것에 멈춰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이 그렇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 내 마음에 맞는 설교를 듣고 “아멘”합니다.
조금 불편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직장이나 세상의 일에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요즘 AI가 대세이듯이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실력을 키웁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만큼의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기도와 말씀, 신앙 서적 읽기, 개인 경건의 훈련 등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나 신앙이 멈춰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행사가 많지 않은데,
자칫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두고
신앙이 자랐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열심 있는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신앙의 환경도 바꿔보지만,
금세 지루해지니, 결국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변하고,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예수님을 향해서 자라가는 각자의 방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추지 말고, 자라가야 합니다.
때로는 탈피, 껍질을 벗는 아픔도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변화와 결단입니다.
그렇다고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면 됩니다.
대신, 멈추면 안 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예수님을 닮기까지 멈추지 않고 자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9.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7): 십자가의 삶/ 갈라디아서 2:20
십자가의 삶: 속죄
십자가의 은혜를 속죄(atonement), 승리, 화목으로 나눠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죄와 죽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죽음은 물론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최후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우리들 간의 관계를 이어 주셨습니다. 화해 또는 화목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십자가의 삶을 십자가의 은혜와 연결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으니, 우리도 십자가를 살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화목의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마음껏 누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웃과의 화목으로 연결됩니다. 십자가의 세로목과 가로목을 갖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이웃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화목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과의 화목을 도모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가 꼭 필요합니다.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화목의 십자가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면서 십자가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십자가의 삶은 “속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의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담당해야 할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듯이(요15: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덕분에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꿈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어려움이나 무거운 짐을 담당해야 합니다. 대신 지고 가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얼(십자가의 정신)을 심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고백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과 삶이 예수님을 닮아서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이웃의 짐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명입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이맘쯤, 우리 부부는
Ely Lilly라는 재단의 재정 지원으로
40일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며 휴가를 보냈습니다.
감리교가 시작된 런던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독일,
이태리 로마, 그리스의 아테네와 고린도까지
대부분 기차를 타고 여행했습니다.
유럽에서 흔하다는 소매치기도 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녀왔습니다.
저희 인생에 이렇게 긴 여행,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은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 끝났을 때,
“다 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하면 몸이 지칠 것 같았습니다.
계획한 곳들을 거의 모두 방문했습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엊그제 다녀온 것처럼
저희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평생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입니다.
2.
여행을 다녀온 이후,
여행 관련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제가 다녀온 곳들을 중심으로
복기(review)하듯이 유튜버들의 설명을 듣고,
다시 방문하는 듯한 느낌으로 영상을 봅니다.
저희가 갔던 장소가 나오면 반갑고 익숙합니다.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 나오면
‘미리 알았더라면 꼭 들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즐긴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면,
그만큼 여행의 깊은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고, 세심하게 감상할 것입니다.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작년으로 충분하고
한두 도시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미리 공부해서 골목까지 속속들이 충분히 즐기고 싶습니다.
3.
여행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 여정도 비슷합니다.
대충대충 지나가면,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을 놓칠 가능성이 큽니다.
인생길에 만나는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아는 만큼, 이야기한 만큼
이해하고 격려하며 도울 수 있습니다.
만남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셨고,
만날 사람들, 해야 할 일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벌써 6월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의 여정도, 신앙의 여정도 충분히 누리길 바랍니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만들어갑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5:4)
하나님,
주님의 생각을 알고, 그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2.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삶: 화목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길은 십자가로 통합니다. 그동안 배운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신약 시대에 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도 십자가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였습니다(신21:23).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제물을 갖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구약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매년 드리던 속죄 제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한 번에 영원한 효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구약 율법의 완성입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최고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든 악한 세력이 십자가를 통해서 물러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에 십자가는 승리였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견디고 이기는 근거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완성, 승리와 더불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웃과의 화목과 화해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은혜는 화목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십자가의 삶에 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십자가는 구약의 율법이나 과거의 초대 교회의 전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머물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 잠깐 나눴던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세로목과 가로목으로 구성됩니다. 세로목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면, 가로목은 이웃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세로목이 있어야 십자가가 온전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온전해졌을 때, 비로소 건강한 이웃과의 관계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가로목과 세로목 사이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갈 힘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화평을 이루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평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마음과 생각을 넘어서 몸으로 화평케 하는 자로 세상에 나갑니다. 그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