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빛이라

에고 에이미 (2)

 

“에고 에이미(I am)” –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일곱 가지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시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떡은 예수님의 몸(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그의 몸을 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사랑이요 희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두 번째 “에고 에이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입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빛은 어두움의 반대입니다. 어두움은 또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음을 몰아낼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백성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기적 자체를 넘어서 기적이 주는 교훈을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생명의 떡으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셨을 때도 말씀하신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맞아서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에 해당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습니다. 초막절에는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서 제단에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초막절이 끝날 즈음, 성전에 물을 붓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여기서 생수의 강은 실로암 연못의 물을 넘어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낮에는 제단에 물을 붓는 예식을 행하였다면, 밤이 되면, 성전에 불을 밝혔습니다.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8:20), 성전 헌금함은 여성들까지 들어갈 수 있는 여성의 뜰에 있었고 이곳에서 초막절 불을 밝혔습니다. 초막절이 끝나니 불이 꺼졌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밤에 불을 켜는 예식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전통이었습니다(슥 14:7-8). 무엇보다 빛에 대한 성경 말씀은 곳곳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예고한 빛이 세상에 오셨음을 예수님께서 알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어두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한 책의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쉽게 읽히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용이 어렵고 시대 상황과 동떨어졌습니다.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글이나 영상들이 넘쳐나니

성경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하나님께서 현대에 맞는 성경을 다시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즘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을 비롯한 예언서입니다.

거칠고 어렵습니다.

비슷한 심판 예언이 반복되고,

공개적으로 읽기 난감한 대목도 있습니다.

 

그래도 40대 이상은 성경에 친숙합니다.

성경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30대 이하로 내려가면 성경은

이상한 책일 수 있습니다.

번역은 어렵고, 문장은 낯설며,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듭니다.

흥미를 잃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해석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저는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 훈련을 받아왔고

(역사비평, historical criticism)

여전히 역사적 읽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상력을 동원한 본문 해석,

독자를 고려한 성경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더 깊은 실력과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과업입니다.

 

하지만 요즘 각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춘 마니아(mania)들을 보면서,

성경을 사랑하는 마니아들도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가슴에 품고 씨름하는 성경 덕후들이지요.

성경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하며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2.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homo unis libro, a man of one book)”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한 책”은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성경만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책을 사랑하는 진정한 독서가였습니다.

원시 의학에 대한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세상에 일만 가지 책이 있어도

성경이 그 가운데 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같은 성령이 역사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웨슬리가 활동하던 19세기도 오늘날에 못지않게

이성과 과학은 물론 산업혁명까지

성경보다는 세상 학문과 기술문명이 인기를 끌 때였습니다.

 

그러니, 웨슬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

성경의 진수(眞髓)를 맛보았고 경험한 것입니다.

 

혹자가 “요즘 세상에 누가 성경을 읽겠습니까?

그냥 갖고 있는 책이지…”라고 말한다면,

“아니요, 우리는 여전히 성경을 사랑하고 읽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이 아무리 어렵고 읽기가 곤란해도

그냥 한 책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8)

 

 

하나님,

주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8.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생명의 떡이라

에고 에이미 (1)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일곱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I am)”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소개하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sign)과 함께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시는 요한복음의 “에고 에이미”를 한 가지씩 살펴볼 예정입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출3:14)라고 하신 것과 맞물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에고 에이미”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 6:35)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71절이나 되는 매우 긴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이 뜻하는 의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적에 이어서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말씀(해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어린아이가 갖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먹거리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신기한 물(magic water)을 구한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신기한 떡(magic bread)을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뜨십니다.

 

이튿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을 주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그리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백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먹고 마시는 것, 즉 세상의 물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셔서 백성들을 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그를 믿는 자를 위해서 내주시는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河-

진실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 쫓는 것)와

진실을 버린 모습을 질타합니다.

 

에스겔서뿐만 아니라

구약 예언서에서 알려주는 네 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진실(에메트), 정의(미쉬파트), 공의(차디카), 인애(헤세드)입니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솔직함입니다. 정직함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고, 꾸미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한 모습으로

심지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웃과 다른 사람 앞에서

숨김없이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진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진실은

그 다음 세 가지 덕목의 기초가 됩니다.

정의는 거짓 재판을 없애고, 공평하게 판정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편에 서면 진실과 정의는 실천됩니다.

공의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똑바로 정돈된 상태입니다.

하늘 향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함이 곧 공의입니다.

진실이 빠진 인애(사랑)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곧 참사랑입니다.

 

2.

요즘 세상은 진실이 많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짜가 판을 칩니다. 거짓말이 진실을 덮고 있습니다.

유튜브 쇼트가 자꾸 올라오는데,

진짜 같은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자연재해도 가짜로 만들어서 올리는데

진짜 같아서 깜빡 속을 때도 있습니다.

 

가짜 정보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짜일수록 화려하고 그럴듯하기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심지어 마음과 생각을 속입니다.

 

AI가 발달하면서,

진짜 같은 가짜가 더욱 많아질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매의 눈을 갖고 살피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진실하길 원합니다.

참됨이 거짓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 없기를 바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흠과 티가 많아서 주름이 깊어도

솔직하길 원합니다.

 

생명과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3:3-4)

 

하나님,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1.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6)

시편 27편을 통해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정확한 확인은 어렵지만,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우리 마음에는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쁜 늑대는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열등감 좌절을 가져다주고, 선한 늑대는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겸손함 관대함 신뢰를 선물한다고 했습니다. 손자가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의 현명한 대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틈틈이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지 점검했고,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오면 제가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었음을 반성했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지혜였습니다.

 

팔로 알토에서 목회했던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의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계십니다(God is closer than you think)>는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여기서 목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일까지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재정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부자들을 질투하고 자신의 삶을 비관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어려운 중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냅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을 부려 먹습니다. 다른 사람은 동료들의 만족과 성장을 위해서 함께 노력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실존 인물이었던 존 내쉬(John Nash)의 인생을 소재로 삼은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라는 영화도 소개합니다. 피해망상증을 앓았던 주인공은 있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고, 두려움에 떨며 살아갑니다. 수학자였던 내쉬가 국방부의 군사 작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누군가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가운데서도, 좋은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이뤄낸 업적이었습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뷰티플 마인드가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경청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라고 답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 때 마음과 생각이 변화됩니다. 우리에게 “뷰티플 마인드”가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강을 누릴 때입니다(롬8:6).-河-

완벽함 넘어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1일 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완벽주의의 고통(The Pain of Perfectionism)”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완벽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의기소침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소화불량이나 통증처럼 몸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심리학자 프렛(Frett)과 휴잇(Hewitt)은

완벽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자기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

2) 타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

3) 사회가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한다고 느끼는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는

완벽을 위해서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자기 안에 작은 단점이라도 발견되거나,

무심코 실수해도 자신을 탓하고 심한 우울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한시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잔혹하고 지루한 독백자”라고 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완벽주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삽니다.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는 더 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불완전함이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벌을 주거나 화를 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완벽을 요구하면,

결혼생활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마음에 맞추려고 하니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는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쉬운 요즘 세상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삶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2.

평생 완벽주의를 연구한 프렛과 휴잇은

완벽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가치(mattering)”에 집중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의 가치는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귀한 겁니다. 내가 자랑스러운 겁니다.

 

완벽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단순히 기준을 낮추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준만 낮췄을 뿐 여전히 완벽주의에 얽매일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결함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기사를 읽으면서,

요즘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습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42세에 생을 마감한 예도 있었거든요.

 

존재의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더욱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벽주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완벽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갑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Mat 11:28)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1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