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 (4)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기도로 넘어갑니다. 첫 번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가 관심을 끕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만 각각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 오리겐은 <에피우시오스>가 육신의 양식(떡)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영적인 떡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리겐의 관점을 계승한 견해가 교회에 많이 있었는데,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물론 영어 성경에 보면 “일용할 양식”에 “내일 양식”이라는 주(註)를 달아 놓았습니다. 헬라어 <에피우시오스>에 다음 날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네 번째는 매일 같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길 구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 당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 기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일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과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하루분 양식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가져가면 다음 날 썩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믿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에 대한 내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일용할 양식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먹거리였으니 양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성찬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믿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신앙에 꼭 필요한 영적인 양식, 즉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우리 역시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잠30:8). 거친 세상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河-

성숙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국에서 IMF가 한창이던
1998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환율이 올라서 7년간 열심히 저축했던
제 통장 잔고가 뚝 떨어졌습니다.

 

미국에 와서 10년이 지났을 때
2008년 금융위기도 경험했습니다.
은행에 저당 잡힌 주택들이 경매로 팔렸습니다.
무차별 해고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 자체가 흔들렸습니다.

 

또 10여 년이 지난 2020년,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이 발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교회까지 문을 닫게 했습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데
물가(inflation)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팬데믹 동안 4조달러에 육박한 돈을 풀었는데
그것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느끼듯이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과열된 경제를 식히려는 과정에서 정부가 돈줄을 쥐니
지난해 말부터는 기업들의 대량 해고가 시작되었습니다.

 

석 달도 지나지 않은 2023년 한 해 동안
테크 회사들의 해고 숫자가
작년 한 해 동안 해고한 16만여 명에 육박하는 14만여 명이랍니다.
다른 분야의 해고까지 합치면 새해에만 수십만 명이 해고를 경험했습니다.

 

2.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하지 않습니다.
출근하자마자 해고 통지를 받고 경비원이 감시하는 가운데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와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어떨까요!

 

혹자는 해고되자마자 새로운 직장으로 취업이 되어서,
해고 수당을 고스란히 챙깁니다.
해고를 기회로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곁에서도 부러워합니다.
힘든 분들을 생각해서 조용히 계시면 좋으련만…

 

많은 경우는 해고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뿌립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더 힘이 들지요.
아무리 해고가 일상인 미국이라도
“레이 오프(lay-off)”라는 단어는 소화시키기 버겁습니다.

 

3.
우리 교회는 가족 같고 작아서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지만,
교회들이 소위 출세한 사람들, 승자의 편에 서곤 합니다.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시고 사랑하신 결과라고 간증하고
교회는 이들의 업적을 찬양합니다.
나만 살면 되고,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길 기대하는
이기적 신앙도 톡톡히 한몫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소위 잘나가지 못하면
교회에서도 기가 죽기 십상입니다. 교회에서 설 곳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매우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성숙한 신앙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세상과 다른 것, 불편한 것을 기쁨과 감사로 수용하는 것,
잘되었을 때 더욱 겸손하고, 힘들 때 기죽지 않고 신앙으로 견디고
외롭고 힘든 지체들을 찾아가서 손을 꼭 잡아주며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
진리와 생명 가운데 거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

 

교회는 어렵고 약하고 외로운 분들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요 그리스도께서 계신 성전이라면
앞장서서 어려운 분들을 챙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기 원합니다.

 

p.s 지난 20여 년 크고 작은 세상의 어려움을 지나오면서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구태의연한 클리세이(cliché)가 아님을,
위기 속에서 일하시고 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심을 봤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웃들과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23 이-메일 목회 서신)

이렇게 기도하라 (3)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지난주에는 처음 두 가지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이 되길 기도하고 결심했습니다. 가는 곳에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단순하게 기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을 삶으로 살고 드러내길 원했습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 마지막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목적 또는 하나님의 열망(desire)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 세계의 청지기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거꾸로 갔습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인류를 다시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급기야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딤전2:4).

 

앞에서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지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이뤄진 상태가 곧 하늘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 세상에도 임하길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주기도문 세 번째입니다:“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봅니다. 인간의 욕망이 판을 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열, 목숨을 빼앗아가는 각종 사고와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해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적자생존의 정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철저히 무시되고,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2천 년 전의 팔레스타인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河-

뱅크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3월 10일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습니다.

 

순식간에 주가가 곤두박질쳤고
너도나도 예금을 빼는
뱅크런(bank run, 대량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일반고객들이 알아채기 힘들었습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신용등급을 내리거나
은행이 어렵다는 내부정보가 언론을 통해서 흘러나와야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가는 뱅크런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입수해도
일단 은행으로 달려가서 줄을 길게 서서
ATM이나 창구에서 예금 인출을 요청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은행도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해서 위기를 넘기곤 했습니다.

