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매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주보에 싣고 있는

케빈 캐럴(Kevin Carroll)의 <빨간 고무공의 법칙>을 소개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놀던

빨간 고무공이 저자의 인생 전체를 촉진하고, 변화시키고

이끄는 촉매(catalyst)가 되었습니다.

 

촉매에 해당하는 영어 <카탈리스트 catalyst>는

그리스어 <카타류인>에서 왔는데, “풀어내다”는 뜻입니다.

 

잔뜩 막혀 있거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

촉매가 투입되면 열어젖히고 풀어냅니다.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에 촉매를 첨가하면 빠르게 활성화됩니다.

 

저자는 무엇을 하든지

어릴 때 갖고 놀던 <빨간 고무공>을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한없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NBA 프로 농구팀의

피지컬 트레이너(physical trainer)를 두루 거친 후에

나이키 창업자에게 발탁되어서 컨설턴트로 일했습니다.

그 모든 인생 여정에서 빨간 고무공이

저자의 인생에 촉매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떠나고

필라델피아 빈민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란

작고 왜소하고 내성적인 소년이

갖고 놀던 <빨간 고무공>이 있었습니다.

그 정신과 그때의 행복을

인생 굽이굽이에 적용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말 그대로 촉매가 되었습니다.

 

2.

우리에게도

지루한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고,

막힌 인생을 열어주고,

한 단계 두 단계 상승하게 만들어 주는

촉매가 필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동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깜짝 놀랄 정도로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에 정체를 경험하고 있다면,

촉매를 통해서 신앙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촉매가 있다면,

당연히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하나님 말씀도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침반처럼 살아갈 방향을 예측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웁니다.

 

예배는 어떨까요?

예배 속에서 삶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습니다.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성도 간의 교제도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동지를 만나고, 함께 울며 함께 웃으면서

행복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우리 인생의 촉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을 닮은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촉매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촉매입니다.

 

3.

삶에 초대하는 순간 입가에 미소를 가져다주고

마음에 뿌듯한 감동이 밀려오고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동기와 힘이 되는 촉매,

빨간 고무공!

 

우리 각자의 빨간 고무공을 촉매 삼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갑시다.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이

촉매가 되어야 함도 잊지 맙시다.

 

내게 이르시기를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9)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촉매가 되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 30 이-메일 목회 서신)

말씀의 은혜 (3)

지난 한 달 동안, 느헤미야 8장을 갖고 올해 표어 “기도와 말씀으로”가운데 말씀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느헤미야 8장은 70년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하고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갖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나무로 만든 제단에 올라가서 모세의 율법책을 읽으니, 백성들은 모두 “아멘 아멘”하면서 화답하고 얼굴을 땅에 댈 정도로 몸을 굽혀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히브리어가 서투른 사람들을 위해서 레위인과 지도자들이 중간중간에서 통역하고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 집회(bible conference)가 진행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웁니다. 말씀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날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절기에 의하면 새해 첫날이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위로하고 울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날이니 기뻐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했던 말씀을 함께 나눴고 우리 모두 암송하기로 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느헤미야 8장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은혜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받은 은혜를 삶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입니다(느8:13-18). 수문 앞 광장에서 말씀의 은혜를 체험한 백성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잔치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돕고 음식을 나누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백성들의 지도자들과 제사장, 레위 사람들이 모여서 에스라와 더불어 모세의 율법책을 공부합니다. 지도자들이 모인 리더 성경 공부였습니다. 일곱째 달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일주일 동안 지내면서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공부하였습니다(레 23장).

 

초막절에 대한 규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추수 후에 지키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장막을 짓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는 점에서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이라고도 부릅니다. 에스라와 함께 모세의 율법을 공부한 지도자들이 모든 성읍과 모든 백성에게 장막절을 지킬 것을 공포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감람나무 가지, 들감람나무 가지, 화석류나무 가지, 종려나무 가지, 기타 무성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장막을 지을 것도 명령했습니다.

 

백성들이 산에 가서 나뭇가지를 가져와 장막(초막)을 지었습니다. 지붕 위에 지은 사람, 뜰 안에, 하나님의 전 뜰에, 수문 광장에, 에브라임 문 앞 광장에 초막을 짓고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여호수아 이래 모든 백성이 장막절을 지킨 것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17절). 에스라는 매일 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어주고, 백성들은 말씀의 은혜를 만끽하며 기뻐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삶 속에서 실천했고,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河-

작심삼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새해가 시작된 지 어느덧 20일이 넘었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을 대입하면

벌써 일곱 번은 새로 결심할 시간입니다.

