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손과 발 (3)

올해도 어김없이 대림절(Advent)을 맞았습니다. 대림절(대강절)은 교회력에서 첫 번째 절기입니다. 그러니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부터 새해가 시작된 셈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까지 4주 동안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을 물리치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일마다 촛불을 하나씩 켜면서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온 교회와 참빛 식구들께 뜻깊은 대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시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을 사셨습니다. 그중에 마지막 3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공적인 삶(공생애, public life)을 사셨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나눴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생님이셨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기적을 행하셨고,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시던 모습을, 예수님의 생각(“생명”), 예수님의 마음(“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평화”)로 나눠서 연속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대하면서 나누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을 닮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예수님의 손과 발 세 번째 시간은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외하면 모든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니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먹는 것도 잊고 예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그때 한 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드린 음식을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니, 오 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는 여러 개의 손이 등장합니다. 도시락을 제자들에게 전해주는 아이의 손,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들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손, 예수님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제자들의 손, 떡을 받아먹는 백성들의 손까지 오병이어의 기적은 손을 통해서 성취되고 전해졌습니다. 그중에 으뜸은 떡과 물고기를 들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놀라운 기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河-

감사에서 기다림으로

Happy Thanksgiving!

 

1.

제가 처음 담임 목회를 시작했던

인디애나 교회는 장소와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에

수요 예배 대신에 목회서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1, 2, 3 숫자로 단락을 구분하면서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때까지 포함하면, 목회하는 내내 수요일 또는 목요일마다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보낸 셈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인들께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서

서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빠름도 실감하고,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함을 스스로 배웁니다.

 

목요일마다 이-메일 서신을 보내기에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대개 한 해의 감사한 일을 돌아보면서 준비합니다.

 

2025년 올해는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25년,

샌프란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 20년을 맞는 해이기에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제안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

힘들 때 조용히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아 주었던 이웃도 기억하길 원했습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힘들 때 함께 해주고

지친 손을 잡아 주면서 위로와 힘을 주었던 손,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손길이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좋으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친지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뜻깊게 보내기 원합니다.

 

3.

감사절이 끝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강단에 네 개의 촛불도 준비했습니다.

매주 하나씩 켜면서 온 교회가 예수님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트리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일에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트리를 장식하면서

교회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쌓고

성탄을 기다릴 것을 눈에 그리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무엇보다 사분오열 갈라져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세상에 온전한 샬롬이 임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에 더욱 마음이 설렙니다.

 

2025년 성탄에는

우리들과 세상에 어떤 기쁜 소식을 갖고 오실는지요!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하나님,

감사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7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과 발 (2)

예수님의 생각, 마음, 손과 발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서 만지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신 말씀을 나눴습니다(막1:40-42절).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을 어기시면서 그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서 나병 환자를 만지신 예수님의 손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충분히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서 만지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동시에, 보기 흉측한 환부를 손을 내밀어 만지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직접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도 비슷합니다. 지난주에 나병환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듯이, 오늘 본문에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나 자신의 죗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사고입니다. 당시 상상도 못 했던 혁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탈피(脫皮)’ 즉 기존의 틀을 벗어내고 새로운 사고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임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웁니다. 기존의 생각에 얽매이면, 탈피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생각에 집착해도 새로운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전통 역시 새로운 사고를 방해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나눴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무한대로 열려있는 시스템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만드시고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바르십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모습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료행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해서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도 나옵니다(막7:32-35).

 

오늘 본문만큼 예수님의 손길을 자세히 설명한 복음서 기록도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진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도 생각날 정도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손수 빚은 진흙을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맹인이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니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河-

온전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마음에 이어서

지난주부터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생명”

예수님 마음은 “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은 “샬롬(평강)”이

핵심 메시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이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처럼 보기 흉하고 치명적인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부정하였기에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살리셨습니다.

 

2.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나병환자(레프로스, leper)라고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나병에 대한 규정으로 알려진

레위기 13장 본문에는 “나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가

오늘 날의 한센병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악성 피부병”이라고 옮겼습니다.

 

예배 후 한 집사님께서

레위기에서 묘사한 증상들이

오늘날 피부암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피부암은 전염되지 않는데,

억울하게 격리되어서 암과 싸우는 경우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어나 표현은

성경이 쓰일 당시에 통용되던 것입니다.

요즘의 과학이나 의학에 비교하면, 턱없이 미천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는

성경이 쓰일 당시로 꼭 찾아가서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교리에 묶여서

당시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3.

레위기에서 피부에 발생한 질환과

그로 인해서 옷이나 물건까지 부정하다고 엄격히 규정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온전함(wholeness)”과 관련됩니다.

 

질환으로 인해서 피부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하나님의 벌 또는 저주라고 봐서도 안 됩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온전함’을 지향하듯이

우리의 성경 읽기 역시  ‘온전함’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올바른 해석과 바른 신앙을 갖출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8)

 

하나님,

매사에 온전함을 추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0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과 발 (1)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마음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으로 대표되는 죽음을 이기고 세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살림(살길)”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세력들이 많습니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배제하고 생명을 선택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생명을 사랑으로 이웃에게 전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갑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 외로운 이웃들, 힘이 없는 이웃들의 친구가 되고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되갚는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예수님의 생각, 마음에 이어서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살리시는 예수님,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손과 발로 연결되고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생명’이,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있었다면, 손과 발에는 “샬롬(평화)”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로 여겼습니다.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기에 세상에서 격리되어 지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의 율법에 근거한 조치였습니다(레13-14장). 피부에 의심되는 질환이 생기면 곧바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정함과 부정함을 분별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나병처럼 심각한 피부질환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제사장에 오면, 7일 동안 격리해서 질병의 진행 상황을 살폈습니다. 7일 후에도 그대로이면 7일을 더 격리했고, 그때도 문제가 없으면 정하다고 판정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14일의 격리와 진찰에서 나병으로 판정되면 부정함이 확정되고 격리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부정한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외치면서 나병환자를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환부를 손으로 만지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나병 환자, 부정한 그의 질환을 만지시는 예수님의 손은 치료와 회복의 손입니다. 죄와 저주에 살던 나병 환자에게 그리스도의 샬롬이 임했습니다.-河-

애통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울음, 예수님의 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로 향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니 슬퍼하는 친지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우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울음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에덴을 내보내는 순간

하나님은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하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주야로 울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울음은 곧 하나님의 울음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시고, 예수님께서 우셨으니

우리 역시 우는 것이 결코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진실함도

울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경우에 맞는 울음은 숭고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八福)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젊어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과도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애통(哀痛)의 의미가 새롭고 깊게 다가옵니다.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토스>는

사랑하는 친지가 죽었을 때 느끼는 비통(悲痛),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흐느끼는 통회(痛悔),

삶 속에서 닥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포함합니다.

 

인생이 우리 동네 날씨처럼 항상 맑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잘못이 없어도,

갑자기 밀어닥치는 손님처럼

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마음껏 울 수 있습니다.

서러움에 흐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치면서 엉엉 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으니

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

저도 예전에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강단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가셨기에

아내 역시 자리에서 울면서 함께 애통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우리 교회 교육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베트남 출신의 전도사가 새벽에 일부러 찾아와서 함께 울어준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우시는 예수님이 되어서

누군가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1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