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6): 로마서 3장 25-26절
Author: 참빛
그리스도의 복음 (6)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신실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 주역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실하고 완벽하게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준비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당시 노예 시장에서 사용되던 “속량(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갖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셨습니다. 소유권이 바뀌었습니다.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지위가 놀랍게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칭의(justification)”는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장이‘무죄 판결’을 내리면, 무죄가 확정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적당히 죄를 덮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죗값을 모두 치르셨기에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 3장 25절에”화목제물(Propitiation)”이라는 중요한 용어가 등장합니다:“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을 속죄제물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속량이 시장에서 사용되던 상업 용어이고, 칭의가 법정의 법률 용어였다면, 속죄는 구약부터 내려오는 속죄의 제사와 관련된 신학(교회) 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서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day of atonement)로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의 속죄소(언약궤 덮개)에 피를 뿌려서 죄를 사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막혔던 장막을 거둬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이 화목(속죄)제물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중요한 것도 구약의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더 이상 매년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지 않습니다(히7:27).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데 문제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카보베르데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전 세계가
북미에서 열리는 월드컵 열기로 뜨겁습니다.
각 지역 예선을 통과한 48개 국가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하지만,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첫 경기를 멋지게 승리로 장식하면서
이번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엊그제는 월드컵 우승 후보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과
이름부터 다소 생소한 카보베르데라는 나라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기는 예상 밖의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피파 랭킹 6위인 스페인이
67위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카보베르데(Cabo Verde, 초록빛 곶)”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구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입니다.
면적은 제주도의 두 배 정도이며,
인구는 약 50만 명 남짓입니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였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나라라고 합니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세계 지도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2.
그런데 바로 그 작은 나라가
아프리카 예선에서 조 1위를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습니다.
섬나라이다 보니
체계적인 프로축구 리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 섬의 우수한 팀들이 모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릴 정도의 환경입니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스페인과 카보베르데의 경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나라가
세계 최강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며 무승부를 만들어 냈습니다.
3.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감독을 비롯한 모든 선수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이 된 골키퍼의 선방이 뛰어났습니다.
또한 카보베르데 출신 부모를 둔 선수들 가운데
유럽 여러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외부의 도움으로 채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가진 스페인도
신바람이 나서 하나가 된 팀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경기를 하이라이트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채우면 됩니다.
혼자 힘들면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무엇보다 신바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생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안팎에서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편 4절)
Behold, God is my helper;
the Lord is the upholder of my life.(Ps 54:4)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8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6월 2주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5): 로마서 3장 23-24절
그리스도의 복음 (5)
우리가 로마서 3장을 공부하면서, 생각할 것은 ‘종교의 일반적인 요소들’과 ‘기독교만의 특수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도 기복주의로 대표되는 종교의 일반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왕 예수님을 믿었다면 잘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세상에서 나름 꿈을 이루고,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기도합니다. 권사님들의 경우 육신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 자녀들의 앞길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세상의 대부분 종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종교의 일반적인 모습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 3장이 이것을 자세하게 안내합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우쳐줍니다. 세상은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정도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둘째로,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안에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밖에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는 물론 자신의 죄를 놓고 씨름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셋째로, 죄를 해결하는 방식도 특별합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홀로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노력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집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구원의 집의 현관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현관을 통과해서 구원의 집에 들어가는 문(열쇠)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 놓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집을 세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배우는 “칭의(justification)”와 “속량(redemption)”으로 우리와 세상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분하게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구원의 집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요 선물입니다. -河-
맡아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다니던 직장을 접고 목회의 길로 들어오면서,
몇 가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제가 섬기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각박합니다.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앞서고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제가 꿈꾸는 교회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핑계가 아니라
대형 교회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사람 냄새가 나고, 정겹고
목사인 제가 한 분 한 분을 친밀히 섬길 수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났고,
우리 교회에서만 21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교회는 맞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를 이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그룹도 시도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진행하지 못했구요.ㅠㅠ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교회가 좋다” “교인들이 좋다”고
말씀하실 때는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아마 저의 목회는
이 정도에서 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2.
지난 토요일 아침기도회에서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은
제가 꿈꿨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각각의 자리와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지체도 크거나 작지 않고, 강하고 약하지 않습니다.
모두 소중합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머리가 발에게 “너는 쓸모가 적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구절이 감동입니다.
우리 몸에서 머리가 최고인데
땅을 밟고 다니는 저 끝의 발을 무시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도리어 약한 지체에게 힘을 실어주고
부족한 것을 대신 맡아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3.
지난번 주일 예배에서 나눴던
가인과 아벨의 말씀에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 4:9)라는
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에게 서로 지켜주고
서로를 맡아주는 형제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서로 지켜주고 맡아주는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위로와 힘, 격려와 도전이 끊이지 않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6)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의 참맛을 느끼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1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6월 1주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4): 로마서 3장 23-24절
그리스도의 복음 (4)
로마서 3장 말씀은 물질이 최고인 요즘 세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잘되고 장수하며 하고 싶은 일을 즐기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알려주는 행복은 세상의 것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의 복음을 공부하면서도 감동이나 깨달음이 적은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선포하는 복음이 우리의 마음에 직접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효능감도 떨어집니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밝히 알고 깨닫는 신앙의 안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며 그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한 교만이 하나님보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더 높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3:18-3:20)에 의하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와 같은 훌륭한 신앙인들이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인간과 세상 깊숙이 자리 잡은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라는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인간의 실존을 다시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앞에 이를 가능성과 능력이 이미 상실되었기에,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의롭게 됩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자격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그 영광에서 멀어졌습니다. 죄의 힘과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河-
메꿔감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어떤 글을 쓸 때,
우선 초고(draft)를 가능한 한 빨리 작성해 놓습니다.
조금 부족하고 서툴러도
초고를 끝내 놓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번 읽으면서
중간중간 필요한 것을 메꿔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작성할 수 있으면
시간도 절약하고 일찌감치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한 번에 글을 완성하려다가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시간만 허비하고
마감 날짜에 허둥지둥할 때가 많았습니다.
2.
저의 이런 습관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작성하면서 생겼습니다.
3년 만에 필요한 모든 수업을 듣고
종합시험까지 통과했습니다.
목회하고 있었고
교회도 계속 문제가 있었기에
논문을 남겨놓고 거의 6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제 지도교수님께서
시간을 정해 주시면서
논문 초고를 완성해서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문 통과는 불가능하다고 겁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6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하고 책만 읽었다면
마지막 1년은 교수님의 엄한 명령에 순종해서
초고를 완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초고가 완성되니
교수님께서 코멘트하신 것을 위주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가면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생각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을 때가 다반사입니다.
완벽하게 하려고 고민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실제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겠다는 다짐보다
우선 무릎 꿇어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초벌구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메꿔가면 됩니다.
채워가고, 완성해 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새달 6월을 맞았습니다.
미뤄두었던 것을 시작하고 실행해 옮겨봅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16:3)
하나님,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4이-메일 목회 서신)
2026년 5월 5주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3): 로마서 3장 21-22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