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친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한국에서 40년지기 친구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습니다.

 

신우회에서 군대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입니다.

대학도 동기이고, 결혼도 한 달 차이로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똑같은 제복을 입고 만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제대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신우회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찬양하고 교제했습니다.

 

모임 이름도

‘험우회(險友會)’라고 지었습니다.

험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

세상은 허무하지만 믿음 안에서 의미를 찾는 친구들,

우리가 근무했던 캠프 험프리 신우회 동문이라는 뜻입니다.

 

험우들만의 결혼식 축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큰아이가 한국에서 축하연을 했을 때도

친구들이 ‘그때 그 축가’를 그대로 불러 주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라브리’를 꿈꾸기도 했고,

언젠가는 뜻깊은 일을 함께 하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5년을 함께 지내다가

저는 199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 아니어서

마음속에는 늘 그리운 친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미국을 방문하는 친구가 있거나,

제가 한국에 가면 꼭 한 번은 만났습니다.

 

이번에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친구와도

한국에 가면 만나고,

필요할 때 연락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닷새를 함께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방문했으니

여행 일정도 빼곡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의 공백을

함께 채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직업도, 삶도, 가족도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허물이 없으니

남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친구가 좋습니다.

 

2.

저는 우리 교회도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허물없는 신앙의 친구를 만나고,

훗날 다시 만나면

참빛교회 시절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옛 친구’를 만드는 공동체 말입니다.

 

글쎄요.

우리가 그 정도의 공동체인지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참빛 식구들을 다시 만나면

참 반가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야기도,

그때는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워 갑시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 17:17)

 

하나님,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2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속량 칭의 화목

지난 6주에 걸쳐서 로마서 3장 21-26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제로 공부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 밖의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 제국에 속했다는 교만함이 세상에 팽배하였습니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서 토라를 공부하고 구약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에게 창조주 하나님은 낯설었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그 무엇’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세 가지 용어를 갖고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속량(redemption)입니다. 속량은 로마는 물론 각 지역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특히, 값을 주고 노예를 사서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값을 지급하면서 소유권이 이양되는 절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주시고 우리를 사 오신 것입니다.

 

둘째는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칭의는 당시의 법정에서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던 법적 용어입니다. 무죄 판결을 받으면 법적인 문제에서 해방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을 때, 우리는 법적으로 완벽한 의인이 됩니다.

 

셋째는 화목(reconciliation, propitiation)입니다. 화목은 구약의 속죄 제사에서 비롯된 성경 즉 교회의 용어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속량, 칭의, 화목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각각의 관점에 맞춰서 당시 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용어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충분히 완성하셨습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갈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고, 복음이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할 것입니다.-河-

신실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3장 21-31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주일설교가 성경 공부를 겸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3장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한

헬라어 본문은 예수님을 주어로 삼아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저는 이번 연속 설교를

우리의 믿음보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춰서

준비했고 함께 나눴습니다.

 

2.

우리의 믿음은

솔직히 우리 마음이나 기분에 따라서 변화무쌍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른다면

그 자체가 불안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라고 번역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흔들림 없이 확실해집니다.

설교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신실하게/성실하게 모든 것을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 보았습니다.

A: 의롭게 됨. 구원

B: 예수님의 신실하심(신실하신 예수님)

C: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C)이

직접 우리를 구원(A)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을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B)입니다.

 

3.

한 엄마가

맛있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믿음으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머니 손에 들린 ‘물건’을 향한 집착입니다.

 

아이가 가질 온전한 믿음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계신 어머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머니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종종 구원을 비롯해

예수님께서 손에 들고 계신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신실하게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라,

그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하나님,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25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6)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신실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 주역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실하고 완벽하게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준비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당시 노예 시장에서 사용되던 “속량(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갖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셨습니다. 소유권이 바뀌었습니다.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지위가 놀랍게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칭의(justification)”는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장이‘무죄 판결’을 내리면, 무죄가 확정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적당히 죄를 덮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죗값을 모두 치르셨기에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 3장 25절에”화목제물(Propitiation)”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등장합니다:“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을 속죄제물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속량이 시장에서 사용되던 상업 용어이고, 칭의가 법정의 법률 용어였다면, 속죄는 구약부터 내려오는 속죄의 제사와 관련된 신학(교회) 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서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day of atonement)로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의 속죄소(언약궤 덮개)에 피를 뿌려서 죄를 사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막혔던 장막을 거둬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이 화목(속죄)제물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중요한 것도 구약의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더 이상 매년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지 않습니다(히7:27).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데 문제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카보베르데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전 세계가

북미에서 열리는 월드컵 열기로 뜨겁습니다.

