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1.

히브리어 <샬롬 shalom>을

우리말로 “평화(peace)”라고 번역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고 깊습니다.

 

샬롬은,

개인의 몸과 마음의 건강, 관계, 생각, 하는 일 등

삶 전체가 부족함 없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세상)에

완전한 평화, 질서, 형통이 임해서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개인의 삶과 세상 속에서 성취된 상태가 샬롬입니다.

 

성경의 <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갈 때

하나님의 선물, 샬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역사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분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세상의 이치를

자연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을 준수할 때

구약의 샬롬과 같은 온전한 질서와 조화를

누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법(Natural Law)”이라는 용어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깃든 질서입니다.

자연, 세상,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인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을

설정해 놓으셨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모든 인류가 자연의 질서와 조화,

양심과 상식을 따르면 될 일입니다.

 

3.

요즘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구약의 사사시대처럼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나만 또는 우리 편만’ 옳은 것입니다.

 

샬롬이 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주범입니다: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질서(자연법), 자원, 능력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것을 지키고 누리면 되는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샬롬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세상에 영원한 샬롬이 임했건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힘을 쓰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새 날을 맞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우리 마음은 물론 세상에 “샬롬”이 임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로다 (시편 119:165)

Great peace have those who love your law;

nothing can make them stumble. (Ps 119:165)

 

하나님,

어지러운 세상에 주님의 샬롬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7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11)

요셉

 

<성경 속 예배자>라는 제목의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성경에 있는 예배의 모습을 개괄하려고 시작했는데, 창세기를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연속 설교가 너무 길어지기에 “창세기 속 예배자”로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어서 요셉까지 이스라엘의 조상인 창세기 족장들은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향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의 삶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면서 제국 이집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쉬임 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없으니 요셉 개인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삶을 통한 예배였습니다.

 

경호 대장 보디발 가정의 총무, 감옥의 죄수를 담당하는 총무,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집트 제국의 총리까지 요셉의 삶은 말 그대로 형통했습니다.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해몽한 바로의 꿈처럼 이집트에 7년의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는 이집트는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면서 다가올 흉년을 대비했기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형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이집트에 보내서 양식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요셉의 친동생 베냐민을 제외한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갑니다. 그리고 요셉 앞에 절을 합니다. 그렇게 어릴 적 요셉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합니다. 요셉의 형들을 가나안에서 온 정탐꾼으로 몰아 붙입니다.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형제 중 한 명은 이집트 감옥에 남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형 르우벤이 요셉을 팔아버린 것을 뉘우칩니다. 요셉은 감정이 복받쳐서 웁니다. 요셉은 곡식을 많이 주고, 받은 돈을 곡식 자루에 넣어서 돌려보냅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을 설득해서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에 갑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과 동생 앞에서 자신이 요셉이라고 밝힙니다. 그때 요셉이 했던 말이 감동적입니다:“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이렇게 형들과 화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와 화해의 삶이 되었습니다(마 5:23-24).-河-

 

삐끗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살펴보는 <성경 속 예배자>는

창세기 속 예배자로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야곱의 마지막 예배와

요셉이 드린 삶의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집트 제국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겉으로 보이게 하나님을 예배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함께 간 친구가 있었지만,

요셉은 그 커다란 제국 이집트에 혼자였습니다.

신분도 노예였으니, 조금만 삐끗해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삶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에 대한 말씀을 읽다 보면,

형들에게 은 20세겔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이

바로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집을 맡은 총무,

감옥에 갇혀서는 죄수들의 일을 관할하는 총무,

그리고 이집트 제국을 책임지는 총리로

점점 확장되면서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주일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의 맥락을 기초로 요셉의 삶을 유추하면,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매 순간 닥쳤고,

요셉이 하나님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일들도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수없이 삐끗하고, 좌절하고, 힘겹게 견뎠을 것입니다.

 

그런 날들이 모여서

창세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이 된 것입니다.

 

2.

우리 역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살아갑니다.

매우 중요하고 다급한 기도부터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는 소소한 기도까지

쉬지않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도 자주 삐끗합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기도했는데도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일은 기대만큼 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 여러 가지 신앙의 고민이 생깁니다.

