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돌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큰 돌로 막아 놓았던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여인들이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하던 것을 보면

무덤을 막은 돌이 매우 큰 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도둑이 자기 발이 저린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큰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무덤을 막은 큰 돌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으시고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2.

부활절에 성경을 읽으면서

무덤 문을 막아 놓았던 돌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에게는 세 가지 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 놓은 것처럼

길이나 입구를 막아 놓은 돌입니다.

헤치고 나가야 할 걸림돌(stumbling stones)입니다.

 

길에 툭- 튀어나온 돌에 걸리면

영락없이 넘어집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 문제, 사람이 걸림돌이 되어서 넘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문제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둘째는, 디딤돌(stepping stones)입니다.

걸림돌과 반대로 디딤돌은 길을 이어줍니다.

 

다리가 발달하기 전에는

웬만한 냇가나 작은 하천에 디딤돌을 놓아서 건넜습니다.

높은 선반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도

디딤돌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갑니다.

 

인생길 이곳저곳에 놓인 디딤돌을 밟으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와서 영적 슬럼프에 빠질 때나

어려움이 찾아와서 깊은 시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디딤돌을 놓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마지막 세 번째는 산 돌(living stone)입니다.

우리에게는 산 돌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산 돌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고 건물을 세워갑니다.

그 위에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짓고, 그 집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의 기초가 산 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4월이 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절로 이어지는

부활절기입니다.

 

우리 신앙과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산 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디딤돌이 되실 것도 믿습니다.

 

힘차게, 담대하게 새달 맞읍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4-5)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디딤돌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4 이-메일 목회 서신)

부활의 은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서 그가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낼 것을 염려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으로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아 놓았었습니다. 병사들을 배치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겁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는 천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인들이 땅에 엎드려서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잡고 경배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샬롬 – 너희가 평안하냐?”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도 헛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물론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한꺼번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시기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20여 년 후로 추정하니 사도 바울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흘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증인(마르튀스)” 이라는 헬라어에서 “순교자(martyr)”라는 영어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목숨 걸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부활해서 영원히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에 힘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승리의 완성입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세상 속에서 부활을 삽니다. 부활의 은혜입니다.-河-

고의적 무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도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이라고 해서

지나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조롱과 비난, 외로움에 동참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난주간은

부활을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고난의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2.

고의적 무지(willful ignor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예수님 주변에는 “고의적 무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백성들의 민란(민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른 척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단지 나사렛 청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알면서 모른 척 했습니다.

 

백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성전에서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생각하면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인물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맹목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군병들이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을 찾았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군병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외면했을 것입니다.

얼굴을 돌려 외면하는 것도 일종의 고의적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꿰뚫어 보셨기에 더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엄 있게 꿋꿋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늘,

하나님을 향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한

“고의적 무지”가 우리에게 없는지 살피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리사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아들을

고소하고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비판하고 군중에 휩쓸릴 것도 아닙니다.

나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길 원합니다.

 

담대한 신앙,

정직한 신앙,

힘과 권력 앞에 숨지 않고 대면하고 저항하는 신앙,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부활절 새벽이 밝으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8 이-메일 목회 서신)

고난의 길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황제에 반기를 들었거나 세상을 어지럽힐 정도의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죗값을 치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년 또는 수시로 제물을 드리던 성전 중심의 형식적인 신앙이 예수님을 믿는 내면과 삶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예수님의 여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했습니다(사53장).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 자체보다도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3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들(the servant songs)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50:1-3) 앞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마음이 완고해진 백성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종은 학자의 혀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본문의 종은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수염이 뽑히고, 뺨을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수치를 당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입니다. 이사야 시대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두운 세상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이길 바랍니다. -河-

새봄

좋은 아침입니다.

 

1.

샌프란의 올겨울은 꽤 길었습니다.

여느 해보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몇 해 전, 겨울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캘리포니아가 사막으로 변할 것 같다고

설레발을 떨 때가 머쓱할 정도입니다.

 

비가 충분히 내리니

삼라만상이 초록으로 변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민 등성이 산들도 파랗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멀지 않게 비가 내리니

캘리포니아 특유의 맑은 날씨가 그리웠습니다.

 

기온도 꽤 내려가서 쌀쌀하고 추웠습니다.

코로나는 잦아들었지만,

독감이 유행해서

여러 날 고생하는 분들도 많으셨습니다.

 

매번 겨울이 그렇듯이,

이처럼 올겨울도 꽤 길었습니다.

 

2.

이번 주 들어서

봄기운이 완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바람입니다.

 

맑은 날이 많아지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캘리포니아 날씨의 귀환입니다.

 

이따금 비 소식이 있는데

우기(雨氣) 끝에 찾아오는

성경에도 나오는 늦은 비입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길가의 가로수와 이웃집 정원의 나뭇가지에

아기 손처럼 귀여운 연한 순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찾아왔습니다.

 

3.

우리에게 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부활절이 있는 계절입니다.

 

춘분(春分) 이후 보름이 지나고

첫 번째 맞는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올해는 3월 31일이 부활절이니 여느 해보다 빠릅니다.

봄이 빨리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새봄과 더불어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바랍니다.

 

새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 차가움,

겨우내 꽁꽁 싸 놓은 것들이

예수님 부활의 생명의 빛으로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술술 풀어 지길 바랍니다.

 

새봄에 찾아오실

부활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가 8:14)

 

 

하나님,

봄을 맞아서 주의 동산에 뛰어노는

사슴처럼 발걸음이 가볍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1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