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목사 입장에서는 설교나 예배 후에

“은혜받았습니다”는 말을 들으면 내심 흐뭇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받았다는 것은

종종 감정이 움직였다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설교를 비롯한 예배 시간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정과 연결하다 보니

기복이 심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주관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동하지 않거나 자기 확증이 되지 않으면,

좋은 말씀이나 예배조차 ‘은혜’로 느끼지 못합니다.

 

2.

저는 ‘은혜받았다’는 표현을

‘깨달음’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말씀에

커다란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예배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감정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감정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입니다.

때로는 낯설거나 불편한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큰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고,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바꿉니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3.

지난주에 제가 존경하던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라는

여성 구약학자께서 9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신학교 시절, 트리블 교수님의 저서

<공포의 텍스트, Text and Terror>를 처음 읽었습니다.

100쪽 남짓한 작은 책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구약 성경의 네 여성(하갈, 다말, 사사기의 어떤 여성, 입다의 딸)에 관한

교수님의 해석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하찮은 네 명의 여성에게 얼마나 무관심했고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또는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쳤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뜰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에 집중하면서,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가르쳐 준 ‘교과서(text)’였습니다.

 

트리블 교수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책꽂이에서 교수님의 책을 꺼내서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 21:19)

 

하나님,

눈을 밝히셔서 깨달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3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마음 (1): 긍휼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한 가운데 “긍휼(compassion, 불쌍히 여기심)”이 있습니다. 긍휼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긍휼이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은 삼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라는 책에서 옮겨온 글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긍휼 어린 사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선하고 온화하며 이해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대체로 긍휼을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가난한 노인이나 굶주린 어린아이, 혹은 전신이 마비된 군인이나 겁에 질린 여자아이를 보고 긍휼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명백한 인간의 속성 중에서 긍휼을 제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긍휼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마음 깊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는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을 즉각 동일시한다. 긍휼 없는 인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이 동일하다면, 왜 인류는 갈등과 전쟁, 미움과 억압으로 찢겨 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들 가운데는 기아와 추위 때문에, 혹은 쉼터가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단 말인가? 또 왜 우리는 인종적, 종교적 차이로 인해서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는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외와 분열 혹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서로 상처 주고 괴롭히고 죽인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혼란스럽단 말인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 고통)와 ‘쿰’(cum 함께)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생각하면, 긍휼에는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河-

꿈을 쫓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 공부했던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0).

 

이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이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뛰쳐나갔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조차

곧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마음도 비통해서

잠시 후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고 기도하실 겁니다.

물론, 아버지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시고

말씀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이러한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모습은 눈에 그리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들을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은

미래를 내다보시고 꿈을 꾸시는 비전가(visionary)셨습니다.

 

2.

‘꿈을 꾸는 사람’을 생각하면

창세기의 요셉이 떠오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꾼 꿈을 가리켰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는 믿음의 사람 ‘비전가’ 요셉을 떠올립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제들의 잘못과 그들을 향한 미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집트에서의 성공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갔던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3.

꿈을 쫓는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과거에 미련을 갖고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아쉬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누군가를 탓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 가룟 유다 탓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도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형제들을 통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원망 대신 감사를,

절망 대신 소망을 붙듭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걷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노래하며 하루를 시작합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하나님,

희망을 노래하고

꿈을 쫓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16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대제사장의 기도)

 

그동안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각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사랑”이라는 두 주제를 늘 생각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신 <에고 에이미 I am>가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서로 사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요한복음 17장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세상의 죄를 없애고,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높은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십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중재자가 되시기에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3년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예수님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17:1-8).

 

하나님을 찬양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세 가지 주제로 기도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는 것은”이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가 되길 기도하십니다(9-14절). 예수님께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따로 언급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애틋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 속의 제자들을 지켜주시길 기도하십니다(15-1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 속으로 파송하십니다. 대신 제자들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세상의 핍박도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하십니다. 주의 말씀인 진리로 보존하시길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듣고 믿게 될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고, 이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분임을 믿도록 돕는 촉매가 되길 기도하십니다.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河-

 

감정 다스리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소위 근대(modernism)라고 불리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reason)이 중요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고, 실험을 통해서 검증했습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는

이성보다 “감정(emotion)”이 앞서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앞서서 느낌이 와야 합니다.

감이 잡혀야 합니다. 마음에 다가와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근차근 조목조목 필요한 것을 점검하면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느낌이 오면, 마음이 통하면 곧바로 사귑니다.

