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Nicodemus)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 conqueror of the people”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공한 인물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를 70인으로 구성된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을 관할한 최고 의결 기구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손색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나오지만,

바리새인들은 랍비로 대표되듯이

유대교 안에서 영향력이 무척 컸습니다.

 

2.

예수님 당시 종교적으로/사회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하면 출신성분은 물론

나이도 훨씬 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랍비(스승)라고 부릅니다.

 

신분 격차와 차별이 확실히 존재했던 당시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파격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본문에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추측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이룬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가장 밑에 있는 고민입니다.

 

3.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영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공회원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워낙 바쁜 일상이어서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로 영적인 일이

다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그것도 모르냐?”는

예수님의 핀잔 섞인 말에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니고데모는 갈급했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급함입니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에 대한 고민이고 질문입니다.

성경은 니고데모가 답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놓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논쟁할 때,

온건하지만 예수님 편에서 발언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장례에 향품 70파운드를 갖고 찾아옵니다.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선언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결과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놓고 고민한 결과입니다.

 

니고데모의 영성(신앙)을 닮고 싶습니다.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것을 두고 고민하고 신앙 안에서 풀어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시대의 니고데모가 되기 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 (요3:3)

 

 

 

하나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7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과 니고데모 (2)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선생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찾아온 것을 보니 그에게 고민 또는 예수님을 만나서 풀고 싶은 문젯거리가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심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신 랍비(스승)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로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이 정도로 높이고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표적에 관심이 없습니다. 표적을 본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니고데모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입니다.

 

거듭남에는 “다시”라는 뜻과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땅의 존재(old being)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는 것이 거듭남(born-again)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 성경에서 배경 화면처럼 익숙하고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찾아와서 다윗 왕국과 같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거듭남은 니고데모에게 생소한 말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묻습니다:“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4절). 사람이 한번 태어났고 나이가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날 수 있냐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일반적인 상식을 갖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차근차근 예수님과의 대화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열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과 성령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에스겔 36장 25-27절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은 서로 짝입니다. 물로 정결케 된 부드러운 마음에 성령이 임해서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된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입니다.-河-

2월 29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4년마다 찾아오는

2월 29일 윤일(閏日)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데 걸리는 기간은

365.2422일이랍니다.

지구의 관점으로 보면

태양이 춘분해서 시작해서 다시 춘분점으로 오는 기간입니다.

 

달력에서는 1년을 365일로 규정하니

지구의 정확한 공전 주기에 맞추기 위해서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산하면 1년이 365.2425일이 됩니다.

실제 지구의 공전 기간보다

윤달을 고려한 우리 달력이0.003(25.92초)가 길어졌습니다.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

윤년 중에서 1800, 1900년처럼 100으로 나눠서 떨어지는 해는 윤년을 없애고,

2000년처럼 400으로 나눠서 떨어지면 그대로 윤년을 지킵니다.

 

실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공전주기와

365일로 규정한 우리 달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복잡한 계산법입니다.

 

2.

이 정도의 미세한 차이는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1250년을 지냈는데,

1582년에 점검해 보니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제정한 부활절에서

10일 이상 빨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주전 46년부터 사용해 오던 율리우스력을 수정해서

지구의 공전 주기에 0.003초만 빠른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2월 29일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365일이 아닌 366일을 삽니다.

덤으로 하루를 더 갖게 되었습니다.

 

2월에 군대에 입대한 청년들은 군대 생활을 하루 더해야 합니다.

월마다 봉급을 받는 분들은 하루 더 일하고 같은 월급을 받습니다.

한국의 경우, 봄방학이 하루 길어집니다.

 

작은 것들인데, 생각보다 여기저기서 차이가 납니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세상입니다.

 

2월 29일이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 주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3.

2월 29일을 보면서

작은 것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우리 삶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관리해야 함도 배웁니다.

