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 사람 나아만 (1)

겸손: 나아만 장군

 

지난 주에 공부한 헷 사람 우리아는 충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다윗은 물론 자신이 속한 군대에 충성을 다했고,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심의 표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은 아람사람 나아만 장군을 공부합니다. 시리아로 불리는 아람은 이스라엘 북동쪽에 위치한 강대국이었습니다. 다메섹 (다마스커스)이 아람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과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갈등과 전쟁을 거듭했습니다. 아람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약소 국가입니다.

 

오늘 본문(1절)은 아람 사람 나아만을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였음이라” “그는 큰 용사니”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통해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고 유일한 신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 환자”였습니다. 나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므초라>는 일반적으로 피부에 생기는 질환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곤 하니 나아만의 나병이 접촉을 금지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보기 흉했고 완치가 불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종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작은 소녀>라는 뜻으로 <큰 용사>인 나아만과 대조를 이룹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여종의 말을 듣고 왕의 허락을 받아서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를 만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문 밖에 세워 둔 채 종을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나아만 장군은 약소국 선지자 엘리사에게 무시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 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을 것을 부탁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부하들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작은 소년>의 피부처럼 회복했습니다.

 

비록 몸에 심각한 피부병을 갖고 있었지만, 나아만은 아람왕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사용하실 정도로 위대한 군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출신 작은 소녀이자 여종의 말을 들었고, 부하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엘리사 말대로 일곱 번 요단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아만은 순종의 인물입니다.

 

순종은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들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순종의 완성입니다.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고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만든 이방인 나아만 장군의 겸손과 순종이 돋보입니다.-河-

일상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일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특히 기도 응답)을 생각하면
특별한 기적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이 등장하니
그것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식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살아서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기적만 바라보는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쉽게 눈에 띄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자칫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2.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특별해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일상을 사는 것에 지치고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삶 대부분이 일상입니다.
특별한 순간은 구름 속에 잠깐 얼굴을 내밀고 세상을 비추는
해님처럼 금세 지나갑니다.

 

3.
일상을 사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 충실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소개했던
주일마다 저에게 신문을 전해 주시던
뉴욕의 집사님을 다시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교회에서 눈에 띄는 직책을 갖고 계시지 않았고
아이들이 어려서 중고등부를 맡았던 저와 겹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막 도착한 중고등부 전도사에게
매 주일 신문을 모아서 슬쩍 전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교인들도 거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집사님께서 주시는 신문은
읽지 않으신 새 신문 같았습니다.
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조심스레 신문을 펼치고 읽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일상을 사시고, 일상에서 사랑을 실천하신 집사님이셨습니다.

 

그 정성과 마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신문을 전해 주시던 집사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집사님의 작은 사랑, 작은 배려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일상의 배려와 사랑의 힘입니다.

 

사소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에 성실하고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진짜 특별한 순간입니다.

 

일상의 배려와 사랑이 모여서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수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과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하나님,
작은 것에 충실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14이-메일 목회 서신)

헷사람 우리아

충성: 헷사람 우리아

 

앞으로 5주 동안 성경에 나오는 외국 출신(이방인) 군인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전통 속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몸에 갖고 있는 할례를 하나님과 자기들 간의 최고 언약으로 여겼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백성의 위치에 결코 이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 fearer)”라고 부르면서 할례받은 자신들과 구분하고 차별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는 외국인으로 하나님을 믿거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헌신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타인”입니다. 결코 자기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외지인, 즉 아웃 사이더입니다. 이처럼 차별이 큰 사회에서 성경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다면 특별한 인물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는 외지인이지만, 하나님은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역사 속에 이름을 새겨놓은 외국인 장수(장교)들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우하심을 다시금 깨닫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지평을 넓히고 싶습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은 다윗이 범했던 밧세바의 남편 헷 사람 우리아입니다. 우리아가 속한 헷 족속은 가나안 토속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헷 족속은 이스라엘에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헷 족속”이라는 꼬리표가 없어지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배타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 가문에 장가갔습니다. 그 덕택에 아름다운 아내 밧세바를 얻었고 왕궁 가까이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장수가 되었고, 훗날 다윗이 자기에게 서른일곱 명의 장군을 선정했는데 우리아도 이들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삼하 23:39).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쟁에서 불러들여서 밧세바와 동침하게 합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전쟁터에 있는데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집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서 밧세바를 범한 다윗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살인 교사하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우리아는 안타깝게도 다윗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할 정도로 기억되었습니다(마 1:6).-河-

 

악의 평범성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악의 평범함 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조직적으로 주동한 인물입니다.
체포된 후에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한나 아렌트는 그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실한 정부 관리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환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유대인 학살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실행했습니다.
죄 속에 들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요 행동인데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함>이라고 불렀습니다.

