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소원

좋은 아침입니다.

 

1.

성탄절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신 33년은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사랑과 희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우리도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할 텐데

너나 할 것 없이 요즘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이기적인 면이 너무 많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쓰기가 두렵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고

진짜가 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뿐입니다.

 

2.

헤르만 헤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호적을 명령한 인물입니다.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여윈 상태에서 아들(유복자)을 낳고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라고 지었습니다.

남편 없이 키우게 될 아들이 위대한 인생을 살기 바란 것입니다.

 

이웃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노인이 찾아와서 어떤 아이가 되길 바라는지 묻습니다.

여인은 자기 아들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소원대로 아들은 정말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물론, 주변 사람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이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사랑을 받기만 하던 아이는 응석받이로 자랐고,

받는 것에 익숙한 교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에 실패하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만 받다 보니 인생이 도리어 망가진 것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노인이 된 이 아이에게

어머니를 찾아왔던 노인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동안의 삶이 행복했는지 묻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노인이 된 아이는

“사랑을 받기만 하다가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미워하고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서 좋은 것을 찾고 미워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노년의 삶이 행복했습니다.

주는 기쁨을 새롭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여기저기서 사랑의 빚을 많이 졌습니다.

 

우리가 베푼 사랑과 받은 사랑을 대조해 보면

받은 사랑이 더 많아서 “마이너스(-)” 계좌가 되었습니다.

베푼 사랑이 더 남아야 하늘나라에 예금이 될 텐데요…

 

단지, 받는 것에 길들지 않고

베푸는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의 남은 며칠은

사랑을 베풀면서 사랑의 빚을 갚아 봅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하나님,

사랑을 베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26 이-메일 목회 서신)

기다림의 끝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소망입니다. 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에서 배운 “소망의 인내”입니다. 기다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조급합니다. 한 술에 배부르는 것을 기대합니다. 꿈과 희망이 조속히 이뤄지길 바라면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에 인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600여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남유다가 바빌론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주전587년).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집트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디아스포라(“흩어진 백성”)가 되었고, 바빌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을 거쳐서 예수님이 오실 때는 로마의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게다가 헤롯이라는 이두매 사람은 로마에 아첨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이용했고 백성들은 헤롯 가문의 폭정에 시달렸습니다. 이스라엘 정통 가문이 아니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면서 백성들을 위하는 척했지만. 그의 속셈은 로마의 앞잡이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인들도 자기 몫을 챙기고 힘을 기르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에서 벌어지는 거래의 이권을 놓고 대제사장들은 뇌물을 받으면서 배를 채웠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겠다고 시작한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종교인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율법의 지식을 자기와 상대방을 비난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율법이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제한하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로마 제국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럴수록 제국의 군인들이 예루살렘 시내를 활보했고, 반역자들은 십자가에 죽이는 사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바치는 세리들까지 예루살렘 백성들은 춥고 배고프고 무서운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다윗왕국을 세울 메시아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하나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태어나시니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오신 참빛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다림에 끝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두움에 익숙한 백성들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셨습니다. -河-

토네이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토요일 새벽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20여 분 동안

토네이도 경보가 내렸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토네이도라니요!

경고음에 잠이 깬 주민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 전에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쓰나미 경보기 내린 바 있어서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가는데

한 권사님께서 zoom에서

모이자는 제안을 주실 정도로 급박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토네이도가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80마일에 육박하는 비바람이 불어서

주택가는 물론 Golden Gate Park에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산호세 남쪽의 스캇 밸리에

토네이도가 불어 닥쳐서

나무들이 쓰러지고, 자동차가 뒤집히고

인근 주택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2.

20여 년 전, 인디애나에 있을 때는

토네이도 경보 사이렌도 종종 울리고,

학교 기숙사 전체가 정기적으로

토네이도 대피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사는 지역에서 40여 분 떨어진 곳을

토네이도가 쓸고 간 흔적이

마치 커다란 트랙터가 밟고 지나간 것처럼

들판은 물론 집까지 밟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미나리로 유명한 정이삭 감독이

1996년에 제작된 토네이도 영화의 원조 <트위스터>의 속편으로

<트위스터스>를 제작해서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토네이도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토네이도의 신비를 밝히고, 방지할 방안을 모색하는

대표적인 재난 영화입니다.

 

3.