촘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정도 차이는 괜찮아’하면서

무심코 넘어가면 나중에 커다란 차이를 야기할 수 있으니

세심하게 챙기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마음과 생각을 정확하고 치밀하게 조율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4년 동안 저축해 놓았다가

되찾은 2월 29일을 뜻깊게 보냅시다.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잠언11:1)

 

 

하나님,

 정확하고 치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2. 29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과 니고데모 (1)

니고데모

 

올봄에는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차례로 공부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속에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 유명한 말씀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의장인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자치 조직으로 행정과 사법을 총망라하는 최고 의결 기구였습니다. 이들을 유대인의 지도자(ruler)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니고데모의 사회적 위치가 무척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구약의 율법을 해석하고 그대로 따라 살아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하려는 사람들로 구성된 당파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을 위선적인 사람들로 묘사하지만,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진실한 랍비들도 있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에서 유대인의 스승인 랍비가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성향과 열심을 알려줍니다.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공회에 들어갔으니 유대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들의 정복자 (conqueror of the people)”라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서 니고데모의 지위와 힘이 느껴집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지위를 감안했을 때, 대낮에 공개적으로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찾아오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소문,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셔서 장사꾼들을 내쫓고,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선포하신 사건,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요2장).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사역을 보고 내린 판단입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원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예삿일이 아닌데,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그가 갖고 있던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용기를 닮기를 원합니다.-河-

밋밋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코로나바이러스를 경험한 세상은

예측불허, 각자도생, 일파만파입니다.

 

팬데믹 전까지 이어지던

많은 지표의 그래프가 팬데믹 동안

잡음(노이지)을 내면서 아래위로 크게 움직이더니

팬데믹이 끝난 후에는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는 매우 좋은데

대기업의 강제 해고는 늘어갑니다.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공동체라는 개념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우선 내가 살아남아야 합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 누구도 내 삶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기존의 언론매체인 신문이나 공적인 방송은 힘을 잃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90년대 초 걸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하는CNN 기자가 영웅이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소셜 미디어에 올립니다.

일파만파(一波萬波) – 세계의 소식이 매우 빠르게 전해집니다.

 

2.

세상이 이렇게 변화되니

새롭고, 자극적이고, 특별하고 빠른 것에 주목합니다.

 

보통의 말을 하고

보통의 일을 하는 것은 주목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점점 더 특별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고 추구할 수 밖에요.

유행에 민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동시에 꽤 많은 결과를 쏟아내는 요즘 세상에서

“천천히” “밋밋함” “쉼”과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공생애(public life)는

요즘 세상의 트렌드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동안 차근차근 천천히 모두 완수하셨습니다.

절대로 서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예수님의 사역은 매우 밋밋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되살려서 복음서와 서신서에 기록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틈만 나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지 묻고 조율하며 자신을 돌아보셨습니다.

배 안에서 주무시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정도로

틈틈이 쉼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결코 화려한 것은 아닙니다. 밋밋한 일상입니다.

때로는 세상 풍조를 거슬러 가는 여정입니다.

그래도 뚜벅뚜벅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3.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잠깐 멈춰서 우리 삶을 돌아봅시다.

하루에 4-5분이라도

삶의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봅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밋밋해도 상관없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62:5)

 

 

하나님,

밋밋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2. 22 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 (10) 목마른 내 영혼

목마른 내 여혼 (찬송가 309장)

 

새해 우리 교회 표어 <든든히 서게 하소서>에 관한 연속 설교가 끝나고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는 열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찬송가 309장 <목마른 내 영혼>입니다. 두 주전 수요예배에서 이 찬송가를 함께 불렀는데, 경쾌한 멜로디와 진실함이 깃든 가사에 모두 은혜를 받았습니다:“목마른 내 영혼 주가 이미 허락한/ 그 귀한 영생수 주여 갈망합니다/ 그 약속 따라서 힘써 간구하오니/ 오 주여 내 기도 어서 들어 주소서”(1절).

