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창세기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 짠한 생각과 함께 깊이 공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입니다.

요셉이 이집트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합니다.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자, 야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이가 얼마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9)

 

“험악한 세월”에 쓰인 히브리어 <라아>는

“악(evil)”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의 “험악한 세월”이라는 번역이 매우 적절합니다.

 

야곱의 답변은

130년 동안 살면서 겪은 고단한 인생 여정, 그 험악한 세월이

그의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새겨졌다는 뉘앙스로 읽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의 삶은 거칠고 험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뒤 도망쳐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14년을 종처럼 살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짓 소식에 수십 년을 속고 살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긴 것이었지요.

 

흉년이 닥치자, 양식을 구하러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도 막내 베냐민을 보내야 한다는 일로 마음고생 합니다.

이집트에 총리로 있던 요셉을 만나는 과정도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인생 말년에 이집트로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지냅니다.

짐승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난 것으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타향살이입니다.

 

말 그대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그의 인생이 그의 모습에 그대로 새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끝까지 견뎠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던 ‘이스라엘’답게 꿋꿋이 견뎠습니다.

 

2.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희로애락을 모두 겪으면서 걷는 인생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설교나 간증이

‘나’에게 임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런 말에 감동하는 횟수도 뚝 떨어졌습니다.

 

대신, 조상들에 비하면 나이가 많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이집트 바로 앞에서 솔직히 말하는

야곱의 고백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깊이 공감됩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고난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지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고난을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행여나 기죽지 말고,

꼿꼿하게 걸어갑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시편28:7)

 

 

 

하나님,

견딜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5.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 (3)

속죄(Atonement)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 율법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알려주신 율법에 따라 양이나 염소 또는 소 등으로 속죄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제물에게 죄를 전가(transfer)하고, 생명을 뜻하는 피를 제사장이 제단에 뿌림으로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어린양 예수라는 표현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과 연결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once and for all)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에서 요청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그 육체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엡2:14).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진 것을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속죄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와 캘빈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부터 면제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교리입니다.

 

오리겐을 비롯한 초대 교부들이 주장한 속전설(ransom theory)도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누군가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 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교리입니다.

 

만족설(satisfactory theory)도 있습니다. 11세기 영국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름이 제안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채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해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이었던 인간이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모범이 되었다는 교리,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선포라는 교리까지 속죄의 교리는 다양합니다.-河-

투덜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 묵상 본문이 구약성경 민수기입니다.

민수기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성경 타이틀이

“광야에서”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뽑아,

40일 동안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지도자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부정적인 의견에 동조했고,

결국 40일을 햇수로 계산한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몸소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내내

불평과 불만, 원망을 달고 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직후,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자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와서 죽게하느냐”고

모세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출14)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는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집트에 있을 때는 고기를 배불리 먹었는데,

굶어 죽게 생겼다고 불평했습니다(출16).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에 있을 때는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 마늘”을 충분히 먹었다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민11).

여기서 참외는 멜론 종류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1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40년 광야 생활 끝에 도달한 2세대조차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불평과 원망의 끝판왕이 되었습니다.

 

2.

불평과 불만은 비교해서 비롯됩니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사정이 나쁘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대한 것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생길 때도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불평과 불만의 지경이 꽤 넓어서

상황과 환경, 친지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불평까지 총망라됩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사는 ‘투덜이’입니다.

 

불평과 투덜거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감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희망 가운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헤아릴 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과 불만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표시임도

꼭 기억하고 잊지 맙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하나님,

오늘 하루 불평없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8.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 (2)

십자가의 도(道)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구약의 율법이 요청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하신 사역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소 등의 제물을 준비하고 자신들의 죄를 양이나 소에게 전가(전가 transfer)한 후에, 제물을 죽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준비한 제물을 제사장에게 갖고 가면, 제사장은 생명의 상징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제물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번 이런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사야 53장에 예언한 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나무에 매달아 죽는 것이 저주의 상징인 신명기 말씀(신21:22-23)처럼 저주받은 사람들이 죽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손과 발에 못 박힘, 군인들의 채찍에 온 몸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사역은 구약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효력이 있는 속죄 사역을 완벽히 마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장에게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해방됩니다.

