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력 한 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상투적인 말 같지만
2022년을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달력이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았습니다.

 

교회에서 첫 번째 생일, 돌을 맞는 아기를 축복하면서
앞으로 매해 맞이할 인생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친히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한해 한해 사는 것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제정한
그레고리 달력을 사용하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똑같이 일 년 365일을 삽니다.

 

음력을 사용하던 우리나라도
1896년부터 소위 양력으로 불리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했고
60년 전인 1962년에 대한민국의 달력으로 공식화했습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날수를 기준삼아 만든 달력이니
자연의 법칙을 제정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365일 12개월 일 년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입니다.

 

2.
2022년을 시작하면서
팬데믹이 완전히 사라지고 포스트 팬데믹 시대가
활짝 열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고
주변에 코로나에 걸린 경우도 종종 보고
겨울이 되면서 바이러스가 다시 유행할 것이라는 보도도 접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꼬리가 꽤 깁니다.

 

저는 과학에 문외한이어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질병, 혼란, 불안과 두려움, 세상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느낄 정도로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위력이 세상을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만큼 이겨냈습니다.
단순히 비교할 수 없지만,
중세 유럽의 흑사병(페스트)이 300년 이상 지속된 것에 비하면
인류의 코로나바이러스 작전은 대성공인 셈입니다.

 

아쉬움도 있습니다.
힘을 합쳐서 백신을 개발하고 코로나에 대처하더니
금세 전쟁과 분열, 시기와 미움, 자연재해와 사고 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추하고 악한 본성이 다시 재연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3.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 나오는
마법의 화살처럼 우리 인생의 화살도 제 마음대로 날아갑니다.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게 됩니다.

 

2022년의 마지막 달을 시작하면서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가사대로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기 원합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 백성답게 믿음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많이 생각합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작은 것 한 가지라도 충실하게 실천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가 최고로 멋진 순간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하나님,
합력해서 선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1 이-메일 목회 서신)

내 주여 뜻대로

연속 설교 막간에 살펴보는 찬송가 해설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 찬양대가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 대로>을 찬양했는데, 3절의 마지막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살든지 죽든지 뜻 대로 하소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불렀던 찬송인데, 그날은 특별히 다가왔습니다. 가사가 강력했기에 다음 찬송가 해설로 일찍이 정해 놓았습니다.

 

<내 주여 뜻 대로>는 18세기 독일 루터교 목사였던 벤저민 슈몰크(1672-1737)가 가사를 썼습니다. 슈몰크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현재는 폴란드에 속하는 살리자(Silesia)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몰크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설교한 적이 있는데, 목사로서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가 슈몰크를 라이프치히 대학에 보내서 신학을 전공하게 했습니다. 슈몰크의 나이 21세였습니다.

 

슈몰크는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다가 아버지를 이어서 평생 같은 교회에서 목사로 섬겼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에 속하는 살리자는 가톨릭이 주류였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30년 전쟁이 끝난 후여서 종교 간의 갈등이 여전했습니다. 개신교에 속하는 루터 교회는 하나 밖에 없었기에 36개의 마을을 관할했습니다. 종탑도 올리지 못하고 심방과 같은 목회활동을 위해서는 가톨릭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슈몰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을 다해서 목회했습니다. 하루는 심방을 하고 집에 왔는데 화재가 나서 집이 불에 탔습니다. 들어가보니 두 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슈몰크는 그때의 심정을 <내 주여 뜻대로> 찬송에 담았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 대로 하소서.”

 

슈몰크 목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그 어려운 참사를 받아드렸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믿고 찬송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는 목회하는 가운데 뇌졸증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고, 녹내장으로 시력도 잃었지만 편하지 않은 다리를 이끌고 6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목회했습니다.

 

549장의 작곡가 홀부르크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에서 곡을 갖고 왔습니다. 마법의 화살을 쏘는 사냥꾼이 자기 뜻대로 화살을 조절할 수 없었듯이 화재로 두 아들을 잃은 슈몰크 목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을 연결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두려움 너머

해피 땡스기빙!!!

 

1.
지난 세 달여
주일예배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살아있는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인류에 찾아온 원초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긴장시켜서
미래를 준비하고 대처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제때 바르게 관리하지 않으면
삶이 힘들어지고,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삶에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놀라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처럼
정서적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성과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를 통해서
말씀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신앙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대면하고
관리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이 나오는 것도
말씀과 신앙으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배운 대로
말씀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몸이 약하고,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강하지 않은
후계자 디모데에게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너머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능력’입니다. 능력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평안”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저절로 되지 않기에
“절제(self-discipline)”를 강조했습니다.