 

작사가 헨리 젤리(Henry Zelley, 1859-1942)는 뉴저지에서 태어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테일러 대학에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리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1929년에 은퇴하기까지 1,500편의 찬송을 작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입니다.

 

<목마른 내 영혼>의 경쾌한 멜로디를 작곡한 헨리 길모어(Henry Gilmour, 1836-1920)는 10대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페인크공으로 일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입대해서 남군에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청년 시절을 보낸 길모어는 서른세 살에 치과의사가 됩니다. 뉴저지에 살면서 개척 교회를 돕고 40여 년 찬양대를 섬겼습니다. 목사가 아닌 평신도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갖고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목마른 내 영혼>을 작사한 헨리 젤리는 박사학위까지 받은 목사요 부흥사였습니다. 게다가 천 편이 넘는 찬송시를 작사한 시인이었습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은사를 갖고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것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 두 편이 그때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한반도, 대한민국 찬송가에 실려서 즐겨 불릴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목마른 내 영혼>을 작곡한 헨리 길모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십대에 이민 와서 전쟁터에 나갔던 헨리 길모어가 치과의사가 되었습니다. 40여 년 교회 찬양대를 인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힘겨운 인생길을 하나님 의지하면서 힘차게 살았던 인물입니다.  <목마른 내 영혼> 찬송의 경쾌한 멜로디가 그의 인생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 어떤 흔적으로 남을지 모릅니다.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서 열심히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하는 일까지 귀하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한 주간 힘차게 삽시다.-河-

신뢰

좋은 아침입니다.

 

1.

2024년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정한

올해 사순절 주제는 “신뢰(Trust)”입니다.

 

신뢰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생길을 걷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다음에는

가족, 공동체 식구들, 이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믿음들’입니다.

 

이처럼 신뢰의 회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이웃을 믿고 신뢰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2.

샌프란 시내를 운전하다 보면,

웨이모(Waymo)라는 자율 운전 자동차를 쉽게 만납니다.

 

예전에는 운전자가 타고 있었는데,

요즘은 운전자 없이 운행하고 있습니다.

작년 8월부터는 승객까지 태워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누비고 있지요.

 

현재는 신청하는 사람들에게 초대권을 발부해서

승차하는 방식이지만(대기인원이 10만명에 육박한답니다)

안전도 시험을 완벽히 통과하면 우버나 리프트보다

저렴하게 자율주행 택시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웨이모 회사에서는

수많은 센서로 주변을 인식하고

인공지능(AI)을 통해서 시내 지형은 물론

임의의 상황을 모두 숙지하고 있기에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소개합니다.

 

그동안 웨이모 차량이 시험 운전한 거리가

지구와 달을 14번 왕복할 정도랍니다.

첨단 과학 기술을 탑재한 것과 동시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시험 운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불안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차이나타운을 운행하던

웨이모 차량을 탈취해서 불에 태우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차 안에 승객은 없었습니다.

 

일주일 전에는

웨이모 차량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부딪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교차로에 커다란 트럭이 지나가면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끼어들어서 발생한 사고였습니다.

웨이모 차량이 급하게 정차하면서 큰 사고를 면했고

차량에 타고 있던 승객은 안전했답니다.

 

3.

언젠가는 믿고 이용하겠지만,

아직은 자율 주행 차량에 탑승할 자신이 없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샌프란 시내를 주행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하여튼, 세상은 과학 기술을 믿고

자기 몸을 맡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옅어 지는데

과학 문명에 대한 신뢰는 높아만 가는 것도 흥미로울 뿐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어떻게 될까요?

다른 것은 모두 믿으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은 없어야 할 텐데요.

 

하나님을 ‘먼저’ 확실히 믿고 싶습니다.

아주 커다란 믿음, 변하지 않는 믿음 F-A-I-T-H를 갖고 싶습니다.

그 안에서 이 세상 사람이나 기술, 기계를 믿는 믿음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올해 사순절을 은혜롭고 보내길 원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115:9)

 

 

하나님,

주님만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2. 1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