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흔들어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씨애틀 큰 아이가 사는 동네에는

‘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가 사십니다.

 

댄 할아버지는 열 가구 정도 모여 있는

마을 입구 자신의 집 앞 의자에 앉아서,

오가는 모든 차량과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주십니다.

 

우리 손자가

그분의 집 앞 텃밭에 들어가도 뭐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이며 호박을 따서 건네주십니다.

 

행여 외부인이 들어오면,

누구보다 댄 할아버지가 먼저 알아차리시니

동네 사람들의 안전까지 책임지고 계신 셈입니다.

 

2.

노스캐롤라이나 콘코드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네 살 소년 ‘로만(Roman)’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로만의 부모는 1년 전에 결별했습니다.

아빠는 플로리다로 떠나고 엄마와 함께 지냅니다.

로만은 갑작스러운 가정의 변화에 많이 외로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로만은 집 앞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Hi”라고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맞은편에 사는 이웃집 아저씨가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둘 사이에 따뜻한 교감이 생겼습니다.

다른 이웃들도 함께 인사를 나누면서

동네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운동을 하고,

생일에는 이웃 어르신들이 찾아와

로만을 안아주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네 살 소년의 작은 손짓이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로만의 외로움도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3.

‘작은 것’에서 많은 일이 시작됩니다.

 

2천 년 전,

100여 명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사건이 그렇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에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일이 작게 느껴져서

의미를 잃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비의 날갯짓이 종종 세상을 바꾸듯이,

네 살 소년 로만의 인사가 동네를 바꾸었듯이,

우리의 작은 말과 마음, 몸짓이

세상에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참빛 식구들이 품고 있는 기대입니다.

크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아도

삶 속에서 작은 빛으로 살아가려는 이유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이” 하고 인사를 건네고,

생각나는 친지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 봅시다.

우리의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9절)

 

하나님,

누군가에게 빛이되고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 1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8)

로마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밖에서 세상에 찾아온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구원자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량, 칭의, 화목이 성취되었고,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으로 마련해 놓으신 구원입니다. 우리는 단지 회개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 프로젝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뿐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이것을 두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도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몸에 할례받은 것이 그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놓고도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위에 있고 싶었습니다. 다른 민족이나 사람과 차별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3:29)고 분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구원에 인간의 업적이 없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을 앞세우고 싶어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자칫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구약의 율법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규범입니다. 구약 시대의 문화를 갖고 있지만, 그 정신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도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의 율법을 존중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河-

가장 행복했던 순간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틱톡(TikTok)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면서

뉴스위크 인터넷판에 실린 짧은 기사입니다.

 

구십이 넘으신 할머니,

환갑을 넘긴 딸, 그리고 손녀가 나눈 대화입니다.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라고 묻습니다.

 

이 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지금도

북클럽에 참석하고, 나인홀 골프를 즐기며,

필라데스도 배우고 계십니다.

남편은 의사였고, 모녀는  심리 치료사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손녀의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내 인생이 가장 힘든 때였을 거야.

남편은 아직도 수련의였고,

나는 나이가 차는 세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지.

우리는 재정적으로 너무 너무 어려웠어.

그런데 그때가 가장 활기차고 행복했단다”

 

보통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데,

인생의 골짜기를 걸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할머니의 대답에 딸과 손녀가 깜짝 놀랍니다.

 

딸은 엄마의 대답에 공감했습니다.

이 가족은 대화가 많았습니다.

농담과 스몰 토크(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즐겼습니다.

힘든 일, 기쁜 일도 가족 안에서 함께 나눴습니다.

그러니 힘들수록 더 많이 대화하면서

가족의 깊고 끈끈한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2.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곳(God, here and now)’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헨리 나우웬도

<지금 이곳 here and now>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구약의 예언도, 요한계시록의 묵시도

지금 이곳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면서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의 예언은 하루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언자가 예고한 심판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묵시는 로마 제국 치하에서

핍박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한 세력이 무너질 최후 심판이 있으니

신앙을 잃지 말고 소망 가운데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이곳”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할머니처럼,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골짜기를 걸어갔던 기억이

훗날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의 삶을 멋지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무지개와 같은 행복에 연연할 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어려움이 반복될 것 같은 두려움에 쌓일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은혜, 능력을 믿고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친지들과 깊은 정을 나누면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걷는 순간순간의 인생길을

멋지게 빚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오늘을 사는 것이지요.