청춘남녀의 연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팔이”라는 용어도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그 사람의 동의와 도움을 얻어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관계를 형성하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용어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거의 초반부터

감성에 호소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고백은 대부분 감정에 기초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무작정 감정적으로 믿지 말고, 생각하면서 공부하면서

“질문하는 신앙” “이해하는 신앙”을 갖기를

부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감정에 호소하면서

발전하고 부흥을 경험하다 보니,

냄비 같은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몇 마디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3.

감정은 좋은 것입니다.

‘느낌’이 없고 ‘생각’만 있는 세상은 무미건조합니다.

 

그런데, 감정은 다스림의 대상입니다.

올바른 감정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실제로 만들어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반면, 그릇된 감정은

“자기애(自己愛)”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릇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변화가 심합니다.

 

영성가 리처드 로(Richard Rohr)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전망대에 올라가기를 권합니다.

그가 말하는 전망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실 정도로 감정이 풍부하신

성령 하나님의 자리(전망대)에 올라가서 우리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감정인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감정인지,

집착하는 태도에서 나온 감정은 아닌지.

감성팔이처럼 남을 의식한 감정은 아닌지,

성령 하나님의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살피라는 권면입니다.

 

감정이 중요한 시대를 살다 보니

신앙과 삶이 감정에 따라 춤을 춥니다.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요동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올바르게 표현하고, 누리길 원합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까지 갖춘다면

정말 근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절)

 

 

하나님,

마음속에 평안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9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참 포도나무라

에고 에이미(7)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마지막 <에고 에이미>는 “나는 참 포도나무라”(요 15;1)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에서 주신 말씀입니다(요13-16장).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13-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제자들이 거할 집을 마련한 후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장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설교에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장차 받게 될 어려움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포도원 또는 포도나무는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포도원을 바르게 관리하지 못하고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최상급 포도를 기대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소용없게 된 포도나무가 불에 탈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시편80편).

 

이처럼 구약의 포도원과 포도나무는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포도원을 직접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관리하십니다. 많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 한 그루만 존재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백성들이 포도나무가 되어서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가지들을 정리하십니다. 겨울철을 보내면서 쓸모없게 변한 가지는 잘라 버리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예수님을 팔아먹을 가룟 유다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포도가 잘 열리도록 성한 나무들도 정리해 주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어려움을 뜻할 것입니다. 나머지 가지들이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열매를 ‘전도’ 또는 ‘선교’라고 하셨습니다.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사역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서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河-

불꽃 야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유튜브를 통해서

<불꽃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합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였던 프로야구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 선수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모습을 보았기에

친숙하고 반갑게 경기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팀에는 유망주 젊은 선수들도 있습니다.

프로 야구팀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교 또는 사회인 야구팀 출신들입니다.

 

은퇴한 선수들이나 젊은 선수들이나

열정이 넘칩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레전드와 같은 선배들과 한 팀에서 운동하고 경기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 선수가 프로팀에 입단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불꽃 야구> 선수단의 감독은

야구의 신이라고 불렸던 김성근 감독입니다.

팔순이 넘으신 분입니다. 암 수술도 하셨던 분인데,

선수들을 지도하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불꽃 야구팀이 경기하는 상대 팀들은

고등학교, 대학, 사회인 야구팀들입니다.

고등학교 선수들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였던 선배들과

한 운동장에서 경기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불꽃야구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서

경기를 개방하는 날에는 운동장이 외야석까지 가득 찹니다.

응원 소리가 우렁찹니다.

 

은퇴한 선수들은 다시 듣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에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나 대학팀 선수들이 그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선수가

진심으로 열심히 합니다.

감동입니다.

 

2.

무엇보다 저에게는 “불꽃”이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

 

매사에 불꽃이 꺼지면 안 됩니다.

에너지가 떨어지고, 하는 일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열정이 사라지면 인생 자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야 꾸역꾸역 불씨를 살리고

불꽃을 태우면서 이끌어가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고

불태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십상입니다.

 

행여나 불꽃이 약해지고 있다면

다시 예전의 신앙 열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가슴이 뛰던 순간을 다시 맞이해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고, 이왕 믿는 신앙의 길입니다.

하루하루 신바람 나게, 흥이 넘치게 살고 믿어야지요!

 

관중이 가득 찬 운동장이 아니어도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응원하시는 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오스 기니 <소명>-

 

 

하나님,

불꽃 인생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