 

지금은
고객들이 손에 들고 있는 셀폰을 통해서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사태가 발생하니
은행으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오늘날의 뱅크런은
갑자기 닥치는 쓰나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16위에 해당하는 대형은행에 뱅크런이 발생하니
이틀도 되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도 뉴욕의 한 은행이 파산하고
몇몇 금융기관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미국 정부가 모든 예금을 보장한다고 서둘러 선언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2.
세상이 너무 빨라졌습니다.
빠르게 치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조처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갑자기 말세가 되면
세상이 빨라진다는 다니엘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4).

 

성경 말씀 한 구절을
단순하게 종말과 연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종말을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종말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승리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몰입하고
문명과 과학의 발달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인류의 교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기가 생겼을 때,
은행으로 달려가서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 못지않게
세상이 발달할수록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달려 나가서 그 뜻을 추구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습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휘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무너지지 않을 예수 그리스도, 진리를 꼭 붙들고 오늘 하루 삽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태6:9-10)

 

하나님,
흔들림 없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16 이-메일 목회 서신)

이렇게 기도하라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도가 이어집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간청이 대부분입니다. 조금 더 나가면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것도 이웃을 위한 간청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먼저 하나님을 향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자칫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완성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간섭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3계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삽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2)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첫 번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뤄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회개의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니 우리는 “이미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중간기를 살고 있습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7:21). “나라가 임하옵시고”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길 바라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河-

애즈베리의 지난 한 달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소개했듯이
컨터키주 윌모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으로
미국은 물론 부흥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애즈베리라는 대학 이름은
영국에서 미국에 건너온 감리교 선교사로
훗날 미국 감리교를 세운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에게서 왔습니다.
오하이오주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신학교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한 달 전인 2월 8일,
애즈베리 대학교 채플이 끝나고
함께 모여서 밤늦게까지 기도하던 20여 명 남짓의 학생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쏟아붓는(outpouring) 은혜였습니다.

 

캠퍼스에 있던 학생들이
마치 플래시 몹(flash mob)을 하듯이 채플로 모였고
이렇게 시작된 애즈베리 채플 모임은 수만 명이 찾아오는
캠퍼스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애즈베리 현장을 찾은 분들과
참여한 학생들의 방송 인터뷰를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시작이었습니다.
특정 부흥강사나 리더가 의도한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현장 집회를 통해서
다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설교를 듣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뜨거운 부흥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일어난 영적 부흥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애즈베리 대학은 이름 그대로 크리스천 대학이고
일주일에 3번 이상을 채플 출석이 의무라고 합니다.
1970년에도 비슷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서
일주일 동안 예배와 기도회를 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요즘 시대에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부흥이니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자연스러운 시작과 진행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부흥을 사람이 계획하고 의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치면 조작(manipulation)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번 애즈베리 부흥 운동은 수십 명이 남아서 기도하다가
경험한 말 그대로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이었습니다.

 

2.
CNN을 비롯한 주류 언론이 보도할 정도로
애즈베리 부흥(Asbury Revival 2023)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펼쳐지고 지속될지 궁금합니다.

 

애즈베리 대학 당국과 많은 사람이 기대하듯이
영적 부흥이 각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뜨거운 냄비가 금세 식듯이 부흥이 삶으로 내면화되지 않으면
자칫 한 번의 뜨거운 경험으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동안 17세기 영적 대각성을 비롯한 미국의 부흥 운동은
백인 중심의 복음주의권이 주도했습니다.
회개와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사회 정의와 같은 세상의 문제는 무시했습니다.

 

애즈베리 대학교도 공화당이 압도적인 켄터기주에 있습니다.
트럼프 시절 부통령이었던 마이클 펜스는 소셜 미디어에
자기도 켄터키 애즈베리에서 회심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
온 미국과 전 세계로 순수하고 온전하게 퍼져 나가길 기도합니다.

 

3.
사순절을 맞는
우리에게도 영적 부흥을 기대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주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집중하고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일하십니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편 69:32)

 

하나님
주의 임재, 주의 부흥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9 이-메일 목회 서신)

이렇게 기도하라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매년 한 달여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 나눌 주제는 예배 마지막에 함께 부르는 주기도문 송의 가사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합니다. 때로는 중간에 있는 “기도”를 빼고 주문처럼 외웁니다. 본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중언부언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예배나 모임을 끝내는 형식적인 문구로 사용하곤 합니다. 주기도문이 알맹이 없는 형식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번에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맞춰서 우리 기도를 점검하고 바른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에 속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다면,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산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에게 팔복(the beatitude)과 산상수훈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은 새로운 율법입니다. 주기도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로 시작하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마침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기도와 우리에 관한 세 가지 기도로 균형을 이루면서 차례로 진행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에 주기도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을 때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의 시작입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늘 위를 가본 사람이 없으니 우주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하나님은 낮의 구름과 해, 밤의 달과 별 너머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구별되시는 초월적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내려다보실 것이니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자가 되십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능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연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시작 기도에 우리의 진실함, 간절함, 감격과 소망, 하나 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