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은혜 (6): 십자가의 삶/ 로마서 5장 6-11절
십자가의 은혜 (6): 십자가의 삶/ 로마서 5장 6-11절
십자가의 은혜 (5): 화목/ 골로새서 1장 20-23절
화목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구약의 모든 율법의 굴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속죄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핍박과 박해가 극심했던 초대 교회에 승리의 십자가는 신앙을 견디는 힘이었습니다. 어떤 핍박이 찾아와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갈 때 막을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십자가의 의미는 화목(reconciliation)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을 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진정한 화해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시기와 질투, 갈등과 폭력으로 나누어진 세상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평화가 하나님의 뜻임을 그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지난 주말에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교회가 모든 비용을 지원하고 순전한 신앙과 쉼을 즐길 수 있는 수련회를 꼭 갖고 싶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수련회를 준비한 모든 손길과 참빛 식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수련회 주제는 “하나됨–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고, 성도 간에 하나를 이루며, 하나님 만드신 자연과 하나되는 시간을 기대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만든 작품을 보면서,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현미경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귀엽고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만드신 자연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별로 나뉘어 서로의 신앙과 삶을 나누는 모습도 아름다웠습니다. 무려 50년이 넘는 세대가 함께 어울린 자리였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며, 진솔하게 하나님 말씀과 삶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위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도전하며 배우고 자라갑니다. 저는 “참빛 식구”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우리 교회가 가족과 같은 교회가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됨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있고(애착), 하나님을 사랑하고(애정),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의존)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의 핵심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화목의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는
전교인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권사님들,
출타한 식구들이 참여하지 못하셨지만,
아이들부터 권사님들까지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련회 장소는 완벽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그 넓은 장소를 우리만 사용하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수련회장(場)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하늘까지 치솟은 레드우드 나무(redwood tree)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에 속합니다.
100미터 이상 곧게 자랍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어서 좀처럼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장에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살펴보니
하나의 뿌리에서 두 그루가 자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서식하는 레드우드 나무는
뿌리에서 공급하는 수분과 더불어
안개를 먹고 자란답니다.
우기와 건기가 구분되는 우리 지역에서
레드우드 나무가 그처럼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
안개 때문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수명이 무려 천 년에서 삼천 년이 된다고 하니
수련회 장에서 만난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수천년 전까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싹이었을 것입니다.
천년을 자라서 100미터가 되었다면
해마다 10센티씩 자란 셈입니다.
2.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떠올렸습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자라야 합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자라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라갈 때,
레드우드 나무 못지않은 높은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가
서로 얽혀서 크고 높게 자라듯이,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고 삶의 뿌리가 서로 얽혀있을 때,
건강하고 힘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아침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개와 같을 것입니다.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매일의 성경 묵상이 우리 신앙을 높이 자라게 할 것입니다.
뿌리부터 견고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높이 자라는
우리의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 3:18)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높이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9. 이-메일 목회 서신)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상에서 한 계단 내렸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지나치게 많고
그에 따른 이자 부담과 자금 조달 능력이 의심된다는 평가였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 5월 현재, 36조 달러(한화5경원)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이 지불하는 이자 비용은
국가 예산의 16%로 국방예산(15%)보다 많습니다.
빚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악순환입니다.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예산의 70%가 사회보장, 고령자와 저소득 의료보험 지원
기타 실업 급여 등의 의무 지출(mandatory spending)입니다.
나머지 30%를 국방과 기타 예산으로 할당하니
거기서 흑자를 내고 부채를 갚아야 하는데
부채는커녕 이자 상환도 쉽지 않습니다.
2.
미국의 빈부격차도 매우 큽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을 때,
소위 수퍼 리치들의 자산은 천문학적으로 늘었습니다.
상위 1%의 미국 전체 자신의 30%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하위 50%가 갖고 있는 자산은 3%에 불과합니다.
100개의 피자 조각이 있다면, 한 명이 30개를 갖고 있고
하위 50명은 세 조각을 갖고 나눠 먹는 실정입니다.
어제 미국 하원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 통과되었습니다.
저소득층 지원을 축소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내용입니다.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그나마, 중간 계층과 팁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하여튼,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할 겁니다.
동네 피자를 독식하는 수퍼 리치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알만한 부자들 19가정의 자산이
자그마치 1조 달러가 늘었다기에 하는 말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만 지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일 겁니다.
지도자들에게 하늘의 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국가 재정의 문제를 힘없는 서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떠넘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렘 29:7)
하나님,
세상에 평안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2.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 (4): 승리/ 골로새서 2장 13-15절
승리
지난주에는 십자가의 의미 가운데 “속죄(atonement)”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구약에서 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처럼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대속(redemption) 또는 속전(ransom)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지은 우리가 전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심으로 죄 없이 그러나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신 모범이라고 여기는 교리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교리들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는 속죄의 교리는 법정의 용어가 강조된 느낌이 큽니다. 우리가 치를 값을 대신 치르셨다는 것은 지금도 법정에서 통용되는 보석금 제도를 떠올립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이 개인적인 신앙에 머무는 경향도 있습니다.
1930년 스웨덴의 신학자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1933-1952)은 그의 책 <승리자 그리스도 Christus Victor, 1930)에서 초대 교회에서 주장했던 고전적 속죄론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넘어서,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친 승리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였기에 우주적 승리라고 보았습니다.
아울렌이 정리한 승리자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핍박과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저항도 거셌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 나가면 다양한 종교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를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고 했습니다.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죄와 허물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무너뜨리는 법조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핍박하고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입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창세기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 짠한 생각과 함께 깊이 공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입니다.
요셉이 이집트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합니다.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자, 야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9)
“험악한 세월”에 쓰인 히브리어 <라아>는
“악(evil)”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의 “험악한 세월”이라는 번역이 매우 적절합니다.
야곱의 답변은
130년 동안 살면서 겪은 고단한 인생 여정, 그 험악한 세월이
그의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새겨졌다는 뉘앙스로 읽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의 삶은 거칠고 험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뒤 도망쳐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14년을 종처럼 살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짓 소식에 수십 년을 속고 살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긴 것이었지요.
흉년이 닥치자, 양식을 구하러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도 막내 베냐민을 보내야 한다는 일로 마음고생 합니다.
이집트에 총리로 있던 요셉을 만나는 과정도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인생 말년에 이집트로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지냅니다.
짐승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난 것으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타향살이입니다.
말 그대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그의 인생이 그의 모습에 그대로 새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끝까지 견뎠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던 ‘이스라엘’답게 꿋꿋이 견뎠습니다.
2.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희로애락을 모두 겪으면서 걷는 인생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설교나 간증이
‘나’에게 임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런 말에 감동하는 횟수도 뚝 떨어졌습니다.
대신, 조상들에 비하면 나이가 많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이집트 바로 앞에서 솔직히 말하는
야곱의 고백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깊이 공감됩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고난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지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고난을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행여나 기죽지 말고,
꼿꼿하게 걸어갑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시편28:7)
하나님,
견딜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5.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은혜(3): 속죄/ 베드로전서 2장 21-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