지금 생각해도 샌프란에 토네이도 경보가 내린 것,

실제로 샌프란에서 70여 마일 떨어진 스캇 밸리에

토네이도가 상륙한 것 등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어서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물론 고대 시대에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토네이도급 계엄이 선포되었다니,

국민들에 의해서 6시간 만에 제지가 되었지만,

상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자연재해로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으니

전쟁은 물론 계엄까지

인간이 만드는 재앙은 그쳐야 하고 꼭 막아야 합니다.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가 안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동네를 넘어서 태평양 건너 조국 대한민국이

다시는 불안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빛 식구들 각자의 삶에 세상의 물질과 힘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나길 기도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계 3:16)

 

하나님,

안팎으로 평화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19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7)

믿음의 소문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첫 번째 장을 두 달여 공부했습니다. 로마 제국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는 전형적인 로마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심었고, 그것이 열매를 맺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멋지게 세워졌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와 교회는 바울에게 영광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평강으로 이어집니다. 교회가 아무리 든든하게 세워졌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도할 때마다 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며 감사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덕목입니다. 거기에 “역사(행위 또는 삶), 수고, 인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더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 전체는 물론 그리스도인 각각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믿음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구체적인 신뢰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을 향한 섬김입니다. 애씀이요 희생입니다. 소망은 언제나 인내를 요청합니다. 끝까지 견디고 결국 이루는 힘입니다. 믿음에서 사랑과 소망이 파생되고 현실화되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우리의 보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5-7절). 복음이 말로 전해졌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복음을 진리(로고스)로 받았습니다. 말 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말이 능력과 확신으로 이어졌고,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믿음을 지켰고,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세상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지 않아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마게도냐는 물론 아테네와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까지 퍼졌습니다. 소문의 핵심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돌아선 회개(과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현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소망(미래)이었습니다. 돌아섬, 섬김, 기다림은 믿음, 사랑, 소망과 연결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우리도 따르고 닮기 원합니다. -河-

 

요한 계시록 읽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요한 계시록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에 읽는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종말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을 비롯한 하나님의 천사들과

악한 세력들이 벌이는 천상의 전쟁과 천지개벽의 종말은

요한 계시록을 묵시(apocalypse)라는 문학 장르에 편입시켰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계시록은

앞에 있는 성경을 다 읽고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물론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의 종말을 전하고 있으니

내용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2.

요한 계시록은

666과 같은 마지막 때의 환난, 악과 선의 싸움,

마침내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일곱 두루마리,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어린양 예수의 승리로 끝나고,

이마에 인을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귀향 가서 환상을 보고 기록한 말씀이기에

계시록에는 상징이 넘칩니다:

악한 세력을 가리키는 바빌론,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는 각종 보석과 유리 바다 등등.

 

상징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계시록을 바라보는 입장도 많이 갈립니다.

계시록은 역시 어려운 말씀입니다.

 

3.

그런데, 요한 계시록은

초대 교회 당시 네로 황제를 비롯한 로마 제국의 박해 한 가운데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이랍니다.

 

장차 이뤄질 일들을 미리 알려주면서

현재의 고난을 끝까지 견디고 신앙을 지킬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니,

요한 계시록의 실제 의도는 미래가 아닌 현재입니다.

현재를 견디는 힘과 지혜, 소망을 주시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뤄질 미래를 당겨와서

현재를 사는 데 꼭 필요한 하나님 말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까? 종말은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등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선의 최후 승리와 최종 구원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공상 영화 같은 이야기들은

사실(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채롭게 읽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에 빠져야 합니다.

 

4.

우리의 삶도 절대 쉽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려움이 늘 상존(常存)합니다.

 

아침마다 계시록 말씀을 읽으면서

어려움에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를 상상하면서

소망의 기쁨과 능력을 장착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현재의 삶을 단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계시록 말씀을 읽는 자세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건만

나는 언제나 무거운 눈꺼풀로 아침을 맞이한다.

피부가 너무 두꺼워 성령의 바람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귀가 어두워 궁창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영광도 듣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나다.

유진 피터슨,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하나님,

계시록 읽기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힘과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12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전서 (6)

내적 확신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멋지게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선포된 복음을 다시 요약하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선택하셨습니다(4절).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5절). 그동안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도시였던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2:13).

 

사도 바울 역시 모든 것을 바쳐서 복음을 전했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사이에 신앙의 교감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듯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울의 열심을 기억했습니다(2:9).

 

사도 바울이 말로 전한 기쁜 소식이 하나님 말씀이 되었습니다(2:13).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세 가지 표현이 서로 연결됩니다. 성령 자체가 능력입니다. 성령에 감동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에도 성령의 감동이 임했기에 하나님 말씀(진리)이 되었고, 그 말씀 자체에 능력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이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인과 교회에 “큰 확신(full conviction)”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습니다:“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2-3).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과 큰 확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