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상반기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팬데믹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대하면서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주제로 새해를 맞았습니다.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온전한 세상이 되지 못했고
7불에 육박하는 개스비와 높은 물가 상승,
전쟁과 총기 사고 등으로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지난 반년을 꿋꿋하게 살아오신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큰 박수를 보냅니다.

 

2.
서양에서는 일찍이 누구나 피하고 조심해야 할
7개 죄악(seven deadly sins)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교만(pride), 시기(envy), 분노(wrath), 게으름(sloth),
욕심(greed), 식탐(gluttony), 색욕(lust).

 

일곱 가지 모두
성경에서 삼가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올해의 반년을 보내고 하반기를 맞으면서,
일곱 가지 죄들 가운데 “욕심”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욕심에서 “욕(慾)”의 한자어는
“하고자 할 욕(欲)”자 아래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친 것이 욕심입니다.

 

말 그대로 탐욕입니다.
과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려는 마음입니다.

 

욕심에 해당하는 영어 greed 역시
물질이나 소유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갖고 싶은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많이 갖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본성을 신앙으로 제어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욕심만 내려놓아도 우리 삶이 한결 가볍고
많은 것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3.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과한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13:8).

 

믿음, 사랑, 소망 세 가지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고전13:13)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을 때
욕심이 슬며시 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욕심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2022년 한반기를 맞으면서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을 장착하고 싶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만 작은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5)

 

하나님,
우리 안에 욕심이 사랑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30 이-메일 목회 서신)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5)

힘쓰고 애써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살펴본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셨지만, 돌 던질 만한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잔을 옮겨 달라고 솔직히 간청하신 후에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는 절대적인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러나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길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단지 두 문장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은 자세만큼 처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 힘을 더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바라면서 한 주간 살았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기대했습니다.

 
오늘 본문(44절)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보여줍니다. “힘쓰고 애써”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납니다. 헬라어 본문은 “고뇌 속에서 매우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고뇌(agony)”라는 단어 속에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죽했으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하지만 우리 성경이 고뇌가 아닌 “힘쓰고 애써”라고 번역한 것은 고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니아>에 비장한 결심 또는 각오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큰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가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경기를 앞둔 비장한 각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기에서 승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담대하게 경기에 임하겠다는 용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지 않으셨습니다. 헬라의 사상가들이 비판했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담대히 맞이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바닥에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였습니다.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며 슬퍼하면서도 잠들고 말았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河-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4)

힘을 더하더라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셔서,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닥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옮겨주시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솔직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과 함께 우리 모두 닮아야 할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쫓아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감람산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특정한 장소, 그곳(the place)이 있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소원을 솔직히 간청하신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러나 기도>로 마무리하셨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독특합니다. 마태과 마가와 달리 예수님의 기도가 한 번뿐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힘을 더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43절).

 
누가복음에 천사가 등장하는 본문이 몇 군데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각각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천사의 거룩한 영광으로 오신다고 예고하셨습니다(9:26).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가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16:22).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한 우리의 모습은 천사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20:36).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을 피해서 광야로 나갔을 때, 로뎀 나무 아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엘리야에게 힘을 준 것도 천사였습니다(왕상19:5-8). 중간기 문서인 마카비서에도 엘리에젤이라는 제사장이 순교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럼 누가복음은 물론 이스라엘 전통에서 천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使者, messenger)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고, 하나님 백성을 돕습니다. 그 천사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도우신 것입니다. 기도 역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도 천사의 도움과 하늘의 힘이 임하길 기대합니다. -河-

 

그러나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는
누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가 본문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습관대로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있는 잔을 옮겨주시길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2.
저는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그러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Abba)”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구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최선이라는 믿음에서 “그러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도를 예수님처럼
“그러나 기도”로 마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신앙입니다.

 
3.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의 응답 여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신앙이 좌에서 우로 크게 움직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기도가 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도 나의 계획에 맞춰서 조정되길 바라는
이기심이 우리 기도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 신앙의 확신이
하나님이 아닌
내가 드린 기도의 응답에 매이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께 중심축을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나누면서
기도가 습관이 되고
참빛 식구들께 “그러나 기도”가 온전히 장착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하나님,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16 이-메일 목회 서신)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3)

아버지의 뜻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그곳(the place)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에 조금 더 나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눈에 그립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신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순종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입니다.
지난 두 시간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예수님 닮기를 원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입니다. 우선, “아버지여”하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이어 오셨습니다. 모든 종교마다 기도하는 예식이 있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에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책임지시는 가장, 왕, 주인을 뜻했습니다. 아버지를 성적인 편향으로 읽기보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둘째는 예수님 앞에 닥치는 잔을 옮겨주길 기도하십니다. 곧 잡히셔서 심문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되실 예수님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수치, 조롱, 핍박,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하셨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가는 길을 가셨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키케로와 같은 당대의 사상가들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이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고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생각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가시겠답니다. 예수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겠다는 예수님의 <그러나> 기도와 무릎 꿇은 모습이 일치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역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고백으로 모든 기도를 마무리하기 원합니다.-河-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찬송가 288장을 작사한
시각장애인 패니 크로스비에 대한 말씀을 지난번에 나눴더니
아내가 우연히 재미 금융인 신순규씨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보았다고 알려줍니다.

 

신순규는 녹내장과 망막 바리라는 질병으로
아홉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갖는 직업이었던
안마사가 되는 것보다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점자책을 손수 만들어서 아들에게 주었고
어머니의 수고에 감사한 아들은 그것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에 유학와서 피아노 수업을 하다가
일반 학교로 전학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만난 미국 양부모님의 격려와 도전이 큰 힘이 되었고,
일반 학교 선생님들도 신순규라는 학생을 위한 특별 교재를 만들고
양궁 수업까지 시켜 주었답니다.

 

앞을 못 보지만 활달하고 도전적인 성격 덕분에
학생회장도 하고,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에 입학했고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다가 월스트리트와 연결되어서
27년째 세계적인 금융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2.
이분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
이미 한국에서 두 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가운데 2021년 팬데믹 기간에 출판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을 전자책을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헬렌 켈러와 패니 크로스비가 그랬듯이
결코 자기의 장애(disability)를 장애가 아닌 능력(ability)으로 바꿨습니다.
앞에 있는 세 가지 철자 dis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결심(determination),
장애인이 아닌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는 정체성 (identity)
자신만의 기술(skill)로 바꾸면서 가능성의 문을 열었습니다.

 

눈이 두 개를 넘어서 세 개 네 개여야 하고
쏟아지는 정보를 읽고 분석해서 투자를 결정하는 월스트리트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신순규씨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감사”라고 했습니다.

 

불평하고 절망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이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사하면서
앞에 놓은 과제와 삶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았습니다.

 

3.
신순규씨는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두 신순규씨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장애와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만의 삶과 직업을 개척한 분을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발견합니다.
은근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때로
의기소침하고 주춤거릴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이 쉽지 않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때, 장애를 이기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분들의 삶이 도전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줍니다.
앞으로 나갑시다.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갑시다.
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10)

 

하나님,
어려움과 방해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