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6)

로마서 14-15장은 앞에서 제시한(12-13장)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앞에서는 그리스도인 개인이 드리는 예배부터 시작해서 공동체와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모범답안을 알려주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릅니다. 로마 교회에는 믿음이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어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도 모든 사람을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강한 자는 물론 약한 자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 서로 비판하지 말고 받아 주어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서 이뤄지는 성도 간의 환대입니다.

 

로마 교회에 있었던 두 그룹의 갈등에 대한 교훈이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됩니다. 서로 받아 주는 것을 넘어서,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형제가 걸려 넘어지면 안 됩니다. 절대로 일부러 걸려 넘어지게 만들면 안 됩니다.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특히 음식을 놓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확신을 갖고 먹으면 됩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단지, 그것으로 인해서 형제가 시험에 들고, 근심하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니 먹고 마심의 기준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형제에게 있습니다. 형제를 위한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떳떳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도 ‘의’에 관련된 것입니다. 평강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이어서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중요합니다. 서로 받아주고 배려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때 희락(기쁨)이 임합니다.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섬기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개인의 신앙은 물론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흔들거나 넘어뜨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서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도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사랑과 섬김이 덕을 세웁니다. 각자 믿음으로 행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河-

그림자 자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호머의 <오디세이>와 연결해서

우리가 배우는 로마서의 환대(hospitality)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디세이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낯선 손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크세니아 Xenia>라고 했습니다.

 

<크세니아>는 오디세이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제우스의 법으로 여겨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환대 방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듯이,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 신이 낯선 사람으로

변장해서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일에 나눈 로마서 12장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의

“손님 대접”에는 “필록세니아(philoxenia)”라는 헬라어가 쓰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의 <크세니아>가 사회적인 규범이라면,

로마서의 <필록세니아>는

낯선 나그네를 친구처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기꺼이 베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실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는

언제나 세상의 기준보다 높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가능성을 보십니다.

 

2.

설교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찬송을 마치고 기도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낯선 손님을 짧게 언급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스스로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내면의 모습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습니다.

어릴 때부터 겹겹이 쌓여 있는

억압된 분노, 질투, 절망, 미움 등등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낯선 나를 받아주어야 합니다.

환대해야 합니다. 그것도 나의 한 모습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한 부분이기에 일단 받아들인 후에

그것을 긍정적으로, 창의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그림자, 나의 연약함, 나의 상처받은 자아,

그리고 감추고 싶은 모습들까지

내 안에 있는 낯선 손님(그림자 자아)을

내가 먼저 받아주고 환대하지 않으면,

밖에 있는 낯선 손님들도 진심으로 환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도 아시고 품어 주십니다.

그림자 자아, 낯선 모습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통째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숨겨진 낯선 자아까지도 품길 원합니다.

 

가슴에 두 손을 포개고

“아무개야, 사랑해.”라고 진심으로 말해봅시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20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5)

로마서 12장부터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말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12-13장은 예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12:1-2).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 다음은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었습니다(12-3-13). 믿음의 분량대로 받은 은사를 갖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웁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교훈합니다(12:14-21). 핍박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합니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완성입니다. 세상의 권력자와 정부에 대한 교훈도 있었습니다(13:1-7). 선과 악을 심판하고 세상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들에게 협조하고 시민으로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13:8-10).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의 빚을 무한대로 늘려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됩니다(13:11-14).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모든 답안을 알려주었다면,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14-15장에서는 로마 교회는 물론 로마 제국 안에 세워진 초대 교회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구약의 율법을 알고 지키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개종한 이방인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라는 성격상 교회에서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먹거리와 안식일을 비롯한 절기를 지켰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들을 믿음이 약한 자라고 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고, 바울은 이들을 믿음이 강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생각과 생활 방식을 두고, 옳고 그름을 가리면서 각자 자기들이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서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판단하고 분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 있다면, 서로 존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河-

사랑의 빚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 우리는

로마서 13장 8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세상의 빚은 부담이 되고

절제와 통제가 필요하지만,

사랑의 빚은 무제한입니다.

끝없이 갚아야 하고

때로는 끝없이 빌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평생 갚아도 불가능한 사랑의 빚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예수님께 받은 사람을 갚아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게 베푸는 이웃 사랑입니다.

 

2.

여기서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인데,

실제로 우리는 이기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자녀 자신이 아니라

한때 부모가 꿈꾸던 모습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애(自己愛)를 자녀에게 적용해서

자기가 바라는 자녀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의 대상은 자녀가 아니라

아이 안에 비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내 기대를 벗어나는 순간 사랑이 식는다면,

그것은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던 상대, ‘내 그림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사랑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다른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도 이유도 없는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 5:8).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사랑의 빚도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어야 합니다.

 

내 의지나 바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의 속앓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도 필요합니다.

힘든 만큼 가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 사람 안에 비친 나를 사랑하는지

잠시 멈춰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봅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10)

 

하나님,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참된 사랑의 빚을 지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13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4)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하나님 백성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특별히 임한 사랑입니다.

 

지난번에 공부한 로마서 12장에서도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사랑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9-10).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두는 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아가페”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훈하는 로마서 말씀(12-15장)한 가운데 위치한 클라이맥스입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모든 율법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전한 말씀의 핵심 메시지라고 하셨습니다 (마 22:37-40).

 

사도 바울은 십계명의 네 가지 계명을 예로 들면서(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모든 계명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함부로 몸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습니다. 남의 물건을 뺏지 않고 탐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런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8절). 구약의 율법에서는 빚지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동족에게 돈을 꾸어 주면, 이자를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종이 될 수 있지만 희년이 되면 풀어주어야 했습니다.

 

사랑의 빚은 예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한 정부에 세금 납부의 의무가 있듯이(13:7),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빚을 지고, 빚을 갚으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 이어진 말씀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믿음의 분량대로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한 권력에 협조합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정결함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단정히 행하고, 육신의 일이 아닌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河-

조심조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종종 우리의 삶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변수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루하루 주어진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어려움이 다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수와 경솔함 때문에

스스로 어려움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올해

이정후 선수와 함께 외야 수비를 책임지기 위해 영입된

헤리슨 베이더 선수 이야기였습니다.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그는

새벽에 술을 마신 뒤 스쿠터를 타다가

소방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학 시절에도 같은 사고를 낸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이언츠 구단은

베이더의 올해 남은 연봉과 내년 연봉까지,

천만 불이 넘는 금액을 동결했습니다.

계약 해지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베이더의 경솔함이

선수 인생을 흔드는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작은 부주의가 쌓이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생각보다 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3.

새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일도 있고,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요.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은

한 번 더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경솔하면 안 됩니다.

 

매사를

한 번 더 고민하고 살피면서

새달 8월(영어의 August는 ‘늘리다, 성장하다’라는 헬라어에서 옴)을

멋지게 보내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그러나 ‘조심조심’ 지혜롭게 살아갑시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잠언 4:26)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