 

3.
세상을 사는 동안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의 좋은 면을 개발하고, 나쁜 면은 다스리면서
두려움에 대처할 뿐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있는
능력, 사랑, 평안, 절제가
우리 가운데 활발히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우리 삶에 실제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24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워하지 말라 (11)

평안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함께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리고 추수감사절 만찬을 갖습니다. 그동안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다.

 

팬데믹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염려와 불안이 생겼습니다. 연초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물가는 치솟고, 경기 침체가 온다는 소식까지 들립니다. 그러니 팬데믹 이후의 삶이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번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두려움은 우리 안에 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두려움을 마주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세상이 불확실할수록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동안 나눈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합니다:“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스바냐 선지자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3:16). 이사야 선지자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끝까지 견딜 것을 당부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도 기억합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던 첫 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천사를 보내서 세상을 구원하실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단10:12).

 

참새 한 마리의 목숨까지 간섭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을 믿으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마10:31), 폭풍 속에서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합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6:50).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지난 석달 가까이 살았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도 강력합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河-

성경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예배의 교독문은
시편 104편이었습니다.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대비되는
시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에 좋은 선한 창조였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묘사하는데
그 표현이 구수하고 소박합니다.
아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처럼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감수성이
시편 104편 속에 깃들어 있어서
읽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2.
시편 104편이 묘사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몇 가지 창조 세계의 모습들입니다.
천천히 눈에 그리면서 읽으면, 말씀이 그림 언어로 다가옵니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3절)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8절)

 

“그가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13절)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삶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20절)

 

게다가, 시편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0절).

 

3.
성경은 그림책으로 말하면
흑백이 아닌 천연색의 다채로운 그림입니다.
밝은 색깔, 어두운 색깔,
기쁜 색깔, 우울한 색깔,
감사한 색깔, 불평과 탄식의 색깔
– 이 모든 것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하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너무 딱딱하지 않게
객관적인 또는 과학적인 진실에 얽매이지 않고
시편 104편 말씀처럼,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양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속에 푹 빠지고
말씀 속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하나님,
말씀의 바다에 풍덩 온 몸을 담그는 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7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워하지 말라 (10)

폭풍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깊게 드리운 불안과 두려움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다스리고 몰아내길 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에 더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질곡의 역사를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 행해서 자초한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에 둘러 쌓인 이스라엘의 삶은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깨우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주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 주관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건너편 벳세다로 서둘러 보내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요6:15). 예수님께서 손수 군중들을 해산시키시고 자신은 산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는데 갑자기 바다에 폭풍이 일었습니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서 쩔쩔매며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폭풍 속에서도 소리를 칩니다. 제자들 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50절). 예수님께서는 폭풍속에 있는 제자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배에 오르시니 폭풍이 잠잠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폭풍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마음이 둔해서 그렇습니다. 배가 도착한 게네사렛 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는 장면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위를 걸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바다와 폭풍을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끄덕끄덕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라는 말은
“레위인과 관련된”이라는 뜻의 라틴어
<레비티쿠스 Leviticus>에서 왔습니다.
영어도 제목도 <Leviticus>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 또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서
광야 시대에는 성막에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의를 전담했습니다.

 

레위기는 제목에 걸맞게
레위인들 즉 제사장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규정들이 많습니다.

 

2.
지난 3주 동안 배운 레위기 첫 세 장에는
소, 염소와 양 그리고 새를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burnt offering)
곡식을 빻거나, 조리해서 드리는 소제(grain offering)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화목제(peace offering)가 나옵니다.

 

희생 제물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에
소와 양에게 안수하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는 물론, 우리 자신을 제물에게 이전시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매우 세심했습니다.
제물을 직접 죽이고 (죽음은 꼭 필요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됨)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정성껏 분리해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소, 양과 염소, 새,
그리고 곡식까지 다양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대가족이나 부족의 경우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서민은 새나 곡식을 갖고 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리든지
레위기에서 알려주는 절차를 지켜서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가 됩니다.
제물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내장의 기름(당시는 최상의 것)과
콩팥(고대 사회에서는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함),
그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하고
화목 제사를 드린 당사자들이 나눠 먹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에
거룩한 제물을 갖고
다 함께 모여서 기쁨의 식탁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4.
레위기의 제사법들은
우리 신앙이 과하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임을 알려줍니다.

 

신앙을 지나치게 신비롭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다가
상식과 합리성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2:2)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러우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0 이-메일 목회 서신)