 

오십이 되기 전까지 새해를 맞으면

하나님 앞에서 하고 싶은 일,

이웃과 관계에서 해야 할 일

저 자신과 관련된 일로 나눠서

새해 계획을 꼼꼼히 세웠습니다.

 

그리고 연말이 되면

새해에 세운 계획을 일일이 점검했습니다.

 

오십이 넘으면서

제가 주도하는 삶을 살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작정으로

따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한 해 동안 하고 싶은 일들

몇 가지를 선정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만,

작심삼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2.

2-3년 전부터 세우는 새해 계획이 있습니다.

책꽂이의 책들 가운데 읽지 않고 꽂아만 놓았던

책을 꺼내서 한 장(chapter)라도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심삼일이었습니다.

책 몇 권 꺼내서 읽다가 일 년이 지났습니다.

 

올해도 같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먼지가 앉을 정도로

케케묵은 책들은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20일이 지났건만,

아직 시작을 못 했습니다.

작심만 하고 20일이 흘렀습니다.

올해는 꼭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개운할 것 같습니다.

 

3.

결심한 것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심한 것,

사람들에게 결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결심한 것을 모두 지킨다면

보통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계획하고 결심한 것을

스스로 만족할 정도만이라도 지키기를 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아하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감정적인 의미보다

언약을 지킨다는 ‘의지적인 면’이 더 큽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을 지킨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늘 작심삼일이었습니다.

 

올 한 해 새해에 계획하고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약속(언약)한 것을 지키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의지’가 우선함을 기억합시다.

 

저도 올해 계획한

책 읽기를 절반이라도 꼭 실천하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5)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절대 작심삼일이 없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 23 이-메일 목회 서신)

말씀의 은혜 (2)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우는지라”(느8:8-9).

 

바빌론에서의 70년 포로 생활은 짧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히브리어로 기록된 토라(모세오경)를 읽고 암송했습니다. 그래도 바빌론에서 태어난 백성들은 히브리어가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주소였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습니다. 중간중간에 있는 레위인들과 지도자들이 그 뜻을 해석해서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세심하게 서로를 배려하는 모임입니다. 그때 말씀의 은혜가 임했다고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울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하나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말씀에 주목했고, 말씀을 들었고, 가르쳐주는 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니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이 청중들에게 전달되고 각 개인은 물론 공동체 안에 말씀이 역사했습니다.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음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소 경험했습니다.

 

총독 느헤미야,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와 레위인들이 백성들을 위로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와서 처음 함께 모였습니다.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날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70년 바빌론 포로 생활의 압제와 괴로움에서 비로소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눴던 이해인 수녀의 싯구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너무 오래 울지 말고 적당히 울 때…눈물은 진주를 닮은 하나의 꽃이 됩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임했어도 그 자리에 머물면 안 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집에 가서 감사의 애찬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가난한 이웃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라는 부탁도 잊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말을 들은 레위인들이 백성들을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느헤미야가 멋진 말을 합니다:“이날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 이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마냥 울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근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백성이 해야 할 일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의 기쁨이 너희의 힘이라”가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할렐루야! -河-

에이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봄 안식 기간에

이탈리아 남쪽에 위치한 폼페이에 갔었습니다.

나폴리에서 기차를 타고 40여 분 내려갔는데

유명한 관광 명소답게 세계 각지에 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폼페이는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로 유명하듯이,

주 후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18시간 만에 모든 도시가 화산재에 뒤덮였습니다.

 

로마보다 먼저 세워진 유력한 도시였습니다.

물고기 모양으로 도시를 계획했고

물고기 눈에 해당하는 원형 경기장은

폼페이 유적지 남쪽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1592년 운하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땅 밑에 숨겨진 도시를 발견해서

폼페이 유적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도 발굴과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화산재가 밀어닥치면서

화려했던 도시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당시 연회장이나 친목의 장소였던 커다란 대중목욕탕도

검투사(그레디에이터) 경기장도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대저택들도

뜨거운 화산재에 녹아 내렸습니다.

 

미처 도피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죽은

폼페이 주민들의 모습이 화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폼페이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이

자연재해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음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3.

AI까지 동원해서 재해를 관리하는 요즘에는

웬만한 자연재해는 미리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LA 산불을 보면서

망연자실(茫然自失)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멍하니 TV 화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화마(火魔)가 훑고 간 도시는

폼페이가 생각날 정도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주민들이 미리 대피할 수 있었기에

인명 피해가 크지 않은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현재까지 2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생명이 중요하기에

희생자들의 사진이 TV 화면에 뜰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3.