 

요셉의 일상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이해되지 않는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깜깜한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불평하고 한탄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에게 임한 최고의 은혜는 “함께하심”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삐끗함을 수없이 경험하고,

스스로 시험에 들 때도 많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든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너무 쉽게 결론에 이르기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우여곡절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체험하기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삐끗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로, 삶의 예배로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하나님,

우리가 삐끗할 우리 손을 잡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30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10)

요셉

 

요셉에 관한 말씀(37-50장)은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더하다”라는 뜻을 가진 요셉은 야곱이 외삼촌을 위해서 14년을 일해서 얻은 사랑하는 부인 라헬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라헬은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막내 베냐민을 낳고 산통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정말 험하고 거칠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두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특별히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요셉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늘 곁에 두었습니다. 철이 없는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했고, 무엇보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favoritism)가 아들들의 관계를 망가뜨렸습니다.

 

한번은 요셉이 가족들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합니다. 들에 있는 볏단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였다는 꿈입니다. 가족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는 꿈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꿈을 마음에 두었지만, 요셉을 향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이 점점 커집니다.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들에서 양을 치는 형들을 찾아갑니다. 그때 형들은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말하면서, 요셉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간신히 장남 르우벤의 중재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세겔에 팔았습니다. 성인 노예의 값인 30세겔보다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집에 돌아온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들에서 짐승에게 물려서 죽었다고 거짓말합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아들들에게 까맣게 속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요셉과 관련된 일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심부름보내면서 자초한 일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이집트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서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야곱의 인생에 “속임”이라는 모티브가 떠나지 않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바로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또다시 팔립니다. 요셉은 성실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집에만 있던 요셉의 모습과 천양지차입니다. 결국 보디발의 살림을 책임지는 수석 청지기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요셉은 호소할 수가 없는 노예일 뿐입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은 성실하게 옥살이를 해서 죄수들 가운데 총무가 됩니다. 감옥에서 바로의 관리들에게 꿈을 해석해 주면서, 훗날 바로 앞에 서서 꿈을 해몽하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에 관한 말씀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요셉이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의 삶이 예배가 되었던 것입니다.-河-

 

돌베개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야곱의 예배(제사)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그를 해치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이 사는 하란에 갑니다.

한달여 걸리는 길고 험한 여정입니다.

 

어느 날 돌베개를 베고

노숙(路宿)하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닿은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가고

하나님은 사닥다리 맨에 위에 서서

장차 야곱이 받을 축복과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5)

 

잠에서 깬 야곱은

베고 자던 돌베개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야곱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기까지

절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이 가장 힘들 때 만난 벧엘의 하나님은

평생 잊지 못할 뿌리기억(root memory)이 되었을 것입니다.

 

2.

돌베개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읽으면

“그의 머리 아래 두었던 돌”입니다.

우리 말이 한결 간편하고 분명합니다.

 

야곱이 딱딱한 돌을 베고 잤습니다.

하필 왜 돌배개였을까요?

 

그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딱딱함 그 자체였습니다.

막연한 여정에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돌을 갖다가

베개로 삼고 잠을 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돌베개가

야곱이 하나님께 첫 번째로 예배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결코 예배에 쓰일 것 같지 않은 물건인데 말입니다.

 

3.

살다 보면,

무심코 곁에 두고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돌베개처럼 평범한 일상의 도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통로가 된다면 깜짝 놀랄 일입니다.

 

매일의 삶에도 돌베개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집안일과 빨래, 아이들 라이드와 식사 준비는 물론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들이 예배로 쓰일 수 있다면,

일상의 수고가 하나님을 만나는 “벧엘’이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유독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에 두고 잠들기에 너무나 딱딱하고 불편한 관계들입니다.

그런 관계마저 예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모든 관계의 지평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돌베개,

매일 머리 밑에 두어야 하는 딱딱한 현실과

때로는 억지로 품고 사는 고단한 삶의 영역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

 

하나님,

돌베개를 베고 있는 곳이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23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 속 예배자 (9)

야곱

 

야곱은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피난 가는 길에 돌베개를 베고 노숙했습니다. 야곱의 인생도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을 야곱에게 주시고, 야곱과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28:15).

