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주 예전에 유행했던

<핑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남자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이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구차한 핑계를 댄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면서

안개꽃 한 다발을 선물했는데

그 속에 숨겨진 편지에는

“안녕”이라는 두 글자뿐이었습니다.

 

슬픈 사랑을 가르쳐 주겠다는 핑계도 댔습니다.

그 마음을 다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핑계를 대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2.

핑계는 모든 인간의 생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의 오랜 속성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여자 하와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이브는 뱀에게 탓을 돌렸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과 함께 섬겼습니다.

 

모세가 묻자,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며

거짓말에 가까운 핑계를 댔습니다.

아담과 이브 이후 최고의 핑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의 핑계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말재주가 없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면서

선지자의 사명 앞에서 머뭇거렸습니다.

핑계의 내용은 달라도 결국 “나는 할 수 없습니다”였습니다.

 

3.

돌아보면,

우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살아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잘못한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어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댄 적은 꽤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생활입니다.

 

지난 주일에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기도를 놓고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기도할 시간은 언제나 있습니다.)

기도할 줄 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어서 (과연 그럴까요?)…

 

노래 속의 핑계가

사랑을 떠나기 위한 핑계였다면,

우리에게는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런저런 핑계가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는 앞으로 3주간은

핑계는 뒤로 하고 우선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기쁘다”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86:3)

 

하나님,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24 이-메일 목회 서신)

야베스의 기도 (1)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2000년에 미국의 복음주의 목회자 브루스 윌킨스(Bruce Wilkinson)의 책 <야베스의 기도 The prayer of Jabez)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에서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에 올랐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갖고 기도했었습니다: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환난을 벗어서 근심이 없게 하소서.”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를 주문 외우듯이 반복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면 기도가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기복주의 신앙이 발생한 것입니다. 소위, 형통의 복음 전파에 야베스의 기도가 사용된 것입니다.

 

신앙에는 욥기나 시편의 탄식시처럼 고난도 포함되어 있는데 형통만 강조하니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는 성경의 기도가 아니라, 기복 종교의 주술 행위에 가깝기에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야베스의 기도를 지나치고 그릇되게 적용하고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기도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대개 부활절 전후로 봄에 나눴는데, 올해는 다른 주제의 설교를 준비하다가 가을까지 밀렸습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힘입니다. 기독교인은 무릎꿇고 기도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십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와 말씀은 서로 짝입니다.

 

앞으로 3주 동안 야베스의 기도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 강조하는 주문을 외우는 기도가 아니라, 역대상 4장 9-10절의 야베스의 기도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이 새롭게 되고,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 힘과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야베스(“아픔” “고통”)는 매우 어렵게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는 뜻에서 야베스[야베츠]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오체브”인데 이 단어를 변형해서 “야베츠”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탄생은 어려웠지만, 그는 형제들보다 존귀했습니다. 사실 역대상 본문에 야베스의 형제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어렵게 낳은 야베스를 특별하게 대우했을 것입니다. 그의 탄생 자체가 다른 형제와 달랐으니 야베스의 삶 자체가 존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작은 힘들었지만, 야베스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배우겠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역대상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아담부터 수많은 이름이 등장하는데, 야베스의 경우 특별히 그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기를 사용해서 땅을 정복한 다른 족속들과 달리 기도로 그의 지경을 넓혔기 때문입니다.-河-

얼기설기

좋은 아침입니다.

 

1.

구약성경의 욥기는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처음에는 재산과 자식,

건강까지 잃은 욥의 신실한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동방의 의인답습니다.

 

마지막에는 긴 고난을 지나온 욥에게

하나님께서 충분히 보상해 주십니다.

재산을 되찾고 자녀들도 새로 얻습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입니다.

 

3장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1-2장의 의연했던 욥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만큼 무너집니다.

 

게다가 세 친구는

욥에게 거친 말을 쏟아냅니다.

욥이 잘못했기에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욥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고 친구들에게 맞서고,

하나님을 향해 탄식합니다.

 

2.

이처럼 욥기의

첫 두 장과 마지막 장은 쉽습니다.

내용이 명쾌합니다.

그런 욥을 닮고 싶다는 기도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부분입니다.

친구들의 말은 그럴듯하고 논리도 반듯합니다.

반면, 욥의 말은 오락가락합니다.

처음에 만났던 동방의 의인 욥과도 사뭇 다릅니다.

 

그런데 욥기를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음과 끝의 잘 정돈된 이야기보다

시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부분에 자꾸 눈이 갑니다.

 

친구들과 다투고, 자신을 변호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그러다가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욥,

– 그에게서 우리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3.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명쾌한 답을 얻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삶이 원래 얼기설기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풀리지 않는 일은 남아 있고,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도 생깁니다.

 

“왜 저입니까? Why me?”

“왜 이런 일이 저에게 닥쳤습니까?”

