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의 반전 (호서대 안근조 교수): 요나서 3장 3-5절
Author: 참빛
우리 교회는…
오늘은 그동안 교회를 섬기며 수고해 주신 은퇴 권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교회는 집사나 권사라는 직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직책 때문에 더 대우하거나, 직책이 없다고 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역할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지난 수년 동안 권사님으로 교회를 섬겨 주신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원로 권사님으로 무엇보다 기도로 교회를 더 많이 섬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영육 간에 강건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세 분의 집사님을 새로 세웁니다. 입교(등록) 후 2년이 지나면 신천집사로, 다른 교회에서 집사로 섬기셨다면 1년 후 이명 집사로 임명합니다. 집사가 되기 위한 절차가 복잡하지 않고, 집사님으로 해야 할 의무도 특별히 강조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힘닿는 대로 교회를 섬겨 주시길 부탁드릴 뿐입니다. 올해 임명되신 세 분 집사님을 통해 우리 교회가 더욱 근사하게 세워 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는 은혜로 여기까지 왔지만, 팬데믹 이후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작은 교회가 더욱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럴수록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길이 귀합니다. 함께 교회를 세워 가시는 임원들이 계시고, 참빛 식구들이 계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사역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고, 사역의 조건과 환경도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거에 머물러 있기보다,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고 필요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무리한 교회 사역이나 활동은 자제하겠습니다. 자원하는 손길이 있을 때,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겠습니다. 자칫, 교회가 조용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리 교회의 특징이 된다면, ‘일상을 사는 교회’로 근사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교회에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쏟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일에 함께 교제하면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하나님 사랑이라면, 성도의 교제는 이웃 사랑입니다. 주일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그 힘으로 천국과 같은 가정을 세우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물론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섬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행사와 활동을 자제해도 기본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습니다. 각자의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지만, 그 섬김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과 보람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한마음과 한뜻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멋진 교회를 세워갑시다.-河-
여백
좋은 아침입니다.
1.
나이가 들다 보니 옛날 일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설교 시간에 제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중학교 때 아주 무서운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외모는 물론 말투까지 무서웠습니다.
잘못 보이면 체벌도 가하셨습니다.
미술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겁을 먹고 잔뜩 긴장했습니다.
숨을 죽인 채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시키시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동양화 국전에
응모하실 정도의 실력자셨습니다.
하루는 수묵화 난초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대충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난초 하나하나 순서대로 그려야 했습니다.
숨을 죽이고 난초 몇 가닥을 그리고 났더니,
선생님께서 갑자기 크게 웃으시면서,
난초 그림에는 “여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어리둥절했고,
화를 내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2.
무서우셨던 미술 선생님이 생각나서
사군자 난초 그림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지금 보니 시골 아이들에게
사군자 기초를 정확히 연습시키셨습니다.
난초 줄기가 5개 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화선지가 모두 여백입니다.
저희는 난초를 그리는 데 온 정신을 쏟았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그린 그림 속에서
여백을 먼저 보셨던 것입니다.
미술 선생님처럼 우리 조상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종이를 가득 채우기보다 ‘여백’을 남겨 놓았습니다.
수양버들처럼 멋있게 그린 난초도 중요하지만,
난초보다 훨씬 넓은 여백을 보고 즐긴 것입니다.
3.
어느덧 1월이 모두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도 새해 첫 달이 지나간 것처럼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 삶은 더 빠르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누가 당기는 것 같고
뒤에서는 누군가 밀고 있는 느낌으로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쉬면 안 될 것 같은 압박 속에서의 쉴 틈 없는 삶입니다.
‘여백’을 말하는 것이 사치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새해 첫 달을 마무리하면서
‘여백’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립니다.
난초 다섯 줄기가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다섯 개여서 더 넓어진 여백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2026년의 한 달이 지나갔을 뿐입니다.
남겨진 여백을 이용해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여백도 남겨 놓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삶은 물론 신앙의 여백을 즐깁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하나님,
여백이 있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29 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1월 4주 말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4): 사도행전 10장 1-2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4)
올해 표어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익숙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박애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이해됩니다.
지난주에 배웠듯이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증명하고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비해서 이웃 사랑을 생각하면 부담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경건의 실천들입니다. 왠지 거룩해 보입니다. 기도와 말씀 읽기, 예배 참석과 같은 하나님 사랑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랑은 상대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넘어서는 행함입니다. 그러니 부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고넬료가 ‘경건’하였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별해서, 유대교에 입문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신들과 황제를 섬겼던 고넬료가 이스라엘에 파견 나와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만 잘 믿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였습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라면 식민지에 있는 백성들을 압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자기가 다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춥고 배고팠습니다. 힘겹게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살펴본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마저 힘겹게 사는 백성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이용하였는데,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백성들을 도왔습니다. 구약 성경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으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각각 환상을 보여주셔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이방인이 되는 데 손색이 없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고넬료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에 감동을 받습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河-
분별력
좋은 아침입니다.