 

우리는 예사롭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혜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듯이 성전 제사는 끝나고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경험했고 믿기 전과 후의 실제적인 변화를 고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합니다:“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오늘 본문에서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였습니다.

 

죄인들이 죽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만을 알겠다고 말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속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물론  초대교회에게서 십자가는 신앙의 핵심이었고 생명이었습니다. -河-

품격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정기 검사를 위해서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를 합니다.

 

제 의사는 약간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인 것을 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보적인 면은 탐탁지 않지만,

그는 매우 서민적인 훌륭한 분이었다고 칭찬합니다.

개신교 목사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경받을 분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2.

지금부터 12년 전입니다.

교황이 연설하는데,

한 아이가 교황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의치 않고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교황이 한 아기를 안았는데

그 아기가 교황의 모자(“주케토”)를 벗기고 머리를 만졌습니다.

아이가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만져도

교황은 웃음을 잃지 않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이 두 개의 그림만 생각해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민적이었습니다. 소박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고 했을 때,

“다리는 세우지 않고 벽만 세우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도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제의 길에 접어든 이태리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에서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평화의 기도”를 지으신 분입니다.

교황 중에 처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졌답니다.

 

3.

교황의 유해가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고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가까이는 남성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키가 150cm에 불과한 80대 수녀가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말없이 조문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자넹그로스라는 수녀였습니다.

그는 교황과 수십 년 동안 우정을 쌓아온 분입니다.

소외 계층을 위해서 헌신한 분입니다.

 

교황은 이 조그만 수녀를 향해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라고 불렀답니다. 작은 거인쯤 됩니다.

자넹그로스 수녀는 교황을 회고하면서

아버지 같고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면서 격려했던 눈빛과 격려를 회고했습니다.

 

4.

지도자들에게서

‘품격’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즘 세상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품격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아니 높은 자리에 있어도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성육신(incarnation)의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너무 폼을 잡지 않고 이해관계에 민감하지 않고

조금 어리숙해 보여도 일상의 작은 행동과 말투,

오랜 우정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품격을 갖추고 싶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Mat5:9)

 

하나님,

근사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 (1)

주님의 보혈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행1:8).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렸고, 약 열흘 뒤인 오순절에 놀랍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시작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이 모든 시작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마치고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영광스러운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오순절 성령강림도 없으니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수없이 들었던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고 정리하며, 온 교회가 십자가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반역이나 살인 등 악한 죄를 지은 범인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골고다 언덕의 이름이 “해골”이었듯이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들의 잔해들이 가득했습니다. 저주받은 곳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도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신21:22-23). 율법을 범하고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구약 시대에 죄를 범한 사람들이 나무에 달리는 것이 겹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저주 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이 “주님의 보혈”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서 제물로 선별된 양을 죽이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피의 제사와 맞물립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구약 시대에 양이나 소 등 제물을 바쳐서 백성들이 죄에서 정결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는 매번 성전에 와서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거룩한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매번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영원히 없애 주셨기 때문입니다. -河-

부활의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부활절이 지났지만,

앞으로 일곱 주간은

교회력에 따른 부활 절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앞으로 50여 일 동안 부활을 삽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날 과학의 잣대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부활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야 한다고 강요할 것도 아니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할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을

주입했고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괄호)에 넣고

자신에게 확실한 것을 중심으로

신앙을 펼쳐 나가는 것도 현명한 자세입니다.

 

3.

눈에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어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대입하면서

부활의 문제와 씨름하기보다 부활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연습하라(Practice Resurrection)”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부활을 연습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서 부활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죽음의 세력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차분하고 침착합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매일같이 자존심, 자만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갑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살 때,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가 되고,

역사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리가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 길은 언제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Practice Resurrection>-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2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