 

잠에서 깬 야곱이 돌베개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첫 번째 예배였습니다. 그 밤 이후로 외삼촌 댁으로 향하는 야곱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간직하고 20여 년을 외삼촌 댁에서 지냈을 것입니다. 외삼촌에게 연거푸 속으면서도,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두 명의 부인과 그들의 여종에게서 열두 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것을 경험하는 기쁨도 있었을 것입니다.

 

외삼촌 가족과 더불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야곱의 재산과 위치가 커졌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알리지 않고 가족들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외삼촌이 야곱을 쫓아와서 따져 묻지만, 결국 화해로 마무리됩니다. 그때 야곱이 외삼촌의 일행과 잔치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20년 동안 삼촌과 조카 사이에 생겼던 앙금을 풀어내는 용서와 화해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나안 땅에 돌아온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야곱에게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이웃 부족의 땅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세겜에 살고 있는 추장이 디나를 겁탈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여서 남자들을 죽입니다(창 34장).

 

사건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 야곱은 잠잠했습니다. 간섭하지 못하는 야곱에게서 자식을 이길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입니다. 무력함에 빠져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야곱이 처음 꿈꾸었던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야곱은 가족들을 불러서 세겜에서 있었던 것들을 모두 청산하고 약속의 땅 벧엘로 올라가자고 제안합니다. 벧엘에 도착한 야곱은 회개와 결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35장).

 

하지만 야곱의 삶은 절대 녹록지 않았습니다. 심부름 보냈던 아들 요셉을 형들이 팔아버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짐승에게 물려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의 초청으로 흉년을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여정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河-

 

달나라 여행

좋은 아침입니다.

 

1.

만우절이던 4월 1일,

인간이 약 50여 년 만에 다시 달 근처까지 접근하는

아르테미스 2호 우주선이 발사되어

열흘 간의 임무를 마치고 지난 10일 지구로 귀환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까지 간

유인 우주 비행이었습니다.

우리는 평소 달의 한쪽 면만 볼 수 있는데

이번에는 달의 뒷면을 가까이서 관측하였습니다.

 

달의 궤도를 도는 동안

우주인들이 보내준 지구의 사진은

정말 아름답고 경이로웠습니다.

파란 바다와 육지, 밤과 낮의 대조가 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 우주 계획은

50여 년 전 아폴로 프로젝트와 다릅니다.

그때는 달 착륙이 목표였다면,

이번에는 달에 머무를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입니다.

 

앞으로 인류는 달에 기지를 세우고,

더 나아가 화성 탐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탐구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2.

저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고요의 바다”라고 불리는 달 표면에 착륙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았습니다.

 

우주복을 입고 둥실둥실 걸으며

달 위를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인간이 달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고,

그의 쌍둥이 누이가 달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르테미스입니다.

우주인들이 탐승한 우주선 오리온은

비극적으로 끝난 아르테미스의 연인입니다.ㅎㅎ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17명의 우주인들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이번 아르테미스 2호에는

백인 대장, 흑인 조종사, 캐나다 출신 우주인과

여성 엔지니어가 탑승했습니다.

 

NASA의 계획대로 2028년에

우주 기지 자재를 실은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다면

여성 우주인이 첫발을 내딛을 것 같습니다.

 

3.

아르테미스 2호가 지구로 돌아올 때,

대기권에 진입하는 순간이 매우 위험하답니다.

우주인들은 강한 열과 중력을 견뎌야 합니다.

 

세 개의 낙하산이 펼쳐지고

우주선이 바다 위에 안전하게 착수하는 장면을 보며

저절로 박수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번 달 탐사를 보며

지구와 달의 공전과 자전, 중력과 질서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우주가 신비했습니다.

 

만약 달과 지구의 운행이 들쑥날쑥하다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주선을 띄우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우주탐사가 가능해졌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시편 8:3-4)

 

하나님,

아름답고 신비한 세상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1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