 

2.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이라는 용어는
큰 울림을 주는 무서운 표현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죄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환경에 있으면
양심의 가책 없이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 설교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찬송가를 지은
존 뉴턴이 살던 영국 사회가 노예무역을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여긴 것이
<악의 평범함>의 한 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노예무역과 노예를 두고 사는 것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존 뉴턴도
노예 무역상의 선장으로 악의 평범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면서
노예무역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정치인을 발굴하고 격려하면서
영국의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악의 평범함에서 벗어났고 악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3.
존 뉴턴이나 윌버포스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세상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어떤 영역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범하는 죄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악의 평범함>
–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두고두고 곱씹을 용어입니다.

 

우리도 잘못된 일을 무심코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죄책감이나 문제의식 없이 행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 배척,
관행처럼/습관처럼 내려오는 그릇된 일들,
“다른 사람도 하는데 뭐”라고 생각하면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
– 평범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릇된 일들을 찾아내고 시정해서
밝고 맑은 세상을 세워 나가기 원합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 140:12)

 

하나님,
우리 안에 무심코 행하는 악한 일들이 있으면
깨우쳐 주시고 고칠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7 이-메일 목회 서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쳤습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각자에게 맞는 기도 방식을 개발해서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일상입니다.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누구나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하나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을 지은 존 뉴턴(John Newton)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와 당대의 부흥사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신앙 지도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뉴턴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뉴턴이 여섯 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뉴턴의 아버지는 무심한 성격의 무역선 선장이었습니다. 뉴턴이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단 2년뿐입니다. 아버지의 강요로 열 살이 되었을 때 배를 타기 시작해서 20여 년 이상을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노예로 팔려서 죽을 고비를 당할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노예 무역선의 선원이던 뉴턴이 3년 동안 노예들의 노예가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구출되어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바다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난파될 정도가 되었을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전해주신 신앙이 다시 살아났고, 틈틈이 읽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신앙 서적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1748년 3월 21일 하나님을 만나는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뉴턴은 노예 무역선에 올랐지만 6년 후 뇌전증(간질병)이 생기면서 배를 타지 못하고 독학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한 신학을 공부해서 39세에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40년 이상 목회하면서 영국의 영적 부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면서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 해방 법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뉴턴은 변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자기가 죽을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그런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는 역대의 찬송이 탄생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잃었던 생명을 찾았고 광명을 얻은 뉴턴의 신앙 고백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감동과 은혜를 줍니다. -河-

내려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상반기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팬데믹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대하면서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주제로 새해를 맞았습니다.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온전한 세상이 되지 못했고
7불에 육박하는 개스비와 높은 물가 상승,
전쟁과 총기 사고 등으로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지난 반년을 꿋꿋하게 살아오신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큰 박수를 보냅니다.

 

2.
서양에서는 일찍이 누구나 피하고 조심해야 할
7개 죄악(seven deadly sins)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교만(pride), 시기(envy), 분노(wrath), 게으름(sloth),
욕심(greed), 식탐(gluttony), 색욕(lust).

 

일곱 가지 모두
성경에서 삼가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올해의 반년을 보내고 하반기를 맞으면서,
일곱 가지 죄들 가운데 “욕심”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욕심에서 “욕(慾)”의 한자어는
“하고자 할 욕(欲)”자 아래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친 것이 욕심입니다.

 

말 그대로 탐욕입니다.
과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려는 마음입니다.

 

욕심에 해당하는 영어 greed 역시
물질이나 소유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갖고 싶은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많이 갖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본성을 신앙으로 제어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욕심만 내려놓아도 우리 삶이 한결 가볍고
많은 것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3.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과한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13:8).

 

믿음, 사랑, 소망 세 가지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고전13:13)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을 때
욕심이 슬며시 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욕심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2022년 한반기를 맞으면서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을 장착하고 싶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만 작은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5)

 

하나님,
우리 안에 욕심이 사랑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30 이-메일 목회 서신)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5)

힘쓰고 애써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살펴본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셨지만, 돌 던질 만한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잔을 옮겨 달라고 솔직히 간청하신 후에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는 절대적인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러나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길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단지 두 문장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은 자세만큼 처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 힘을 더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바라면서 한 주간 살았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기대했습니다.

 
오늘 본문(44절)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보여줍니다. “힘쓰고 애써”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납니다. 헬라어 본문은 “고뇌 속에서 매우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고뇌(agony)”라는 단어 속에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죽했으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하지만 우리 성경이 고뇌가 아닌 “힘쓰고 애써”라고 번역한 것은 고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니아>에 비장한 결심 또는 각오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큰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가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경기를 앞둔 비장한 각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기에서 승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담대하게 경기에 임하겠다는 용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지 않으셨습니다. 헬라의 사상가들이 비판했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담대히 맞이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바닥에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였습니다.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며 슬퍼하면서도 잠들고 말았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