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 동안 주말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가 3시간 이상 지연되고

엔진 고장으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다녀왔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승객들의 짐을 싣고,

비행 정비와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애틀 공항에는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빗속에서 그 궂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뒤쪽에 있어서

차례를 기다려서 내리다 보면,

앞쪽 승객이 앉았던 곳을

청소하는 분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승객들이 남긴 쓰레기를 모으고

좌석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2.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K자형 모습을 띠고 있답니다.

 

위쪽에 있는 계층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K자의 아래에 계신 분들은

예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선,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체류 신분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내야 합니다.

 

K자의 위쪽 가지보다

아래쪽 가지에 속한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공항에서 궂은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소위 아래에 속한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궂은일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없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상도 못 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이야말로

말없이 세상을 바치고 있는 분들입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의 귀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도 한 해를 살면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때로는 직장에서도 말없이 궂은일을 담당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빛이 나지도 않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참빛 식구들께

칭찬과 찬사를 보냅니다.

 

더불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 일에 종사하고 계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예수님도 3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

궂은 일을 하면서

섬김의 자리에 지키신 참빛 식구들을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8이-메일 목회 서신)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여정(journey)

또는 그냥 ‘길’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제 앞에 있는 길들을 사진으로 남긴 적도 있습니다.

매일 보는 길인데 새롭게 보일 때가 있고,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새롭게 보이는 감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신앙의 길,

우리가 실제로 걷는 길까지

인생은 말 그대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생로병사, 우여곡절, 희로애락 –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단어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힘든 것에는 제외되고

좋은 것만 누리는 특혜를 얻고 싶지만,

마음처럼, 기도하는 것처럼 길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의 세계,

땀을 흘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만물이 타락해서 신음하는 세상은 나름의 자연법이 존재합니다.

 

때때로 자연법의 창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느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매번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예외입니다.

 

그러니 행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로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실수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지요.

그것은 얼른 교정하면 되는데,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닥치는 대부분의 문제와 어려움은

생각보다 복합적입니다.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2.

주일에 ‘예수님의 발’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밟고 걷는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을 걸어 다니시면서

기쁨과 평화,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힘든 백성들을 만나시고 만져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걸으셨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까지 걸어오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걷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셀폰 앱이 있어서

우리가 걷는 곳을 다 표시해 줍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길이 샬롬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길 원합니다.

 

예외 없이 때로는 무작위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함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리만 어려움에서 배제된다면

그야말로 욕심 아닐까요!

 

대신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간순간 내려 주시는 힘, 지혜, 용기를 갖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진지한 발길입니다. 소중한 발길입니다.

 

남은 올 한 해도 예수님을 따라서

뚜벅뚜벅, 때로는 사뿐사뿐,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1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과 발 (3)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예수님의 손과 발 가운데, 예수님의 손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손길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하실 수 있었지만, 특별히 만지고 접촉하시면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세상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갈릴리 호수 건너편과 갈릴리 북쪽 두로와 시돈까지 두루 다니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꺼리던 사마리아 지역도 지나가셨고,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년 공생애 가운데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는 예루살렘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는 것 외에는 모두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길 가운데 오늘은 특별히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삭개오에 관한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갈릴리를 떠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여정을 기록한 여행 보도(누가복음 9-19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길목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장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명예도 얻었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삭개오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마음에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하도 작아서 군중들 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늘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삭개오를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 앞에 멈추신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하루를 머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발길로 경계를 허무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샬롬)가 임했습니다. 오늘은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가 예수님의 샬롬을 경험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河-

불가사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작은 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드린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면서 생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번 연속 설교의 주제에 맞춰서
‘예수님의 손’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문제, 기도 제목, 염려, 불안,

계획 등등 모든 것을 올려 드리기로 다짐했습니다.

 

동시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린

어린아이의 손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배고픔을 잊고

예수님께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신기하고 대견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한 아이’라고 기록된 손이

오 천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의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2.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막상 작은 것을 실천하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자리에 있으면,

“이 작은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될까”하는

회의가 찾아오고 때로는 주눅이 듭니다.

 

그때, 우리가 배운 오병이어의 기적,

특히 자기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린

어린아이의 작은 손이 큰 힘이 됩니다.

 

제가 종종 인용하는 비슷한 예화도 생각납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노인이

큰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 해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에 밀려온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가 해변가에 있었습니다.

 

저 멀리 한 아이가 불가사리를 한 마리씩 들어서

바다에 풀어주고 있습니다.

