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3): 요한일서 4장 20-21절
Author: 참빛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올해 표어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에는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하나님 백성들의 사랑을 가리키는 특별한 헬라어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랑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히브리어 아하브는 언약/약속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약속을 지키면서 끝까지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아하브라면, 하나님 사랑이 임한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헬라어 아가페는 히브리어 아하브와 헤세드가 통합된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만 있다면, 외톨이가 됩니다. 반쪽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둘째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서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먼저 가면, 그 뒤에 이웃 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완성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짝입니다. 자칫, 신앙이 좋고 깊어질수록 하나님 사랑에 집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완성은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의 목표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합(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순환하면서 사랑을 완성해 갑니다.
무엇보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도 사랑하느니라”(요일4:21). -河-
닮은꼴
좋은 아침입니다.
1.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네”(1932년)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남자로서 아기를 가질 능력을 상실한
주인공의 부인에게 아기가 생겼습니다.
이만저만 고민이 아닙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話者)는
주인공의 친구이자 의사입니다.
의사 친구 역시 아기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고민에 휩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이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자신의 긴 발가락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기 아이라는 것입니다.
난감한 일인데,
그래도 잘 풀어졌습니다.
누구보다 고민했을 주인공이
어쩌면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2.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습은 물론 어떤 행동에서
부모를 닮은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닮으면 흐뭇합니다.
그런데 나쁜 것, 부족한 것, 아쉬운 것을
아이들이 닮았을 때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자식을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부부도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고 합니다.
말투와 표정도 닮습니다.
생각이나 생활 방식도 닮습니다.
이것도 신기한 경험입니다.
부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친한 친구도 서로 닮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를 닮게 마련입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서로 닮아가면서 인생길을 갑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렘 >은
모양이 닮은 것을 뜻합니다. 닮은’꼴’입니다.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하여튼 하나님을 닮은 것은 분명합니다.
억지로 발가락이 닮았다고 꿰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한참을 살면서 서로 닮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여기서 나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할 수 없는 근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지고 부서지고 망가졌습니다.
새해 초부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닮은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
주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15 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1월 2주 말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2): 요한일서 4장 18-19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2)
올해 우리 교회 표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맞춰서 아침마다 요한일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생명의 삶>의 진도와 맞았습니다.
요한일서는 구십이 넘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4장은 사랑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16절)고 하나님을 정의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복음서는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선포에 이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주제입니다. 성령 행전이라고 불리는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성령이 사도행전의 화두입니다.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믿음과 은혜가 바울서신의 주제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시작되면서 믿음과 은혜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서신에서 ‘사랑’이라는 화두로 신앙과 삶을 풀어갑니다. 독특한 해석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계명을 쫓아 살아야 하는데, 계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 믿음을 갖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명을 쫓아 살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온전히 믿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 글의 강령(요약,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사도 요한이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깨우쳐줍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때로는 이리저리 치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기독교와 기독교의 전통 교리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잊혀지는 시대에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복음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사도 요한의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설득력을 갖지만,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이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과 은혜의 끝에도 결국 사랑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대신, 우리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저절로 사랑이 흘러갈 것입니다. 신앙은 이 모든 것이 함께 작동하는 협력이고 순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河-
세 가지 유혹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에 읽는 요한 일서는
구십이 넘은 사도 요한의 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 걸맞게
사도 요한은 “사랑”을 갖고
신앙생활을 풀어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가치관과 분명히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고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당시 요한 일서를 처음 읽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요일2:16):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자기 몸을 위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으로 대표되는 육신의 정욕,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안목의 정욕,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을 추구하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2.
생각해 보면,
사도 요한이 말한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3:6)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이어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이생의 자랑까지 세 가지 유혹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 섞여 살면서
세 가지 유혹을 떨쳐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세상 것들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3.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이미 아시고
세 가지 유혹을 친히 당하시고 이기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인간의 몸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실 때,
마찬가지로 세 가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는, 돌로 떡을 만든 시험(먹음직하고, 육신의 정욕)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라는 시험 (보암직도 하고, 안목의 정욕)
마지막으로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권력에 대한 시험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는, 이생의 자랑).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올 한 해를 살아가면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광야의 예수님,
그리고 사도 요한이 세상의 것들이라고 정의한
세 가지 유혹을 순간순간 마주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어도
우리를 위해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말씀으로/믿음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
하나씩 내려놓고 이겨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2:18)
하나님,
세상의 대세와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8 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1월 1주 말씀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 (1): 요한일서 4장 10-11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1)
새해에는…
2026년 새해를 맞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한 살이라도 빨리 먹고 싶어서 새해를 기다렸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새해를 맞으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매우 빠르다는 상념과 더불어 겸허하게 새해를 맞게 됩니다. 그래도 새해를 맞는 설렘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이라는 말 그대로 인류 역사에서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2026년입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손에 백지가 들려진 것과 같습니다. 하얀 백지를 어떻게 채워갈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해를 맞는 우리 마음에는 기대와 더불어 두려움도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갖게 되는 필요한 긴장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새해를 맞이합니다. 우리 교회는 해가 바뀌었다고 커다란 변화를 겪는 교회는 아닙니다. 변화보다는 일상을 사는 교회입니다. 소박하고 덤덤하게 새해를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사역에 역동성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신바람이 나야 하는데,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목사인 제가 20년 넘게 우리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개성을 유지하고 신바람까지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상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 사역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또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일 예배에 신선함을 가져올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교회는 기도로 세워집니다. 바른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밤 10시는 우리 교회가 정해 놓은 기도 시간입니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할 때도 밤 10시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전도사님과 권사님들께서 저녁 기도 시간을 지키셨고, 그때 심어 놓으신 기도의 씨앗이 지금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전 교인이 저녁 10시에 시간을 맞추고 교회를 위해서, 참빛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저와 함께 신앙생활 하시는 동안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모두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성경 통독을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보에서 안내하는 순서를 따라서 올해는 성경 통독에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원하시면 통독을 위한 카톡방에 초대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쳐 주신 덕목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연속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공부하고, 한 해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을 하기보다,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실행하는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河-
2025/26 송구영신 예배
말과 함께 달리라/ 예레미야 12장 5절
두 가지 기도
Happy New Year!!!
1.
말띠 해인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경에서 “말(horse)”이 종종 등장합니다.
힘이 있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말이 끄는 전차가 대표적입니다.
구약 성경 스가랴에 나오는 네 가지 색깔의 말들은
요한 계시록에 그대로 등장하는데
세상을 정찰하고 심판하는 군대입니다.
‘말을 의지하지 말라’는 시편 말씀도 있습니다.
기마부대가 있는 이집트를 비롯한 제국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과 시합해서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갖출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렘12:5)
올 한 해
하나님 안에서 말과 경주할 수 있는
믿음과 힘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지난 주일,
예수님의 손과 발 마지막 연속 설교에서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소개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능한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한 예수님의 가상칠언은
신기하게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군병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자기를 해치는 군병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더욱 고귀합니다.
이처럼 가상칠언 첫 번째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依託)하십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세상에 사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마지막
그러나 가장 고요하고 고귀한 ‘맡김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평안(peace)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께 갈 때,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맡김의 기도>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3.
2026년 한 해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하면서2026년을 살아갑시다.
미움, 분노, 원망, 복수하려는 마음 등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용서의 기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맡김의 기도’)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한 해를 살기 원합니다.
용서하고 맡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할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시작합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주님
2026년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1 이-메일 목회 서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