 

주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를 살아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인생 최고의 하루를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 9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7)

기독교를 대표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믿음, 사랑, 은혜, 선물, 구원, 십자가, 부활 등입니다. 이 모든 표현의 한가운데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주도하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약속에 기초합니다.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요3:16).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속량, 칭의, 화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동안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계를 없애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선물이고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의롭게 되고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우리는 예수님께서 준비해 놓으시고 초대하시는 구원에 ‘믿음으로’ 화답하면서 들어갑니다. 구원은 절대 우리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구약의 율법도 예수님께서 주도하신 구원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구원을 놓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우리의 자랑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 속에 우리의 자랑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받았다는 그릇된 믿음을 갖게 합니다. 심지어 믿음에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업적을 앞세우게 합니다. 우리가 선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선물이 대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무엇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을 받고 누릴 뿐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함으로 예배할 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자랑입니다.-河-

옛친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한국에서 40년지기 친구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습니다.

 

신우회에서 군대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입니다.

대학도 동기이고, 결혼도 한 달 차이로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똑같은 제복을 입고 만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제대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신우회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찬양하고 교제했습니다.

 

모임 이름도

‘험우회(險友會)’라고 지었습니다.

험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

세상은 허무하지만 믿음 안에서 의미를 찾는 친구들,

우리가 근무했던 캠프 험프리 신우회 동문이라는 뜻입니다.

 

험우들만의 결혼식 축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큰아이가 한국에서 축하연을 했을 때도

친구들이 ‘그때 그 축가’를 그대로 불러 주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라브리’를 꿈꾸기도 했고,

언젠가는 뜻깊은 일을 함께 하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5년을 함께 지내다가

저는 199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 아니어서

마음속에는 늘 그리운 친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미국을 방문하는 친구가 있거나,

제가 한국에 가면 꼭 한 번은 만났습니다.

 

이번에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친구와도

한국에 가면 만나고,

필요할 때 연락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닷새를 함께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방문했으니

여행 일정도 빼곡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의 공백을

함께 채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직업도, 삶도, 가족도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허물이 없으니

남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친구가 좋습니다.

 

2.

저는 우리 교회도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허물없는 신앙의 친구를 만나고,

훗날 다시 만나면

참빛교회 시절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옛 친구’를 만드는 공동체 말입니다.

 

글쎄요.

우리가 그 정도의 공동체인지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참빛 식구들을 다시 만나면

참 반가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야기도,

그때는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워 갑시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 17:17)

 

하나님,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2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복음: 속량 칭의 화목

지난 6주에 걸쳐서 로마서 3장 21-26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제로 공부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 밖의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 제국에 속했다는 교만함이 세상에 팽배하였습니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서 토라를 공부하고 구약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에게 창조주 하나님은 낯설었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셨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그 무엇’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세 가지 용어를 갖고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속량(redemption)입니다. 속량은 로마는 물론 각 지역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특히, 값을 주고 노예를 사서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값을 지급하면서 소유권이 이양되는 절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주시고 우리를 사 오신 것입니다.

 

둘째는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칭의는 당시의 법정에서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던 법적 용어입니다. 무죄 판결을 받으면 법적인 문제에서 해방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을 때, 우리는 법적으로 완벽한 의인이 됩니다.

 

셋째는 화목(reconciliation, propitiation)입니다. 화목은 구약의 속죄 제사에서 비롯된 성경 즉 교회의 용어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담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속량, 칭의, 화목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각각의 관점에 맞춰서 당시 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용어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충분히 완성하셨습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갈 때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고, 복음이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할 것입니다.-河-

신실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3장 21-31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주일설교가 성경 공부를 겸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3장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한

헬라어 본문은 예수님을 주어로 삼아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저는 이번 연속 설교를

우리의 믿음보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춰서

준비했고 함께 나눴습니다.

 

2.

우리의 믿음은

솔직히 우리 마음이나 기분에 따라서 변화무쌍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른다면

그 자체가 불안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라고 번역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흔들림 없이 확실해집니다.

설교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신실하게/성실하게 모든 것을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 보았습니다.

A: 의롭게 됨. 구원

B: 예수님의 신실하심(신실하신 예수님)

C: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C)이

직접 우리를 구원(A)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을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B)입니다.

 

3.

한 엄마가

맛있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믿음으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머니 손에 들린 ‘물건’을 향한 집착입니다.

 

아이가 가질 온전한 믿음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계신 어머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머니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종종 구원을 비롯해

예수님께서 손에 들고 계신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신실하게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라,

그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하나님,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2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