햇볕이 쨍쨍해서 금세 말라 죽을 상황입니다.

한 두 마리를 살려준다고 대세가 바뀔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행동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인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렇게 몇 마리를 살려준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물으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제가 바다에 던진 불가사리는 살아날 거예요.”

 

3.

그렇습니다.

작은 일이 소용없어 보여도,

오병이어의 작은 아이의 손처럼 큰 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해변가에서 죽어가는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바닷가에 들어간 불가사리는 생명을 유지할 겁니다.

 

작은 것에도 힘이 있습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작은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작은 것에서 희망을 봅니다.

 

올 한 해,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신

참빛 식구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하나님,

겨자씨 알에서

풍성한 열매를 아는 안목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4 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에서 기다림으로

Happy Thanksgiving!

 

1.

제가 처음 담임 목회를 시작했던

인디애나 교회는 장소와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에

수요 예배 대신에 목회서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1, 2, 3 숫자로 단락을 구분하면서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때까지 포함하면, 목회하는 내내 수요일 또는 목요일마다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보낸 셈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인들께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서

서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빠름도 실감하고,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함을 스스로 배웁니다.

 

목요일마다 이-메일 서신을 보내기에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대개 한 해의 감사한 일을 돌아보면서 준비합니다.

 

2025년 올해는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25년,

샌프란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 20년을 맞는 해이기에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제안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

힘들 때 조용히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아 주었던 이웃도 기억하길 원했습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힘들 때 함께 해주고

지친 손을 잡아 주면서 위로와 힘을 주었던 손,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손길이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좋으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친지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뜻깊게 보내기 원합니다.

 

3.

감사절이 끝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강단에 네 개의 촛불도 준비했습니다.

매주 하나씩 켜면서 온 교회가 예수님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트리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일에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트리를 장식하면서

교회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쌓고

성탄을 기다릴 것을 눈에 그리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무엇보다 사분오열 갈라져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세상에 온전한 샬롬이 임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에 더욱 마음이 설렙니다.

 

2025년 성탄에는

우리들과 세상에 어떤 기쁜 소식을 갖고 오실는지요!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하나님,

감사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7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과 발 (2)

예수님의 생각, 마음, 손과 발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서 만지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신 말씀을 나눴습니다(막1:40-42절).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을 어기시면서 그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서 나병 환자를 만지신 예수님의 손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충분히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서 만지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동시에, 보기 흉측한 환부를 손을 내밀어 만지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직접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도 비슷합니다. 지난주에 나병환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듯이, 오늘 본문에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나 자신의 죗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사고입니다. 당시 상상도 못 했던 혁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탈피(脫皮)’ 즉 기존의 틀을 벗어내고 새로운 사고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임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웁니다. 기존의 생각에 얽매이면, 탈피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생각에 집착해도 새로운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전통 역시 새로운 사고를 방해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나눴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무한대로 열려있는 시스템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만드시고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바르십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모습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료행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해서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도 나옵니다(막7:32-35).

 

오늘 본문만큼 예수님의 손길을 자세히 설명한 복음서 기록도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진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도 생각날 정도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손수 빚은 진흙을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맹인이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니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河-

온전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마음에 이어서

지난주부터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생명”

예수님 마음은 “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은 “샬롬(평강)”이

핵심 메시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이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처럼 보기 흉하고 치명적인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부정하였기에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살리셨습니다.

 

2.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나병환자(레프로스, leper)라고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나병에 대한 규정으로 알려진

레위기 13장 본문에는 “나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가

오늘 날의 한센병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악성 피부병”이라고 옮겼습니다.

 

예배 후 한 집사님께서

레위기에서 묘사한 증상들이

오늘날 피부암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피부암은 전염되지 않는데,

억울하게 격리되어서 암과 싸우는 경우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어나 표현은

성경이 쓰일 당시에 통용되던 것입니다.

요즘의 과학이나 의학에 비교하면, 턱없이 미천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는

성경이 쓰일 당시로 꼭 찾아가서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교리에 묶여서

당시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3.

레위기에서 피부에 발생한 질환과

그로 인해서 옷이나 물건까지 부정하다고 엄격히 규정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온전함(wholeness)”과 관련됩니다.

 

질환으로 인해서 피부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하나님의 벌 또는 저주라고 봐서도 안 됩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온전함’을 지향하듯이

우리의 성경 읽기 역시  ‘온전함’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올바른 해석과 바른 신앙을 갖출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8)

 

하나님,

매사에 온전함을 추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