“제가 하나님 잘 믿으려고 했는데요?”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사는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얼기설기 펼쳐진 우리 삶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눈을 하나님께 고정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꼭 붙들고

꿋꿋하게 삶의 파도를 헤쳐 나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하나님,

흔들림 없이 주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17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명령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금은 하나님께 가신

구십이 넘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웃음소리가 소녀 같으셨습니다.

 

권사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성경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였습니다.

돌아보니 권사님은 정말 그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권사님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가정을 방문하면

거실에 많이 걸려 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2.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 붙어 있는 표현이 어렵습니다:

“항상”

“쉬지말고”

“범사에(모든 일에)”

 

그러다 보니 목사 입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늘의 기쁨,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기쁨을

마음에 간직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24시간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앞의 두 가지를 실천했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실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때마다, 곳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다가옵니다.

 

요즘 저에게 이 말씀은

특별한 설명보다

제게 주시는 세 가지 명령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갑니다.

 

명령이라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세 가지 명령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강력한 말씀의 무기를

우리에게 장착해 주셨습니다.

 

오늘만큼은

설명을 시도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부치면서 토(吐)달지 말고,

그냥, 주님 말씀대로 살아봅시다:

항상 기뻐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하나님,

오늘 하루라도 말씀대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10 이-메일 목회 서신)

닮은 꼴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마다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겸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성육신은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모두 위로 올라가려는 세상이기에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움직임은

금세 눈에 띄고 세상은 주목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걸”하면서 은근히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보여주신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전에 배운 요한복음의 일곱가지

“나는(에고 에이미)가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품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너머에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죽음에 매이지 않고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해서 행하신

기적, 또는 초월적인 선포는 우리의 몫이 아니지만,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을

우리 신앙의 푯대(목표 goal)라고 했습니다.

 

2.

엊그제 동네를 산책하면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여성분과 마주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굿 모닝”하고 인사했더니

“굿 모닝”하고 인사해 주셨습니다.

작은 눈을 살짝 감으신 듯했고,

입에는 옅은 미소를 띠셨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옆에 있는 강아지를 보니

그 여성분의 인사하는 표정과

깜짝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습니다.

제 마음까지 환하게 만드는 미소였습니다.

 

자칫 우리를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면

“어쩌면 저 분은 예수님을 똑같이 닮았을까!”라고 말할 겁니다.

 

감히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닮을 수는 없지만,

주인의 웃는 모습을 닮은 강아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어떤 모습/표정/특색을 닮기 원합니다.

 

“참- 예수 믿는 분 같습니다”는 얘기를

듣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하나님,

어느 한 가지라도 예수님 닮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3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삶 (7)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에 관한 말씀을 넘어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대부분의 말씀이 교회 공동체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개인의 결단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동체에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기까지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훈하면서 교회를 강조한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없지만, 교회와 더불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야 하는 기관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부부가 되면서 세워진 태초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으니,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양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완벽할 수 없습니다. 로마 교회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사소한 것(아디아포라)을 두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것을 부탁합니다. 생각과 의견이 달라도 모두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각자 서게 되고 그때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받아주고 환대하면서 한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덕”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와 다른 형제를 환대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 형제를 무너뜨려도 안 됩니다. 이처럼 공동체의 사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향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 자기의 몸까지 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갑니다. 예수님을 마음 한 가운데 모시지 않으면 진정한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차이로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의견의 차이로 분쟁하고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치명적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품어야 합니다. 자신 생각이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누군가 시험에 든다면 삼가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과 덕으로 세워가는 공동체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河-

아디아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가능하면 쉽게 설교하려고 하는데,

지난 몇 주간 헬라어가 자주 등장하면서

설교가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됩니다.

 

달리 설명하기가 어려워

고대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공부하면서 조금 ‘유식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ㅎㅎ

 

지난주에 소개한 헬라어 <아디아포라(adiaphora)>는

사실 꽤 중요한 용어입니다.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things indifferent)”,

즉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저는 설교에서

사과와 오렌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사과이지만,

제가 좋아한다고 사과가 최고라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오렌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입니다.

 

로마서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심각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인 이유로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는 것조차 꺼리고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크신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의 거짓 신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입장을 놓고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고

판단하지 말라고 지혜롭게 교훈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의 역사에서도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2.

우리 역시 <아디아포라>,

즉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는

일상의 자잘한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는 것과

중간에서 짜는 것을 두고 대판 말다툼을 벌였다는

신혼부부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돌아보면,

커다란 문제에는 쉽게 동의하면서도

오히려 사소하고 자잘한 것에 의견이 갈렸고,

그것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의 속이 그리 넓지 않아서

자잘한 것에 신경이 쓰이고, 그것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결국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디아포라>야말로 우리의 성숙함을 측정하는

아주 실제적인 척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소한 것에 대해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양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아디아포라>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멋진 하루를 만들어 봅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하나님,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27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