1.
1980년대 미국에 이민 와서
정착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2020년)는
초기 이민 선배들의 강인한 삶을 잔잔히 소개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 부모님의 직업이
병아리 감별사입니다.
병아리가 부화되자마자
수컷과 암컷을 구분해 내는 일로,
이 분야에는 우리나라가 탁월하답니다.
매우 세밀하고 빠른 판단이 요구되는 직업인데,
한국인 특유의 꼼꼼함과 신속함을 따라올
병아리 감별사가 세계에 없는 셈입니다.
알을 낳는 암컷 병아리만 남기고
수컷 병아리를 감별해서 제거한다는 점에서
동물학대 논란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영화에 나오듯이
1980년대 이민오신 분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지금도 비교적 높은 소득이 보장된답니다.
2.
갓 부화한 병아리의 암수를 구별해 내는 일은
손끝의 섬세한 감각과 순간적인 판단이 필수입니다.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 지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흐려졌습니다.
자기 생각은 옳고 남의 생각은 틀리다는 식입니다.
내 편은 옳고 남의 편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합니다.
객관적인 기준은 사라지고
각자의 이익과 관심에 맞춰서 판단합니다.
세상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에 보면 설교들이 넘쳐나고,
같은 성경 본문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는 나은 편입니다.
신앙이나 성경 해석을 다룬 유튜브들을 보면,
마치 자신만이 옳다는 듯한 제목을 내걸었습니다.
알고리즘으로 독자의 관심에 맞춰서
자동적으로 영상을 배열을 해주기에,
자칫 잘못된 것을 계속 듣고 보면서
그릇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위험성도 큽니다.
3.
이제는 더욱 세심한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옳은 정보와 잘못된 정보,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를
구별(감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내용도
세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성경적’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도 세상의 정보는 물론,
신앙에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헷갈려서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민 선배들이
병아리의 암컷과 수컷으로 세심하게 감별했듯이,
수많은 정보 가운데
올바른 정보를 감별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0)
하나님,
분별의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22 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1월 3주 말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3): 요한일서 4장 20-21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올해 표어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에는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하나님 백성들의 사랑을 가리키는 특별한 헬라어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랑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히브리어 아하브는 언약/약속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약속을 지키면서 끝까지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아하브라면, 하나님 사랑이 임한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헬라어 아가페는 히브리어 아하브와 헤세드가 통합된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만 있다면, 외톨이가 됩니다. 반쪽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둘째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서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먼저 가면, 그 뒤에 이웃 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완성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짝입니다. 자칫, 신앙이 좋고 깊어질수록 하나님 사랑에 집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완성은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의 목표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합(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순환하면서 사랑을 완성해 갑니다.
무엇보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도 사랑하느니라”(요일4:21). -河-
닮은꼴
좋은 아침입니다.
1.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네”(1932년)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남자로서 아기를 가질 능력을 상실한
주인공의 부인에게 아기가 생겼습니다.
이만저만 고민이 아닙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話者)는
주인공의 친구이자 의사입니다.
의사 친구 역시 아기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고민에 휩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이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자신의 긴 발가락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기 아이라는 것입니다.
난감한 일인데,
그래도 잘 풀어졌습니다.
누구보다 고민했을 주인공이
어쩌면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2.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습은 물론 어떤 행동에서
부모를 닮은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닮으면 흐뭇합니다.
그런데 나쁜 것, 부족한 것, 아쉬운 것을
아이들이 닮았을 때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자식을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부부도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고 합니다.
말투와 표정도 닮습니다.
생각이나 생활 방식도 닮습니다.
이것도 신기한 경험입니다.
부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친한 친구도 서로 닮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를 닮게 마련입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서로 닮아가면서 인생길을 갑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렘 >은
모양이 닮은 것을 뜻합니다. 닮은’꼴’입니다.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하여튼 하나님을 닮은 것은 분명합니다.
억지로 발가락이 닮았다고 꿰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한참을 살면서 서로 닮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여기서 나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할 수 없는 근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지고 부서지고 망가졌습니다.
새해 초부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닮은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
주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15 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1월 2주 말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2): 요한일서 4장 18-19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