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좋은 아침입니다.

 

2017년도 이제 3일 남았습니다.

 

올해는 정유년, 닭의 해였습니다.

새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닭의 노래처럼

한 해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하신

참빛 식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함께 해주셔서

올 한해도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목회한 햇수보다

앞으로 목회할 햇수가 짧아지고 있지만

부족한 저의 모습은 점점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교회를 섬기고

매 주일 하나님을 예배하신 참빛 식구들이 계셔서

한 주 한 주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함께 해 주신

참빛 식구들께 감사드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목요일마다 제 이-메일 서신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2.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마가복음 10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매오를 부르셔서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고

바디메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수요예배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는 권사님들의 기도 제목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제일 먼저 대답할 소원이 무엇인지 남은 사흘 동안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참빛 식구들께도 같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남은 사흘 동안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간절한 믿음으로 새해맞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 10:51-52)

And Jesus said to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And the blind man said to him, “Rabbi, let me recover my sight.”

And Jesus said to him,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Mark 10:51-52)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녀로 열심히 살아온 참빛 식구들을 마음껏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28이-메일 목회 서신)

성탄절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고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물론 부활절이 유대교에서 지키는 유월절과 맞물려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실제 날짜에 가깝지만, 성탄절은 로마 시대에 태양을 섬기던 날과 관련이 있습니다.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지나고 낮이 길어지는 시점이 태양을 섬기던 절기였는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뀐 후에는 빛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태양을 섬기던 날을 태양은 물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바뀐 뜻 깊은 날입니다.

 

요즘은 성탄 인사가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메리 크리스마스”로 인사했습니다. 영어의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를 예배 (Christ’s mass)”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로 인사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예배하고 기억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빠르게 바뀌면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성탄절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타클로스입니다. 어린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양말에 선물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는 진짜로 산타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산타클로스의 유래를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후 300년 경에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곳에 니콜라스라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재산이 많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산타클로스의 원조가 된 사연이 있습니다. 니콜라스가 사는 지역에 세 명의 딸을 둔 가난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고 싶었지만, 신랑에게 챙겨줄 지참금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스는 금덩어리를 주머니에 넣어서 굴뚝으로 내려보냈고, 그것이 집안에 걸어놓은 양말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직접 전해주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은밀히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 명의 딸을 결혼시킬 수 있는 자금을 굴뚝을 통해서 전해 준 것이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온다는 전통이 되었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은밀하게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산타클로스가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올해도 여선교회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굴뚝을 통해서 양말에 넣어주지는 않지만, 선물을 받는 아이들의 마음은 똑같이 기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아서 모든 참빛 식구들 위에 하늘의 기쁨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러든지/whatever

좋은 아침입니다.

 

뉴욕주에 위치한 마리스트 대학에서는

매년 설문조사를 통해서

한 해 동안 가장 짜증나게 하는 말(annoying words)이 무엇이었는지 조사합니다.

 

올해도 천여 명을 조사했는데

1/3이상이 지난 9년 연속 1위였던

“그러든지(whatever)”를 꼽았답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약간 비아냥 조로 마음대로 하라거나,

자신과는 상관없으니 하든지 말든지하라는 뜻의

“그러든지/whatever”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짜증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자녀가

부모를 향해서 종종 취하는 태도이자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섭섭함이 밀려옵니다.

 

화가 나거나,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도 사용합니다.

무엇보다 무책임한 태도이고

은연중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든지”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정파였답니다.

 

정치나 사상에 뚜렷한 특징이 없는 사람이

종종 쓰는 말이 “그러든지/whatever”일 것 같은데

자신들이 쓰는 말을 스스로 싫어한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두 번째로 짜증나게 하는 말은

“가짜 뉴스(fake news)”였습니다.

신속하고 정확한 뉴스가 넘쳐도 시원치 않은 요즘 세상인데

가짜 뉴스가 판을 치니 서로를 향한 불신이 쌓여갑니다.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그만/no offense, but”

“말 그대로(literally)” “내 말 알아들었지(you know what I mean”등이 뒤를 이었답니다.

 

진실성이 결여된 채 자기주장만 펼치는 태도와 말투를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2.

곧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성탄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외롭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을 베푸시고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벧전 4:8)

사랑은 무책임하게 “그러든지”라고 말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참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 연말을 맞으면서

이웃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삼가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Love is patient and kind; love does not envy or boast; it is not arrogant or rude.

It does not insist on its own way; it is not irritable or resentful;

it does not rejoice at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Love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1Cor 13:4-7)

 

하나님 아버지,

진실한 사랑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21이-메일 목회 서신)

찾아오시는 예수님 (7): 삭개오

힘들고 지쳐서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나인성 과부가 좋은 예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여인을 향해서 불쌍한 마음이 동하시니 관에 손을 대시는 등 율법을 파괴하시면서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예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걷는 구도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한 순례길입니다.

 

힘이 없을 때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손잡고 함께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을 찾아갈 힘이 있을 때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이처럼 신앙은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발전하고 성숙합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의 최고 관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기에 자기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또한 대부분 세리들은 로마가 책정한 세금보다 많이 걷어서 여분을 자기가 착복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삭개오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삭개오라는 이름에는 그의 직업과 달리 “의롭다”는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면 답답함과 삶의 무의미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아서 군중 틈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정이 삭개오로 하여금 옆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시고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시면서 그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삭개오 역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착취한 것을 보상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먼저 뽕나무에 올라갔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원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그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찾는 구도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河-

대강절을 보내며

좋은 아침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한인 언론은 물론 SNS에

월넛크릭에서 있었던 백인 여성의 언행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한인 학생들이 우리 말로 얘기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백인 여성이

이민자는 영어만 쓰라고 무례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매장 직원들이 말리다가

결국은 경찰까지 동원되었지만

백인 여성은 끝까지 “아시안”

그것도 “코리안”을 들먹이면서 소동을 부렸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백인들의 유색인종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의 언행이 끊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

 

미국은 원래

샐러드 보울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이민자의 나라인데

인종간의 갈등이 자꾸만 불거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

다인종, 특히 아시안이 많은 베이 지역에서 발생했기에

더욱 예의주시하게 됩니다.

한인이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 화가 납니다.

 

2.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우리 아시안들이나 유색인종들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고,

약한 사람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역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약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따라오도록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월넛크릭 스타벅스 사건을 보면서 몹시 화가 나지만,

엄밀히 살피면, 우리 자신을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의 민낯입니다.

 

3.

마음에 촛불을 두 개 켜고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을 통째로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자, 최고의 권위, 창조주,

피조물인 인간과 100% 다른 분이셨지만,

기득권이나 자신의 권위, 다름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고, 소외되어 외롭고,

힘없는 자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의 편이 되셨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대강절을 맞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행여나 자신만이 최고요 옳다는 우월 의식,

자기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배타성이 발견된다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의 평화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 5절)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Phil 2:5)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14이-메일 목회 서신)

                   

찾아오시는 예수님 (5): 나인성 과부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주제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가 맨 앞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사랑도 기독교의 대표적인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어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생명과 구원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던 옛 자아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갑니다.

 

또 한 가지 기독교에 있는 특별한 개념이 “성육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모두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스스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육신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누군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약한 자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처지에 들어가서 같은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육신 신앙이 있을 때, 세상 속에서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사역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특별히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도움이 되셨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 불쌍히 여기시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인성에 사는 과부가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나인성 과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들의 장례를 위해서 성문을 빠져나오는 광경을 보신 예수님 안에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눅7:13). 그리고 장례 행렬에 다가 가셔서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과부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먼저 다가 가셔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사랑의 특징입니다.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