정확히 2년 전인 2023년 1월 8일

목요 서신의 제목도 오늘과 똑같이 <에이카>였습니다.

 

히브리어 <에이카>는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되고

하나님의 성전까지 무너진 것을 놓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탄식하면서 외친 한 마디였습니다.

 

“어찌하여!” “슬프다” 는 탄식입니다.

 

2년 전에는

예레미야 애가를 아침에 묵상하면서 에이카를 소개했는데,

오늘은 세상에 닥친 재난과 비극, 위기와 혼란 앞에서

실제로 <에이카>를 외칩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분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살려 주옵소서.

 

에이카!

어찌하오리이까!

 

슬프다[에이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애가 1:1)

How lonely sits the city that was full of people! (Lam 1:1)

 

하나님,

믿음 안에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는 세상을 기다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 16 이-메일 목회 서신)

말씀의 은혜 (1)

<기도와 말씀으로>라는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느헤미야 8장 말씀을 차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을 한자어로 “학습(學習)”이라고 합니다. 두 글자를 떼어서 생각해 보면, “학(學)”은 배우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 또는 필요한 것을 배웁니다. 이론을 배우는 것입니다. “습(習)”은 배운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삶의 기술로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공부(배움)는 학(學)을 넘어서 습(習)에 이를 때 온전해집니다.

 

저의 경우 이론적인 것을 소개하고 알려드리는 것은 열심히 실천하는데, 참빛 식구들께서 공부하신 것을 습득하고 그대로 따라 사시는 지 여부를 점검하는 것에 소홀하고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일이 검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저의 성품 탓도 있습니다. 저는 부족해도 참빛 식구들의 공부가 “학(學)”에 그치지 않고 “습(習)”까지 이르러서 온전한 학습(學習)이 되길 바랍니다.

 

느헤미야 8장은 70년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곽을 완공한 후에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갖는 말씀입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백성이 모였습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갖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백성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에스라가 읽어주는 모세의 율법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히브리어가 어눌한 백성들을 위해서 레위인과 지도자들이 통역하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에스라가 나무로 만든 단상에 서서 율법책을 펼치면 모든 백성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여호와를 송축하면,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했습니다. 얼굴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혀서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로 있으면서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갈 것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린 70년이었습니다. 처음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어르신들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고, 새로 태어난 아기가 70이 되었습니다. 긴 시간인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초라합니다. 아직 성전도 없습니다. 여전히 삶이 피곤하고 힘에 겹습니다. 바빌론에 있을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성곽을 완공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온 민족이 모인 집회 한 가운데는 에스라가 읽고 있는 “모세의 율법책” 즉 하나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올 한 해 우리 교회의 예배에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감동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예언자 아모스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때

구약 성경 아모스를 펼쳐 읽습니다.

 

아모스는 남유다 예루살렘 출신인데

북이스라엘 사마리아에 올라가서 활동했습니다.

텃세가 심했습니다.

게다가 아모스의 예언은 집요했고, 거칠었고

그릇된 것을 고발하고 지적하기에 충분히 예리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살 때입니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강한 자들이

약한 백성들을 약탈해서 자기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공의(바름)와 정의(공평)가 무너졌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고 고발합니다.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참 빛이 세상에 왔지만,

어두운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빛을 빛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치부가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수치심이라도 있었으면 다행입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이상 어두움에 거하지 못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어두움의 수렁에 빠져버린 것이지요.

 

어두움 속에서는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무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 배만 채우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거친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악의 실체요 본성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3.

지난 토요일 아침 기도회에서

성경에는 예언자 신앙과 제사장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사장 신앙은 예루살렘 성전이 중심입니다.

체제를 보호하고 기존의 신앙을 고수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전통을 유지해야 하기에 많은 사람을 품고 갑니다.

 

예언자 신앙은 모세로 대표되는 광야 신앙입니다.

제사장 직분이 세습되는 것과 달리

예언자들은 그때그때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에 외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행동하는 몸짓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체제를 향해서 쓴 소리하고

잘못된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공의와 정의를 촉구했습니다.

 

제사장이 인기를 얻었다면,

예언자들은 대부분 미움을 받았습니다.

 

2025년 새해의 시작이 쉽지 않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그립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을 쫓아 살았습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꿈꾸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오직 정의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하나님,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 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