 

각 지역 예선을 통과한 48개 국가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하지만,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첫 경기를 멋지게 승리로 장식하면서

이번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엊그제는 월드컵 우승 후보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과

이름부터 다소 생소한 카보베르데라는 나라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기는 예상 밖의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피파 랭킹 6위인 스페인이

67위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카보베르데(Cabo Verde, 초록빛 곶)”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구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입니다.

면적은 제주도의 두 배 정도이며,

인구는 약 50만 명 남짓입니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였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나라라고 합니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세계 지도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2.

그런데 바로 그 작은 나라가

아프리카 예선에서 조 1위를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습니다.

 

섬나라이다 보니

체계적인 프로축구 리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 섬의 우수한 팀들이 모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릴 정도의 환경입니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스페인과 카보베르데의 경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나라가

세계 최강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며 무승부를 만들어 냈습니다.

 

3.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감독을 비롯한 모든 선수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이 된 골키퍼의 선방이 뛰어났습니다.

 

또한 카보베르데 출신 부모를 둔 선수들 가운데

유럽 여러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외부의 도움으로 채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가진 스페인도

신바람이 나서 하나가 된 팀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경기를 하이라이트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채우면 됩니다.

혼자 힘들면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무엇보다 신바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생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안팎에서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편 4절)

Behold, God is my helper;

the Lord is the upholder of my life.(Ps 54:4)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8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5)

우리가 로마서 3장을 공부하면서, 생각할 것은 ‘종교의 일반적인 요소들’과 ‘기독교만의 특수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도 기복주의로 대표되는 종교의 일반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왕 예수님을 믿었다면 잘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세상에서 나름 꿈을 이루고,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기도합니다. 권사님들의 경우 육신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 자녀들의 앞길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세상의 대부분 종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종교의 일반적인 모습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3장이 이것을 자세하게 안내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우쳐줍니다. 세상은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정도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둘째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안에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밖에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는 물론 자신의 죄를 놓고 씨름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셋째로, 죄를 해결하는 방식도 특별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홀로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노력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집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구원의 집의 현관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현관을 통과해서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문(열쇠)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 놓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집을 세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배우는 “칭의(justification)”와 “속량(redemption)”으로 우리와 세상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분하게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구원의 집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요 선물입니다. -河-

맡아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다니던 직장을 접고 목회의 길로 들어오면서,

몇 가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제가 섬기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각박합니다.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앞서고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제가 꿈꾸는 교회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핑계가 아니라

대형 교회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사람 냄새가 나고, 정겹고

목사인 제가 한 분 한 분을 친밀히 섬길 수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났고,

우리 교회에서만 21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교회는 맞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를 이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그룹도 시도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진행하지 못했구요.ㅠㅠ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교회가 좋다” “교인들이 좋다”고

말씀하실 때는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아마 저의 목회는

이 정도에서 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2.

지난 토요일 아침기도회에서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은

제가 꿈꿨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각각의 자리와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지체도 크거나 작지 않고, 강하고 약하지 않습니다.

모두 소중합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머리가 발에게 “너는 쓸모가 적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구절이 감동입니다.

우리 몸에서 머리가 최고인데

땅을 밟고 다니는 저 끝의 발을 무시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도리어 약한 지체에게 힘을 실어주고

부족한 것을 대신 맡아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3.

지난번 주일 예배에서 나눴던

가인과 아벨의 말씀에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 4:9)라는

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에게 서로 지켜주고

서로를 맡아주는 형제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서로 지켜주고 맡아주는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위로와 힘, 격려와 도전이 끊이지 않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6)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의 참맛을 느끼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